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경제의 위기

정당정치 복원과 진보개혁진영의 '변화하기'

장백산-1 2008. 3. 15. 16:58


정당정치 복원과 진보개혁진영의 '변화하기'
 [김종욱 칼럼] 해체와 재구성 통한 새로운 모색 제언


김종욱, 동국대 북한일상생활연구센터 연구교수


음습한 기운이 2008년을 감싸고 있다. 희망 없는 미래라고 탄식하고 5년을 어떻게 버틸지 막막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보개혁진영에 희망이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곤 한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미리 공포에 질리는 삶은 희망 없는 삶이다. 오히려 과거를 되짚어 보고 거슬러 올라가며 아파하는 것이 진보개혁진영이 취해야 할 자세이고 가야 할 길이다. 길은 불도저로 뚫어내는 '막개발 식, 난개발 식'의 도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나간 자취이고 흔적이다. 이제 진보개혁진영도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 미리 설계하고 규정된 길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길을 말이다.

'87년 체제' 20년, '97년 체제' <'97년 체제'라고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명명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헌정질서가 세워진 이후(미완의 4.19를 제외하고), 최초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집권한 10년 역사는 짧지만 한국정치사에서 획기적인 시기임이 틀림없다.> 10년, 이제 진보개혁진영은 새로운 정치적 구성 속으로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봉착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역사는 실패로 낙인찍혔다. <'총체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로부터 '인정받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로서의 실패다. 단,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먼 훗날 역사적 재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자기만족적 평가도 배제한다. >

실패의 원인을 찾는 그 출발점이 해결의 출구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진리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닥쳐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닥친 후에 아는 것도 중요하다. 안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진보개혁진영은 자신들의 원칙과 대의가 옳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87년 체제의 시작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광주민중항쟁과 함께 획기적 계기였으나,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는 체제였다. 87년 민주화운동은 '직접 행동'을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를 쟁취한 시민의 승리였으나, 그 이후 대중의 일상에 천착한 제대로 된 정치운동이 전개되지 못했다. '너무나 정치화되고 이념화' 정치활동이 넘쳐흘렀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쟁취물은 대선 이후 급격히 제도정치 영역으로 협소해졌다, 또한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 대중운동은 민주주의를 풍부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전했으나, 새로운 활로를 창출하지 못했다. 1997년 대선 승리를 좀 더 야박하게 평가하면 유권자들에게 '강제된 선택'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2002년 대선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였으나 이 또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버렸다.>

그 역사 속에 대중은, 시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20년은 '민주주의 만들기'의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일상이 역사를 만들고, 그들의 일상이 정치의 가장 밑동이라는 사실에 대한 '잊어버리기'의 역사였다.

이 글은 '실용'으로 치장한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개혁진영 내부로부터 대안과 극복의 동력을 만드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새로운 진보의 길은 대립물처럼 표상되어 있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보개혁진영의 우울한 일상의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 그것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진보개혁진영은 다시 '정치화'라는 도그마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 고독한 진보개혁진영의 자화상

진보개혁진영이 만든 10년 정당정치를 '앙시앵 레짐'이라고 규정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어쩌면 2008년 정치지형을 '앙시앵 레짐'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지는 않을까? 진보개혁진영 10년의 '앙시앵 레짐'과 새롭게 등장한 구보수체제의 상속자 '이명박 정부'가 혼숙하는 시대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유권자의 63%만이 참여한 대선 투표율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역대 최대 격차인 500만 표(22.5%) 차이의 패배는 진보개혁진영에 대한 국민적 불신의 수준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유권자들의 투표불참은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권에 대한 의사표시다. 대중의 '생생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 긴 간극을 '더 많은 민주주의'로 메워야 한다. 우리에게 파시즘과 독재의 시대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구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파국적' 상황 <근 2년 동안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의 지지율이 10~15% 수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10% 미만에 머물고 있는 상황은 '파국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에 봉착한 근본적 이유에 대한 규명을 통해 새롭게 무엇을 구성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개혁진영의 회피할 수 없는 업보다.

외부적 요인, 객관적 조건 등으로 장막을 치고 내부의 문제를 눈감아 버리는 것은 아주 쉬운 길이지만 가장 잘못된 길이다. 아프지만 폐부를 도려내고 근본적 처방에 착수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길이지만 가장 옳은 길이다. 진보개혁진영을 자부한 많은 사람의 내부적 문제,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봄으로써 문제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진보개혁진영 내부에 깊숙이 뿌리박힌 구조와 습성에 대한 '해체하기'이며, 둘째, 조각처럼 부서져 형해화된 정당정치의 복원을 통한 새로운 정치의 구성이다.


