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는 항상 눈앞에 있다. 大道常在目前 (대도상재목전)
지공화상 대승찬(大乘讚) - 譯 김태완
◇ 대도는 항상 눈앞에 있다. 大道常在目前 (대도상재목전) 대도(大道)라고 하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것은 역시 방편인 마음(心)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마음(심), 즉 대도(大道)는 항상 영원히 눈앞, 목전(目前),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니 대도(大道), 마음(心)이 곧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작용입니다.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라는 말은 人間의 얼굴에 붙어있는 눈의 앞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눈을 뜨는 행위가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눈을 감는 행위가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보는 행위가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듣는 행위가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감촉을 느끼는 행위가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뭔가를 생각하는 행위가 대도(大道), 마음(心),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말입니다.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이라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지만 아주 간단 명료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대도(大道), 마음(心)이 일어나면, 즉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생겨나면 이 세상 온갖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대도(大道), 마음(心), 즉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이 사라지면 온갖 것들이 사라진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심생종종법생 심멸종종법멸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입니다
또 눈앞(目前)이란 말은, ‘일이 목전(目前)에 닥쳤다.’란 표현이 있듯이 時間的으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란 뜻이고, 空間的으로는 내가 직접 보고 있는 ‘바로 여기 이 자리’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대도(大道) 즉, 마음(心), 눈앞, 목전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이 자리, 내가 지금 깨어있는, 내 存在가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道), 마음(心)이 곧 내 존재 그 자체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 자리에 도(道), 마음이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고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바로 眞理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大道가 항상 눈앞에 있다.’란 말은 결국, ‘大道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의 경험 바로 이것이다.’라는 말입니다. 大道, 즉 마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인데, 人間의 精神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精神이 흐트러져있다는 말은 精神, 생각, 마음, 의식이 무언가에 執着해서 끄달리고 구속되어 그무언가에 精神, 생각, 마음, 의식이 머물러 있다는 집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러 보통 精神, 생각, 마음, 의식이 모습(相 ,이미지, 모양)을 따라간다, 혹은 對相 境界에 머문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정신, 생각, 마음, 의식이 경계를 안 따라가고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확인됩니다. 道 즉, 마음, 目前,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는 둘이 없슴이 확인이 됩니다. 온 우주, 온 세상,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한 결 같이 이것(손가락 하나를 눈앞에 들어 보는 행위)입니다. 둘이 없이 한 결 같이 이것입니다. 道, 마음은 항상 눈앞에 있기 때문에 道, 마음은 지금 이 순간 直接的이고 끊어짐이 없습니다. 모습은 지속적(持續的)일 수 없습니다. 모습은 쉬지않고 끊임없이 변(變)하기 때문이지요. 모양은 계속 바뀐다는 말이죠.
항상 영원히 눈앞에 있는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비유를 들자면,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차창 밖을 보면 스쳐 지나가는 풍경(風景)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눈앞의 바끼는 모습을 인연(因緣)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차 안 의자에 앉은 내 발밑을 보면 항상 자기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자기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앉아서 차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는 거죠. 차창 밖의 모습 그와 같이 아무리 변화무쌍한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이 마음(心), 道는 항상 언제나 영원히 자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전혀 조금도 변화(變化)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무상(無常)하게 끊임없이 變하지만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目前)은 전혀 한치도 變化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두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고 말하는 겁니다.
◇ 대도는 비록 눈앞에 있지만 대도를 보긴 어렵다. 雖在目前難覩 (수재목전난도) 이것이 문제인데, 道, 마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항상 눈앞에 있지만 그것을 보기가 왜 어려우냐 하면 人間의 精神이 허깨비 꿈 같은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인간 정신이 끊임없이 變化하는 세상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에 變함이 없는 道, 마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최대 취약점입니다. 끊임없이 變해 가는 모습이란,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 다 變하는 것이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다 變하는 것이고, 코의 냄새, 입의 맛, 몸의 촉감, 이런 것들이 다 쉬지않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變化해 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느낌 감정, 생각 상상 망상 번뇌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심 알음알이(識) 지견 견해 지식 이해 같은 것들도 계속 變化해 가는 것들입니다. 이런 스쳐 지나가는 모습(相)들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보면 變하지 않는 이 도(道), 이 마음, 눈앞,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비유에서처럼, 사실 變化하지 않는 이 자리, 도(道), 마음(心),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目前)에 서서 變化하는 세상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한결같은 이 자리에서 變化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인간은 變하는 모습에만 精神이 팔려서 전혀 變하지 않는 한 결 같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道, 마음, 눈앞, 목전(目前) 텅~빈 이 자리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變化하는 모습에 정신(精神)이 팔리더라도, 한 결 같이 變化하지 않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道, 마음, 눈앞, 목전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서 變化하는 것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 道,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진실(眞實), 이 세상의 참 모습입니다.
