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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둘로 나눠지지 않는다

장백산-1 2024. 7. 29. 16:00

진리는 둘로 나눠지지 않는다

 

 

법성게의 첫 번째 구절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입니다. 법성은 원융해서 무이상이다. 즉,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원융하고, 아주 둥글고 원만해서, 아주 융합 융통자재해서 ‘두 가지 상으로 나눌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원’은 ‘가득하고, 크고, 원만하다, 모나지 않고 평등하고 모순이 없다’ 그런 뜻이고, ‘융’은 ‘융합하다, 화합하다, 통하다, 걸림 없고, 장애 없이 화합하여 통한다’ 이런 의미라고 그래요. 법의 성품은 원융하다, 융통자재하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단 말이에요. 어디 하나 모난 데 없고,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고, 융섭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원융한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면 무이상 즉, 두 가지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이게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법성게를 보고 선사스님들은 의상스님이 이렇게 210자로 액기스만을 뽑아놓았지만, 이것도 번잡하다. 그냥 법성원융무이상하면 딱! 끝나는데 뭐 이렇게까지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할 정도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 모든 진리가 딱! 함축되어있다고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아니다라는 이 말에 중생과 깨달은 자(부처)가 나눠지는 길목이 바로 여기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 있습니다. 중생들은 세상을 보면 대상을 보고 언제나 둘로 나누어서 봅니다. 그걸 분별심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법의 성품, 법성을 깨닫고 나면 두 가지 상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요. 원융하게 본단 말이죠. 둘로 나누는 분별법을 이법이라 그러는데, 그게 중생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긴 게 있으면 그걸 인연으로 해서 짧은 게 있단 말이에요. 예를 들어 죽비를 보면 이게 긴지 짧은지를 대번에 압니다. 이게 바로 둘로 나누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짧은 게 있어야 긴 게 있지 않습니까? 죽비가 전봇대 옆에 가면 짧고 이쑤시개 옆에 가면 긴데, 이걸 가지고 길다라고도 할 수 없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데 우린 길다라고 했다라는 그 자체가 벌써 둘로 나뉘는 판단 분별 망상에 속아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죠.

 

절에 오니까 좋고, 교회 가니까 별로다라는 그것도 둘로 나누는 마음, 분별심입니다. 뭔가 개념 지어졌다 하면은 그것은 둘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둘로, 셋으로, 넷으로, 다 쪼개진단 말이죠. 이걸 보고 컵이다! 이 안에 물이 담겼다! 그렇게 하면 여기 물이 담겼다라고 알려면, 알음알이, 분별심, 인식으로, 의식으로 알려면 물과 물 아닌 것을 보고 분별해서 아는 마음이 있어야 되잖아요.

 

분별이 뭡니까? 나눌 ‘분’자, ‘나누어서 구별한다’ 이게 분별 아니겠어요? 둘로 나누는 마음, 이렇게 둘로 나누는 마음이 바로 분별심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어요. 옳고 그런 게 있고, 선악이 있고, 대소가 있고, 길고 짧은 게 있고, 잘난 게 있고, 못난 게 있고, 모든 대상을 볼 때,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대상을 본단 말이요. 해석해서 본단 말입니다. 둘로 나누어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막는 유일한 분별망상입니다.

 

분별망상만 없으면 우린 그 자리에서 부처를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뭘 보든 그것을 부처로 보고, 무슨 소릴 듣던 그 소리에서 부처를 들을 수 있고, 언제나 부처를 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오랜 세월, 오랜 억겁을 이어오면서 가져왔던 그 둘로 나누는 마음, 분별심 때문입니다. 그러니 둘로 나누기만하면 벌써 진리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중생들은 무엇이든 둘로 나눠서 분별로 받아들이는데 반해 법의 본래 성품은 원융하여 둘로 나뉘지 않는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란 것입니다. 이 말은 분별심만 없으면 그 자리에서 법성이 드러나고, 깨달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