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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신은, 부처는 단죄하지 않는다

장백산-1 2023. 8. 26. 14:23

진리는, 신은, 부처는 단죄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많은 종교들은 두려움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람들을 조종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말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키라라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죄의식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는 두려움이나 죄의식이라는 관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신이 우리들을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보내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그러나 사실은 지옥은 없다. 죄도 죄의식도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이라는 환상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같은 벌은 신이 부처가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지옥이나 고통은 실체적인 곳이나 장소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배가 터지도록 배가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배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지옥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지옥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움에 빠지지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이라는 망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라는 생각이 없는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품으라. 부처는 무한한 자비심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 자신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삶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자비심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에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이라는 하나에 귀의할 것이다. 무한한 자비심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가짜에 속아 살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사랑이라는 파동 자비심이라는 파동으로 출렁일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하라. 사랑할 때 더 많은 사랑이 드러난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