고정되어있는 모습이 아닌 무상(無常)한 변화하는 모습에 집착해서 끄달리는 인간 精神의 習性 習慣 때문에 도(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을 보는 것이 어렵지만,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을 반드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결 같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精神 차리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번 보세요! 생각도 바뀌고 모습도 바뀌고 시간도 바뀌고 있지만, 그 바뀌는 순간순간은 恒常 영원하게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일 뿐입니다.
시계의 숫자판을 分別해 보고 있으면 시계 초침이 한 눈 한 눈 지나가는 순간순간이 바뀌어 가지만, 숫자판을 보지 않고 초침 하나만을 精神을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초침이 한 칸 한 칸 지나가는 순간순간이 變함이 없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텅~빈 바탕자리입니다. 그저 바로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 그대로일 뿐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는 전혀 變하는 것이 없습니다.
시계 숫자판을 分別해서 보면 초침(秒針)이 숫자판을 한 바퀴 돌고 있지만 초침 자체만 보고 있으면 초침은 항상 같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시계 초침과 똑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여기에 있는 겁니다. 눈 앞에서 움직이는 초침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을 뿐 달라짐이 없어요. 항상 그대로예요. 우리는 초침이 움직이는 매순간순간을 영원히 살고 있을 뿐이에요. 다른 순간이 없어요. 그래서 한 결 같이 눈앞(目前),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도(道), 마음(心)에 있을 뿐이다 이겁니다. 내 삶, 내 존재가 거기서 눈앞에서 確認되고 있는 거죠. 초침이 한 칸 한 칸 움직일 때마다 ‘내 존재가 대도,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구나!’ 하고 확인(確認)이 되는 겁니다.
내 존재(存在)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 텅~빈 바탕자리에 있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매 순간 끊임이 없습니다. 계속 같은 자리에 늘 그대로 있습니다. 달라짐이 없어요.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불명확할 수 있지만 確實하게 되면 24시간 내내 대도,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끊어짐 없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대도(大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눈앞에 있지만 보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精神이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을 쫓아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지금 눈앞에서 초침이 한 칸 한 칸 움직일 때마다 살아 있는 이것, 즉 대도(大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이 있습니다. 초침이 한 칸 한 칸 움직일 때마다 대도(大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에 내가 살아 있잖아요? 대도(大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이것을 보지 못하고 시계판에 있는 1, 2, 3, 4, 5, 6 등의 숫자만 보고 있으면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大道, 마음을 놓치고 맙니다.
◇ 도(道),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참된 본체, 바탕, 모습을 깨닫고자 하면, 소리, 색(모양), 언어를 제거하지 말라. 若欲悟道眞體 莫除聲色言語 (약욕오도진체 막제성색언어) 소리, 색(형체), 언어가 뭡니까? 사람들이 날마다 接하고 있는 것이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대상이잖아요. 우리가 눈만 뜨면 늘 직면하는 것이 색깔(모습)이고, 들리는 소리이고, 사람을 응대하면 말을 하게 되죠. 그런 것들이 모두 지나가는 因緣일 뿐인데, 마치 시계 초침이 한 칸 한 칸 지나가듯이, 지나가는 색(모양 모습),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 언어라는 因緣들이 바로 마음이, 道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표현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 모양 소리 말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색, 소리, 언어를 제거하면 마치 꿈도 안 꾸는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해서, 눈앞에 道가 있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깨어있는 精神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道, 마음(心)을 알아차리려 하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로 變化하면서 흘러가는 모양, 소리, 언어 같은 因緣들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로 變化하면서 흘러가는 모양, 소리 말과 같은 因緣들 하나하나가 전부 도(道), 마음(心), 눈앞,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표현해서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자리, 눈앞,목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곧 보고, 듣고, 생각하는 活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경험하고 있는 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活動에 마음, 道,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드러나 있는 겁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活動 여기에서 道,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확인하는 겁니다.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活動 이것이 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지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活動 이것을 떠나서 따로 道,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흔히 거울의 비유를 들잖아요? 무엇인가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이 거울이죠? 만약 거울이 아무 모습도 비춰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울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거울이라 할 수 없는 거죠. 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라고 하는 것도 거울의 작용과 똑같습니다. 모양, 소리, 언어들이 도,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에 비춰져서 모양, 소리, 언어들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마음, 살아있는 道, 살아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살아있는 눈앞, 살아있는 목전라고 할 수가 없죠.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活動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볼 때 보이는 모습을 정신이 쫓아가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여기 컵이 있는데 이 컵을 보면 컵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뭔가 살아 움직이는 게 있습니다. 컵을 보고 있는 순간 이 컵에 뭔가 살아 움직이는 게 있을 겁니다. 컵은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사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컵이 살아 있어요. 컵이 죽어 있어 생명이 없는 게 아니란 말이죠.