진보개혁진영 '해체하기'

지난 20년 동안 너무나 권위주의화 된 진보개혁진영 상층부의 모습을 도처에서 목도한다. 두 번의 대선드라마에서 보여준 모습은 감동과 논쟁, 희망과 미래, 설렘과 각오의 교차였다. 무엇인가 해냈다는 그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정치행위의 장면이 아니라 그 정치행위를 만들어가는 일상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상층부는 스스로의 권위주의를 통해 무기력을 잉태했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관행으로 포장된 권위주의에 의해 질식되었다. 정치권, 학계, 시민단체, 노동단체의 상층부에 군림하고 있는 많은 명망가와 활동가들의 권위주의는 질식할 정도다.

1980년대 초·중반 운동의 역사로 포장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상황을 애써 무시하며, 그들만의 세계와 조직을 만들어 왔던 역사가 2007년 실패의 원인이었다.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대중의 일상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이들의 일상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나 진보개혁의 가치를 선점하고, 그들만의 그룹을 만들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그들만의 일상에 대중의 삶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들만의 가치로 재단하고, 그들과의 관계망 밖의 무엇에 대해서는 철저히 봉쇄하는 조직으로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들만의 권력을 향유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구상은 내디딜 땅이 없다. '클린턴 시대'를 만들었던 미국 민주당의 DLC (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민주지도자회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준비했다.

DLC의 정치실험의 핵심인 통치철학의 변화는 14년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성공했고, 미국 민주당의 '새로운 황금기'를 만들어냈다. '제3의 길' (The Third Way)로 명명되는 새로운 정치철학의 수립과 실천의 결과였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경제적 성장, 동등하고 확장되는 기회, 민주적 가치의 증진과 함께 자유에 대한 강력한 방어"를 지지했으며, 다음 세기를 준비하기 위해 "모든 개인이 기회의 사다리로 오를 수 있고, 모든 가정이 강력한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변화하는 미국의 상황 (새로운 계층의 확대, 새로운 요구의 분출 등)에 맞게 새로운 정책과 정치를 통해 기존 지지층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지층을 만들어 냈다. Kenneth S. Baer, Reinventing Democrats : The Politics of Liberalism from Reagan to Clinton(Kansas University Press, 2000). '신민주당'의 방향이 중도적 이동이었다는 것은 중요치 않다. 사회와 개인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현실화했던 과정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실천이 본질적인 것이다.

변화는 준비된 사람과 조직으로부터 시작되며, 기득권 세력의 온갖 공격을 뚫고 구체적인 모습을 만들어 낸다. 준비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4월 총선의 개혁공천(?)으로, 실체와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새로운 진보'(?)로 변화를 만들 수 없다. 장기적 안목과 구체적 실천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에 의한 반사이익으로 만들어지는 국회권력은 '어부지리' 권력이다. 탄핵의 광풍 속에서 배출된 그 많은 국회의원이 만들어낸 2007년 드라마는 흥행에 실패했다.

진보개혁진영의 일상 변화로부터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기존 상층집단은 '협력적 후퇴'의 용단을 내려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움직이는 살아있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를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도전해야 한다. 협력적 후퇴와 도전으로 구성되는 진보개혁진영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유권자와의 상호소통과 유권자의 사고에 맞는 메시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4월 총선을 겨냥한 것도, 2012년 대선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진보개혁진영의 일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진보개혁진영임을 표방하는 각기 다양한 사람과 조직은 이제 기존 생활방식·조직방식의 '해체하기'에 착수해야 한다. 일상으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정치화된 레토릭은 이미 유권자들의 귀에는 소음에 불과하다. 대중의 사고와 대중의 언어로 상호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보개혁진영의 행위와 메시지가 대중의 눈과 귀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습관을 버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제대로 된' 정당정치의 복원

진보개혁진영은 2004년부터 시작된 대중의 외침, 때로는 '협박'을 읽지 못했다. "변화하라,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라는 지속적인 메시지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중과의 연계 촉수가 무뎌졌기 때문이다.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고 그것을 정치의 영역에서 구현하는 선순환구조가 파괴되었다.

여의도 안의 정치는 그들만의 잔치였다.

대중은 '목로주점'에서 전혀 다른 얘기로 여의도 정치를 비판했다. 그 시간, 여의도 안에서는 '목숨같이 귀중하게 여기는 자신들만의 원칙'을 강변하는 강단정치인들, 원칙과 방향도 없이 실용으로 포장되어 권력의 연장만을 위한 책략 구상에만 골몰했던 모사꾼 정치인들이 도처에서 마이크를 장악했다. 2002년 경선의 감동이, 2007년 경선의 악몽으로 180도 전도된 사실에서 그 결과를 명증하게 보았다.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정당체제 위기를 묘사하는 아렌트의 비판(『전체주의의 기원』)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목도되고 있다. "정당체제의 붕괴는 당원들의 탈당이 아니라 젊은 세대로부터 당원을 모집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었으며,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무언의 동의와 지지를 상실한 것이었다. 또한, 이 대중들은 냉담해졌고,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진보개혁진영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관행과 '인습'을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이제 진보개혁진영은 일상의 변화로부터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치와 정책을 만들어나가야 할 때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수 대중을 대변할 수 있는 '뉴레프트(New Left)' 노선을 구성해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방법은 없다.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진보개혁진영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민주주의의 심화·확대라는 원칙이라면, 구조적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추구하는 원칙이라면, 다수로부터 배제된 소수자들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원칙이라면, 뉴레프트의 길을 가야 한다. 더더욱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시대의 중심에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천착한다면, 진보개혁진영이 세워야 할 방향은 '뉴레프트'의 길이다.

