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실상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장백산-1 2024. 4. 4. 19:46

실상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7. 분별에 따른 오해

분별은 실상 보지 못하게 해, 분별 대상과 나머지 세상 공존
분별없는 실상을 공이라 표현, 실상 바로 보면 곧 중도 정견

대자유를 얻겠다고 길을 떠난 구도자들이 스승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분별을 내려놓아라”일 것이다. 분별만 멈추면 구도자가 그리던 우리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자주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도대체 분별이 무엇이길래 그렇게도 구도자는 분별을 하지 말라고 귀가 닳도록 가르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나눠 볼까 한다.

우선 분별이라고 하면 나눌 분(分), 다를 별(別)을 써서 무언가를 달리 나눈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 분별한다. 더불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 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것, 오래된 것과 새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등을 분별한다. 즉 분별을 하게 되면 나누어 있지 않은 하나에서 분별하려는 대상을 가위로 오려 내듯 따로 떼어내어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기 전에는 하나였던 것이 분별하게 되면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연필’을 분별하게 되면 연필이라는 대상과 ‘연필이 아닌 나머지 세상’으로 나뉜다. 하지만 나뉘었다 하더라도 연필과 연필이 아닌 나머지 세상은 밀접하게 서로 의지해 있지,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없게 된다. 선(善)이 있으려면 반드시 선하지 않는 악(惡)이 같이 존재해야 선이라는 분별이 가능해진다. 악은 없고 오직 선밖에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라. 세상에 오직 선밖에 없다면 선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가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하다.

오래되었다는 것도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오래되었다고 분별이 되고, 행복도 불행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둘은 서로 연기되어 동시에 생겨난 것이지, 하나만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큰 오해가 생긴다. 보통 우리가 “이것은 연필이다”라고 분별할 때, 연필이 아닌 나머지 세상과 함께 연필이 동시에 등장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연필만 생각하지, 연필이 아닌 나머지 세상은 잊어버린다. 선을 분별하게 되면 악도 함께 있게 되지만, 오직 선만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사고하지, 같이 붙어 있는 악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분별은 실상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망상이 되어 버린다. 원래부터 분별된 대상과 그 나머지 세상이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데, 나머지 세상을 잊어버리니 전체로써 실상은 깨닫지 못하고 오직 분별된 대상만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분별된 대상이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그 어느 순간에도 전체로써 존재했지, 별도로 분리되어 존재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분별은 실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상상으로 나누어 놓는 일인 것뿐이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서만 한바탕의 세상을 가위로 오리듯이 언어로써 분별해 놓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 한 바탕의 모습이 조각조각 분절되었던 경우는 잠시도 없었다. 오직 생각을 통해 세상을 보면, 이름에 따라 각각의 의미와 특별한 존재감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이 쉬면 여여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일체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의 일체를 깨닫고 나면 이상하게도 세상에 모든 것이 있는데,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분별을 해야 뭐가 따로 있다는 존재감이 생기는데, 분별이 쉬다 보니까 개별 존재감은 사라지고 텅 빈 허공같이 가볍고 무한히 자유롭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잘 못하는 것도 아니다. 밥 먹을 때 잘 먹고, 일해야 할 때도 일 잘한다. 하지만 본인 마음은 분별이 없으니 걸림이 없이 밝고, 막힌 곳 없이 활짝 열려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분별이 없는 실상을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언어가 끊기고 생각이 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일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공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뜻은 또 아니다. 전체에서 생각으로 연필만을 따로 떼어내어 분별을 하지 않을 뿐이지 연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연필이라는 색(色)에서 공(空)이 느껴지는 것이지 색을 떠나서 공을 따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실상을 바로 보면, 있다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서,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 중도의 정견이 자연스럽게 서게 된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23호 / 2024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