컵이 어디서 살아있습니까? 그곳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마음, 道,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이에요. 두두물물(頭頭物物) 우주삼라만상이 제각각 설법을 하고, 바위가 설법하고, 나무가 설법을 하고, 동물이 설법을 하는 곳이 바로 살아 活動하는 이것, 이 마음, 道,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텅~빈 바탕자리 입니다. 그래서 컵은 살아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죽어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눈길이 미치는 곳, 생각이 미치는 곳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살아 있습니다. 도(道)가 있으니까, 마음이 있으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이 있기 때문에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겁니다.
도(道), 마음(心)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 생물, 무생물, 광물, 유정 무정, 태란습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살아 있는 겁니다. 온 宇宙가 통째로 몽땅 살아 있는 것이지 죽어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온 宇宙가 오직 마음뿐, 도(道)일뿐, 눈앞일뿐, 목전일뿐,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일뿐이기 때문입니다.
◇ 언어가 바로 대도, 마음인데, 번뇌를 끊어 제거할 필요가 있겠는가.
言語卽是大道 不假斷除煩惱 (언어즉시대도 불가단제번뇌), 말, 언어(言語)는 妄想 번뇌 分別, 즉 생각의 산물입니다. 언어란 生覺에서 나오는 것이고, 生覺은 곧 妄想 分別 煩惱입니다. 그러나 번뇌 망상 분별이 곧 마음, 대도(大道),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이니까, 번뇌 망상 분별을 끊어 없앨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여 처음 공부한 요가의 삼매(三昧)를 잘못된 공부라 하여 버렸습니다. 요가에서 말하는 삼매란 묵묵히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생각을 없앰으로써 번뇌 망상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을 意圖的으로 텅~텅 비워서 깨끗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거울을 두고 거울더러 아무 것도 비추어주지 말고 꼼짝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과 꼭 같아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죠. 마음속에 아무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不自然스럽게 造作된 마음상태잖아요? 도(道)는 자연自然이예요, 自然! 인간이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을 공부하면 생활 자체가 아주 自然스럽고 便安해져야 하는데, 道, 마음을 공부하니까 오히려 생활이 더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면 무엇 때문에 道, 마음을 공부하겠습니까?
생각을 억지로 틀어막으려고 하고, 억지로 고요해지려고 하는 것은 不自然스럽고 不便한 행위입니다. 진정으로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통달(通達)하면, 엄청 시끄러운 것이 곧 지극히 고요한 것입니다. 말을 마구 하면서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있다 이겁니다. 생각이나 말 같은 경계(境界)를 끊어 없애는 일은 여법(如法)하지 않습니다.
생각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자리, 도(道), 마음(心),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묵묵히 그대로 있는 겁니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해도,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순간 여기 이 자리를 모르면 그 생각과 말이 망상 분별 번뇌가 되지만,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通達하게 되면 생각(生覺), 분별 망상 번뇌하는 그 자체가 곧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말하는 것이 곧 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가 다 도(道), 마음(心),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입니다.
앞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을 비유로 든 것처럼, 지금 기차를 타고 가는데 자기(自己)가 흔들림 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차창 넘어 지나가는 바깥 경치만 보고 있으면 끝없이 不安할 겁니다. 왜냐하면 安定되어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이 계속 차창 바깥의 모습들이 바뀌면서 흘러가니까, 눈앞에 믿고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굉장히 불안(不安)한 겁니다. 흔들리지 않는 곳에 자리 잡지 못하면 나에게 다가오는 因緣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어서 크게 흔들리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곳, 즉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마음(心), 도(道) 자리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因緣들을 맞이하고 누리고 보내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멸(寂滅)의 자리,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 즉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의 자리에서 생멸법(生滅法 :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을 쓴다.’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어떤 차별 분별 분리도 없는 자리, 무분별심(無分別心)의 자리, 무심(無心)의 자리, 즉, 도(道), 마음(心),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차별 분별이 있는 차별 분별심을 사용한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온갖 變化해 가는 것들 속에 있지만 사실상 흔들림 없고 변함없는 한결같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마음자리, 道의 자리, 눈앞,목전에 있는 겁니다.