<'뉴레프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진보개혁진영의 노선과 정책의 전면적인 혁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실제 진보개혁을 주장하는 정당이 제대로 된 좌파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언제 중도 좌파적 정치구상이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구현되었는가.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계층적 분화, 사회적 변화, 심성적 변화 등을 면밀히 추적하고,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뉴레프트'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제3의 길'로 표방되어도 무방하다. 문제는 용어가 아니라 그 내용이다.>

그것이 '올드레프트'가 아니라 새롭게 구성되는 '뉴레프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복잡다단하게 변동하는 세상과 진보개혁진영 내부의 몰골화 된 자화상 때문이다. 삶의 실천으로 외화 하지 못하는 이념은 죽은 것이며, 일종의 '고급 유희'일 뿐이다.

진보개혁진영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관행과 '인습'을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그 방향을 새롭게 구성해가는 '뉴레프트' 노선으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장기적 관점과 실사구시적 자세에서 정당정치의 복원과 제대로 된 정당민주주의의 구현을 통해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다가올 2010년 지방자치선거를 '역사적 선회'의 계기로 포착할 필요가 있다.

진보개혁진영은 정치화된 지방선거가 아니라 생활정치장으로서 준비해 들어가야 한다. 앞으로 3년의 시간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이 시간이 '전면적 변화와 획기적 선회'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의견그룹의 활성화', '개별 사안 인준투표방식', '새로운 사회적 의제 선정과 정책 구성'이라는 실험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논란보다는 안정을, 분열보다는 통합과 단결을 주장하는 논리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낡은 수법'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봉합과 담합의 방식으로 대중의 다양한 요구를 담아낼 수 없다. 이제 다양한 토론과 쟁론의 공간으로서 정당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그룹이 만들어지고 가치와 실천을 둘러싼 치열한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그 치열한 토론의 결과들을 당이라는 공간을 통해 실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공리공담이 아닌 실천적 논쟁을 통해 현실에 발 딛고 있는 '공론의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공화제의 원리이며 구현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당원들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제도를 도입할 필요

그리고 정당을 구성하는 당원들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핵심이슈에 대해 국회의원들만의 의총을 통한 정책결정 방식에서 탈피하여 당원들의 직접 참여를 보장하는 '개별 사안 인준투표' 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대의제 공간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삼투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주고 있다. 정당정치를 새롭게 복원하는 과정에서 분야별 핵심 아젠다를 중심으로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고, 그 논쟁을 통해 넓어진 공간 속에서 당원이 스스로 자기 정당의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정당의 연구소 기능의 전폭적인 확대가 필요하다.

새로운 사회적 의제를 선정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정책 구성이 치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당료들이 장악한 당 구조 속에서 새로운 전환은 요원하다. 그것이 우리 정당사의 폐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정당 연구소의 확대를 통해 새로운 정책과 함께 진보개혁진영의 네트워크 허브로서의 기능을 만들어가야 한다.

미국 공화당이 1960년대부터 대학과 연구소, 언론에 공을 들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 사회도 대학과 연구소, 언론은 보수 담론의 근거지가 되고 있으며, 보수 정치인의 양성소가 되고 있다. 지식권력의 보수화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당 연구소의 기능은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정당문화의 변화와 당원의 새로운 위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결정 사안에 대한 자기 책임성의 확대는 정당의 외연을 넓히고 대중과의 접촉 면을 넓히는 유력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의 축적 속에서 새로운 정당정치의 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럴 때 감동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숱하게 내뱉었던 진정성도 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대중의 일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권력을 '가로지르고, 단절시키고, 뒤틀고, 꼬이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역사적인 탄핵 저지과정의 대중적 '출렁임'이 진보개혁진영에는 장강과 같이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그것은 '물보라'처럼 사라져 버렸다. 진보개혁의 가치를 아무리 항변해도 그것이 대중의 일상을 반영하지 못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불과하다. 대중은 일상 속에서 그렇게 권력과 지배를 '전유'(appropriation)하며 새롭게 구성하는 존재다. 그래서 '대중의 일상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권력을 '가로지르기' 하는 대중을 정치로 반영하기 위한 첫 시작은 '해체하기'다.

진보개혁진영 안에 만연한 폭력과 억압을 해체하지 않고서 '새로운 상상력'은 요원하다. 해체하기와 함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정당정치의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그 길은 설정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려고 하는 과정의 정치에서 발견될 것이다.


원문 - http://www.humanpos.kr/news/article.html?no=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