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아뢰야식은 중요성만큼 명칭도 다양

장백산-1 2024. 8. 6. 21:25

15. 아뢰야식과 다른 식들

 아뢰야식은  중요성만큼 명칭도 다양

모든 마음 근본이 돼 근본식,  업종자를 보관하기에 종자식
여덟 번째 마음이어서 제팔식, 번뇌 · 부처 속성 지녀 염정식

 

유식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아뢰야식일 것이다. 아뢰야식은 대승의 수행자들이 깊은 명상 체험을 통해 성취한 깨달음의 산물이다. 대승의 성자들은 아뢰야식을 부처님의 설법으로 믿고 있다. 아뢰야는 범어 ‘알라야(alaya)’의 음역으로 저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중생들이 조성한 업들을 빠짐없이 저장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유식학은 이를 근거로 모든 교리가 펼쳐진다. 아뢰야식은 그 중요성만큼 별칭도 많다. 모든 마음의 근본이 된다고 하여 근본식(根本識), 업종자를 보관한다고 하여 종자식(種子識), 여덟 번째 마음이라 하여 제팔식(第八識), 집착하는 성질을 지녔다고 하여 집지식(執持識), 번뇌와 부처의 속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하여 염정식(染淨識) 등으로 불린다. ‘심의식상품’에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명칭들과 그것이 성립하는 과정들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신다.

“광혜여! 이 아타나식에 의지하고 건립하기 때문에 육식신(六識身)이 전변하는 것이니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그것이니라.”

이는 중생의 마음인 육식들이 아뢰야식에 의해 발생·전변한다는 말씀이다. 아타나식(阿陀那識)은 아뢰야식의 또 다른 이름으로 범어 아다나비나(adana-vina)의 음역으로 ‘유지’ ‘보존’의 의미다. 중생들 업종자를 보존하고 생명력을 유지하기에 이렇게 부른다. 육식은 전 오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제육식인 의식이다. 부처님은 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육체는 물론 마음에도 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이에 육식에 몸을 의미하는 신(身)자를 붙여 육식신이라 한 것이다.

이어서 전변이라는 말은 굴러서 변화하였다는 의미로 육식들이 단순히 독자적으로 일어나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이 발동해 육식들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꽃을 눈으로 보고 ‘저 꽃은 연꽃이다’라고 분별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에 일으킨 분별이 아니라 과거에 지은 아뢰야식 안의 연꽃의 업 종자가 발현해 나타난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광혜여! 이 가운데에 식이 있어 눈이 물질에 닿으면 눈을 통한 마음이 생기고, 귀가 소리에 닿으면 귀를 통한 마음이 생기며, 코가 소리에 닿으면 코를 통한 마음이 생기고, 혀가 맛에 닿으면 혀를 통한 마음이 생기며, 몸이 감촉과 닿으며 몸의 마음이 생기고….”

이 말씀은 중생들의 전오식(前五識)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전오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다. 중생들의 맨 앞에서 발생하고 활동하는 마음이기에 앞의 의미를 지닌 전(前)자를 붙여 전오식이라 하였다. 전오식의 특징은 매우 단순하다. 이들은 중생의 인식 기관인 오근(五根) 즉, 안, 이, 비, 설, 신, 의가 이에 마주하는 오경(五境) 즉, 색, 성, 향, 미, 촉, 법들을 만나 생긴다. 

하지만 이 전오식들은 단순히 생기기만 할 뿐 아직 대상에 대한 분별과 판단은 내리지 못한다. 눈으로 빨간 사과를 본다고 했을 때 눈을 통해 생긴 안식은 그냥 생겨나기만 했지 저 앞에 놓인 물건이 빨갛다느니 사과라느니 먹고 싶다느니 하는 분별이나 판단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타나식은 이들 전오식과 함께 늘 따라가니 같은 때 같은 경계를 분별하는 의식이 전변하게 되는 것이니라.”

이어 부처님은 제육식인 의식이 아뢰야식이 변화한 모습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육식은 의식으로 오근과는 달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의근에서 발생하는 마음이다. 제육식은 현재 중생들의 마음에서 일으키고 있는 모든 분별과 판단들이다. 보통 육식이라고 할 때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총칭하지만 제육식이라고 할 때는 의식만을 가리킨다. 제육식은 중생들의 모든 정신 활동을 주관하는 마음으로 그 범위가 매우 넓어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 하고, 모든 대상을 분별한다고 하여 분별의식(分別意識) 또는 요별경계식(了別境界識)이라 부른다. 위 전오식 사과의 비유에서 사과를 판단하는 능력은 제육식에 일으킨다. 그런데 이 같은 제육식 역시 독자적 발생과 활동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또한 아뢰야식 업종자들이 변화해 나타나는 것으로 독립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739호 / 2024년 7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