아까 시계 초침을 예로 들었는데, 시계 초침을 보면 끊임없이 가고 있죠? 그런데 초침이 째깍 째깍 움직이는 그 순간순간을 보면 초침은 한 결 같이 초침일 뿐이에요. 초침은 주위 다른 因緣과의 관계 속에서 變化해 가는 그림이 그려지는 거죠. 초침이 한 번 째깍거리는 그 순간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없단 말이죠. 초침이 한번 째깍 하는 이 순간에 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도(道) 자리, 마음(心) 자리에 있습니다. 초침이 째깍째깍 가는데 초침 위에만 있으면 지나가는 것도 없고 다가오는 것도 없이 항상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여기에 있는 겁니다.
초침은 시계의 숫자판 위를 한 바퀴 빙 돌면서 온갖 變化를 다 겪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 도(道), 마음(心) 자리에서 째깍 하는 초침은 아무 변화가 없어요. 늘 한결같은 거죠. 이 한 결같이 변함이 없고 끊어짐이 없는 '이것'이 마음(心), 도(道), 목전, 눈앞, 지금 이순간 여기 이 자리이고 선(禪), 법(法), 부처(佛), 보리, 깨달음, 진리입니다. 이것만 분명하면 번뇌 망상 분별을 제거하기 위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번뇌라는 것은 妄想이라 하듯이 사실 허깨비, 꿈입니다.
◇ 분별 망상 번뇌는 본래 텅~비고 고요하지만, 망령된 생각(망상, 망령)이 번갈아 서로 얽힌다.
煩惱本來空寂 妄情遞相纏繞 (번뇌본래공적 망정체상전요) 遞갈릴체 纏얽을전 繞두를요 분별 망상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인데, 분별하는 생각을 따라가니까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겁니다. 초침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사람들이 초침 밑에 있는 숫자를 따라가니까 10초가 지나고, 20초가 지나고, 30초가 지나가는 식으로 시간이 흘러간다는 착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번뇌 분별 망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이 순간 초침 위, 즉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으면 아무 것도 없단 말이죠. 분별 망상 번뇌라고 할 만한 게 없단 말입니다. 어떤 것도 거기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는 있을 수 없어요.
다만 이 법(法) 하나, 즉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만이 오롯할 뿐입니다. 법(法) 하나, 즉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어떤 것도 없습니다.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냥 법(法) 하나, 즉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일 뿐입니다.
망령된 생각이 번갈아 일어나 서로 얽히는 것이 문제죠. 실체가 없는 허망한 분별 망상이 번갈아 서로 얽히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실제로 있는 것 처럼 여겨기고, 여기와 저기가 있는 것 같고, 옳고 그름이 있는 것 같고, 이것과 저것이라는 分別이 생겨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서 그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생각들에 집착해서 끌려다니게 되면 끝없는 번뇌가 일어나는 겁니다. 번뇌(煩惱)란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곧 변화하는 모습을 정신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분별 망상 번뇌 없는 법(法)은 바로 '이것', 즉 눈앞, 목전,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입니다.'이것'(손가락 하나를 눈앞에 들어보여주는 행위)! 가장 진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이것' 實在! 바로 지금 이것,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가장 진실하고 직접적인 것, 그러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로 돌아와야 돼요. 바깥으로 끌려 다니던 정신(精神)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 도(道)의 자리, 마음(心)자리로 돌아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人間의 精神 상태라는 것은 끊임없이 바깥 對相을 향해 끄달려 나간단 말입니다. 마음공부란 그렇게 바깥 대상으로 마구 달려 나가는 마음, 정신, 생각, 의식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마음(心) 자리, 도(道)의 자리에 딱 흔들림없이 안정시키는 겁니다. 진지한 관심만 가진다면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것이니, 무엇을 좋아해야 할지 무엇을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一切如影如響 不知何惡何好 (일체여영여향 부지하오하호)
변화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因緣들은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는 겁니다. 유일하게 흔들림 없는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에 있으면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습니다.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엔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허허공공(虛虛空空) 텅 텅 비어있습니다.
