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

장백산-1 2022. 4. 7. 16:11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


내가 갖고 있는 아상이 커지고 권위가 높아질수록 나의 자유는 박탈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내 모습을 살펴보자. 내가 어떤 울타리에 갇혀 있는지, 나는 ‘어떠 어떠한 나’로 세상에 드러나 있는지, 대부분의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떠 어떠한 나’로 정해 놓고 산다. 제 스스로 각자의 울타리를 정해 놓고 그 울타리 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본래 모습은 어떻게 정해진 ‘나’ 가 본래 모습이 아니라 텅 비어 한없이 자유로운 ‘나’가 본래 모습이다.

 

나라고 하는 단어 앞에 그 어떤 수식어나 한정어도 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삶이 찾아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질 못하다. ‘나’ 앞에 붙는 수식어이나 한정어들이 나의 자유를 꽁꽁 옭아매고 있다.

 

‘스님인 나’가 있다. 그런데 스님인 나가 아니라면 자유로울 수 있는 일도 ‘스님인 나’라고 한정하면 그만큼 ‘스님’이라는 울타리에 갇히고 만다. 물론 스님이라는 정체성이나 위의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스님이라는 그 틀에 갖혀 버리면 얽매인 채 부자유스런 삶에 쉽게 속박당하곤 한다.

 

그냥 평범한 나는 자유롭게 놀고 장난치고 친구도 사귀고 할 수 있지만 ‘스님인 나’는 매사에 좀 더 조심스러워 진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평범하게 친구를 만나고 싶지만 ‘스님’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대학 교수인 나’ 혹은 ‘현역 국회 의원인 나’, 혹은 ‘현재 사장인 나’도 마찬가지다. ‘어떠 어떠한 나’가 있을 때 바로 그 ‘어떠 어떠한’이라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이고, 아상이다.

 

‘나’ 앞에 있는 수식어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고 가만히 관찰해보라. 그리고 나를 수식하는 그 한정들이 나를 얼마나 부자유스럽게 옭아매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혹시 그 수식어이며 한정어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혹은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장애가 되어 오히려 나를 옳아메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만 놓아버렸을 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가만히 되돌아 볼 일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그 지위에 상응하는 만큼의 행동을 하려고 애를 쓰고, 그만큼 권위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쓴다. 그 직책이며 직업이 나인 줄 착각하곤 한다. 물론 잠시 인연 따라 온 직위에 인연따라 응해주고, 연극을 해 줄 수는 있어야 하겠지만, 그 직책이나 직위에 빠져 버리고, 그것이 나인 줄 착각하고 집착해 버리면 그 때부터 순수한 나를 잃어 버리게 되고 자유스럽지 못한 삶의 굴레가 시작되는 것이다.

 

순수한 나를 잃어 버리게 되고 자유스럽지 못한 삶의 굴레가 바로 그 직책이나 지위가 가져 다 주는 한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한정으로 인해 오히려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보다 부자유스러운 부분이 훨씬 많다는 점은 생각지 못 한다. 나를 한정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내가 얼마만큼 부자유스럽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들을 바로 보아야 한다. 또한 바로 보았으면 바로 놓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직위나 직책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직위나 직책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아니 더 열심히 일 하면서도 충분히 직위나 직책이라는 그 한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고, 그로인해 커진 아상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지 ‘어떠 어떠한 나’가 나는 아니다.


법상 스님 <법보신문/2004-05-12/7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