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관한 상((相)을 내려놓을 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이것이 깨달음이다.
누구나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상, 관념, 이미지를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이런 가람일거야'하는 나름대로의 생각하는 기준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스님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깨달은 사람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모든 것을
환히 다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이 맞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 만들어 놓은 깨달은 사람에 대한 상, 관념, 이미지가 있다. 더욱이
깨달은 자에 대한 그런 상은 너무나 높고, 신비적이며, 우리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선(禪)에서는 깨달은 자를 그저 평상심, 즉 평소의 마음을 쓰고 사는 사람일 뿐,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번뇌 망상이 소멸되었을 뿐, 분별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깨달은 자에 대한 이같은 가르침을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다.
깨달은 자는 척 보면 우리의 미래를 맞힐 수도 있고, 팔자를 한 눈에 알아보며,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아맞히고,
조금 뒤에 절에 누가 올지도 훤히 다 아는 사람일거라고 여긴다. 혹은 깨달은 자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일 것이고,
아주머니나 평범한 할아버지일 리가 없으며, 큰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특별한 복장에
특별한 분위기를 띄고있는\는 사람일 것이라고 여긴다.
깨달음에 관한 이같은 모든 상, 관념, 이미지가 사람들의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위에서 말한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런 깨달음의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추구하다가는 삿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깨달음에 대한 그 어떤 상, 관념, 이미지도 가지지 말라. 스스로 내가 깨닫기 전에는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깨달음에 관한 상, 관념, 이미지이 없을 때만, 비로소 깨달음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깨달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깨달은 자는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당신 곁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높은 깨달은 자에 대한 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평범한 깨달은 자가 눈에 띌 수 없다.
심지어 스스로 성품을 확인하고서도, 깨달음은 이런 것일 리 없다고 여김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깨달음에 대한 상을 내려놓을 때, 깨달음은 이미 벌써 아주 가까이 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이것이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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