인간의 의식 마음 정신 생각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에 딱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하니까 변화하는 모습에 정신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만, 그렇게 변화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세상 因緣들에게는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목전, 눈앞,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만이 가장 분명(分明)하고 결코 부정할 수 없고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그저 '이것'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목전, 눈앞,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고, 우리가 혼란스럽게 생각을 따라서 변화하는 모습에 붙잡혀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그것은 전부 꿈이고, 환상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비록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생각을 따라 간다 하더라도 결국 다른 게 없습니다. 아무리 꿈을 꾸고, 망상을 부리더라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입니다! 꿈, 허깨비, 망상 그 자체가 바로 '이것',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 목전,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 온 우주 그대로가 道,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일 뿐입니다. 온 우주(宇宙)가 모두 도(道),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일 뿐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엔 다른 게 없습니다. 도(道), 마음,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말고 만약 다른 게 있다면 부처님의 법(法)이 불도(佛度)가 불이법(不二法)이라는 것은 옳지 않은 말이 됩니다. 불이법(不二法)이라는 말 뿐이 아니라 유일신(唯一神)이라는 말도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계합(契合)만 하면, 실체가 없이 스쳐지나가는 因緣일 뿐인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불안하게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계속 흘러가는 물결 때문에 어지럽습니다. 그런데 한참 흘러가는 물결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에 물결이 아니라 물이 보이는 때가 와요.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결이 늘 한결같은 물임을 보게 되면 물결 때문에 어지럽지는 않습니다.
손전등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손전등을 켜고 길을 가면서 쭉 비춘다고 합시다.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에 비춰진 길의 모습은 계속 變하면서 지나가지만 손전등의 빛은 어떤 길을 지나가더라도 變함없이 그 자리에 밝아 있단 말이죠. 道, 마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목전, 눈앞이 손전등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손전등 앞에 어떤 물체가 나타나도 그것은 손전등의 빛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니까 불안하지 않은 겁니다.
거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만약 거울에 비춰지는 그림자인 영상(影像)을 따라다닌다면, 거울은 거울앞에 나타나는 因緣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을 비추니까 어질어질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 그 자체가 분명해지면 아무리 다양한 영상(影像, 그림자의 모양)이 거울 앞을 지나가더라도 거울은 한결같이 거울 그대로 입니다. 거울은 영상에 흔들림이 없어요. 마음도 거울과 같아요. 마음 자체가 흔들림 없이 분명하면, 눈 앞에 어떤 광경(光景)이 벌어지더라도 마음 자체는 흔들림이 없이 그 마음 그대로 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보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합니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즉 오온(五蘊)은 끊임없이 무상(無常)하게 변해가는 생멸법(生滅法 :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공(空)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입니다. 그래서 생멸법(生滅法)이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임을 확실하게 확인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마음(心), 도(道),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임을 확실하게 확인하면, 늘 변하지 않고 끊어짐 없이 한결같은 '이것'이 눈앞에 살아 있습니다. 눈앞에서 영화 화면(畵面) 같이 바뀌어 가는 世上은 그야말로 꿈, 신기루, 아지랑이,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마음(心) 하나 뿐, 법(法) 하나 뿐, 도(道) 하나 뿐, 눈앞 하나 뿐, 목전 하나 뿐, 지금 이 순간 여기 이자리 하나 뿐임이 분명하다면 온갖 가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그것들은 전부 그냥 법(法), 마음(心), 도(道),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 하나일 뿐입니다. 다른 게 없어요. 법(法), 마음(心), 도(道),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 이것 하나를 체험하시기만 하면 돼요. 그림자 같고 꿈같은 지나가는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좋아할 이유도 없고 싫어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집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세속적 인연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세속적 인연에 연연하면 마음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마음공부는 변함없이 흔들림 없는 이 '하나', 법(法), 마음(心), 도(道), 눈앞, 목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 딱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공부가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자리 잡히면 밖에서 불어오는 인연의 바람에 흔들림이 없어요. 인연에 응(應)하면서 살지만 항상(恒常) 자기(自己) 자리, 도(道)의 자리, 마음(心) 자리,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흔들림이 없이 있는 겁니다.
출처 : 선(禪)으로 읽는 대승찬(大乘讚), 침묵의 향기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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