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은 완벽해 내가 손댈 곳이 없다
8. 우리의 본성
본성은 항상 깨어서 밝은 법 태양이 항상 밝은 것과 같아
본성은 인과 초월해 있으니 분별하던 습관 멈춤이 중요
이 공부를 하면서 간단하지만 정말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깨달으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신과 상관없이 항상 깨어 있는 본성을 확인하려 하는지”이다. 우리의 본성은 나와 아무런 관계없이 항상 깨어있어서 밝다. 본성은 마치 태양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밝은 것과 같다. 내 노력 여부에 따라 태양이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거나 하는 법이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이치를 모르면 자신의 노력으로 본성을 밝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더불어 본성의 깨어있음 까지도 본인의 노력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우리의 본성은 이미 완벽해서 내가 전혀 손을 댈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
즉, 이 공부는 나를 잊어버리고 본성을 깨닫는 공부다. 항상 끝없이 자기에게로 집중되어 있던 마음이 본성으로 이동해서 본성에다 완전히 이사하는 공부인 것이다. 그래서 자꾸 자기 자신을 앞장세워 자기가 무언가를 해야지만 깨달음이 올 것 같은 느낌에서 비롯된 일체의 헛된 노력을 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내가 노력하든 안 하든 우리의 본성은 이미 항상 활짝 깨어나 우리 눈앞에 훤희 이렇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꾸 노력을 하게 되면 노력하는 내용에 집중하느라고 이미 깨어나 드러나 있는 본성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 차이를 모르는 분은 본성을 깨닫는 일도 인과(因果) 안에서의 일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내 노력이 원인이 되어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인과를 초월해 있다. 왜냐면 우리의 본성은 어떤 원인으로 어떤 결과를 받든 아무런 상관없이 항상 여여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펼쳐지든, 불행한 일이 펼쳐지든 아무런 상관없이 항상 밝은 것이고 그러기에 선사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우리의 본성은 “대자유”라 하고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면 새로 생겨난 것은 언젠가 변해서 사라지지만, 모양이 없는 본성은 새로 태어난 적이 없기에(無生法), 상황이 변한다고 사라지는 법도 없는(不生不滅) 것이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육조단경’에 담겨 있는 두 편의 시다. 신수 스님이 먼저 쓴 시를 보면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자”이다. 이 시를 보면 아직도 자신이 무언가를 열심히 갈고 닦는 본인 행동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고, 그 노력이 원인이 되어서 본인의 마음 거울이 밝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마음의 포커스가 본성 자체로 이사를 간 것이 아니고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로 와 있다.
하지만 육조혜능 스님의 시를 보면 나는 사라지고 모양 없는 본성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마음의 관심이 본성으로 완전히 이사를 간 경우인 것이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요” 이미 완벽하게 완성이 되어 있는 본성은 부지런히 털고 닦지 않아도 이미 항상 깨끗해서 티끌이나 먼지가 묻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대단한 진리이기에 육조어록이 아니고 ‘육조단경(六祖壇經)’으로 격을 높여 후대에 전한 것이 아닌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항상 밝게 드러나 있다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한 본인 상황을 비추어 보면 자연스럽게 답답함이 올라올 것이다. 만약 답답함이 올라온다면 사실 공부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다 드러난 본성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까지 생긴다면 더욱더 공부가 잘 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이유는 마음이 갈 방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깨닫기 위해 노력을 했을 때는 마음이 노력의 방향으로 도망가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노력을 못하게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딱 놓인 것이다.
마음이 도망갈 길이 끊어지고(心行處滅)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뭐라고 알 수 없는 답답한 지금 이 상태가 사실은 본성에 아주 가까이 와 있는 상태이다. 평소 분별하던 습관을 멈추고 무언가를 자꾸 알려고 하고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 없이, 아무런 맛 없는 밋밋한(沒滋味) 이 자리에서 머물러 보라. 공한 본성이 스스로 깨어나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묘한 일이 멀지 않으리라.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25호 / 2024년 4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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