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은 분리된 둘이 아니다.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는 내가 따로 있고, 들리는 소리가 따로 있어서, 내가 소리를 듣는다고 분별을 한다.
그러나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떠나 듣는 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소리를 듣는 나를 떠나 들리는 소리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들리는 대상인 소리와 소리를 듣는 나 그 둘은 연기적으로 동시생 동시멸, 인연생 인연멸로 서로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본래 소리를 듣는 나도,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도 따로 없지만, 그 둘은 서로 인연이 화합할 때만 인연가합으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 없는 것, 즉 무아이고 무상한 것을 육근과 육경이라는 인연을 화합시킴으로써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렇듯 육근과 육경이 인연화합하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기며 육경에 휘둘리고 끌려 다니는 상태를 육근이 오염되었다고 하고, 이를 인연생 인연멸임을 똑바로 보아 그 어떤 육경이라는 경계에도 끌려가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육근이 청정하다고 한다.
법회에서 축원할 때, 육근청정을 발원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은 육근이 오염되어 있기에, 육경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을 한다. 중생은 연기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육근이 있으므로 육경이 있는 연기적인 관계인 줄 모르고,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기기에, 외부 경계에 집착하고, 끌려다니고, 놀아나고 휘둘리면서 취사간택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좋어보이는 것은 집착하여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데 취해지지 않을 때 괴롭고, 싫어하는 것은 거부하며 만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만나야 할 때 괴롭다. 육근이 오염되니 괴로운 것이다. 육근 육경의 연기작용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처럼 육근 육경의 가르침은 곧 연기법의 다른 버전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와 세계는 이처럼 인연 따라 생겨난다. 내가 따로 있고, 내 바깥에 이부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으므로 세계가 있고, 세계가 있으므로 내가 있을 뿐이다. 즉 나와 외부세계는 서로에게 기대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에, 그 둘은 사실 분리된 둘이 아니다.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나와 보이는 세상이 따로 따로 분리된 둘이 아니다.
글쓴이 : 법상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별함이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기... (0) | 2023.12.01 |
---|---|
매 순간 지금 여기에 깨어있기... (0) | 2023.11.26 |
‘참나’는 실존하는 존재인가? (2) | 2023.11.23 |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은 무엇인가? (0) | 2023.11.22 |
내게 필요한 선지식(스승)은 이미 삶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으로 와 있다. (0) | 2023.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