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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노조 위원장 투표 개표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
ⓒ 전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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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4번 김영한-김병국 후보의 운동원들은 지난 8월, 본관 민주광장에 땀과 눈물깨나 쏟은 사람들이었다. KBS에 경찰이 난입했을 때 몸을 던졌고 이사회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의사봉을 두드릴 때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12월 3일 또 한번 같은 장소에서 눈물을 떨궜다. 66표 차의 석패. "기필코 되찾아오겠다"던 다짐을 지키지 못한 '패자'들이 하나둘 뒤풀이 장소인 신관 앞 지하 호프집으로 모였다. 일부는 선거운동본부가 있는 연구동에서, 또 일부는 개표 장소인 민주광장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충격이 커서일까. 핵심 운동원들 중 뒤풀이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분위기는 업과 다운, 조울을 반복했다. 서로 다독이면서 웃다가 금세 시무룩해지곤 했다. 순식간에 모든 테이블의 사람들이 말을 멈춘 채 천장을 쳐다보거나 맥주잔을 들이키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부 운동원들은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김영한 후보와 김병국 후보가 이 자리 저 자리 옮겨다니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후보들의 입에서는 "미안하다" "열심히 살겠다"는 말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뒤풀이 초기 박승규 현 노조위원장이 인사차 들러 김영한-김병국 후보와 악수하려다, 박 위원장을 비판하는 한 조합원과 가벼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체념한 조합원 "싸우지 않겠다, 싸울 이유를 잃었다"
한 조합원은 호프집에 흐르는 음악을 듣더니 "사장이 우리 마음을 아는지 참 기가 막힌 선곡을 했다"고 했다. 백지영의 '총알 맞은 것처럼'이란 노래였다. 이 조합원은 "마음이 정말 총알 맞은 것처럼 허하다"고 했다.
개표 직후라 아무래도 격앙된 조합원들이 많았다. 격정 토로가 이어졌다.
"지난 8월부터 그렇게 깨지고 다친 것 뻔히 보고도 어떻게 기호 1번에게 표를 던질 수 있나. KBS 다니면서 이렇게 배신감 느낀 적이 없다. 우리가 지난 8월부터 직종 지키자고 몸 던졌나. KBS 지키자는 것 아니었나. 근데 오늘 결과는 공영방송이고 뭐고 직종만 지키면 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앞으로 그들이 깨질 상황이 온다. 거의 목전에까지 와있다. 왜 이걸 모르냔 말이다."
기호 1번 강동구-최재훈 후보에게 몰린 기술직 표를 겨냥한 말이었다. 기술직 조합원은 모두 1300여 명. 이 중 대부분의 표가 1번에게 갔다는 것이 4번 후보 측의 분석이었다. 사원행동 후보였던 1차 선거 기호 2번 박종원-박정호 후보에게 갔던 기술표도 대부분 1번 쪽으로 움직였다는 분석이다.
"구조조정 드라이브가 걸리면 기술직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지난 노조를 보면 알겠지만 그 내성으로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겠나? 내부에서 누가 함께 싸워주겠나. 결국 발등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 구조조정만 막는 전문 노조가 있나? 큰 판 보면서 원칙 지켜 싸우는 노조가 구조조정도 잘 막는 거다. 구조조정을 노조위원장 혼자 막나? 조합원이 막아주는 것이다. 지난 8월부터 다친 건 다 우리들인데 이제 와선 본인들 안 다치겠다고… 정말 배신감 느낀다. KBS가 이런 회사였나?"
한 조합원은 "이번 선거로 KBS에 드리워있던 모든 끈이 다 떨어져 나갔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든다"고 말했다. 한 조합원은 취재기자들에게 "미안하다. KBS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안 미안한데 외부에서 지켜봐온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조합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사원행동에서 적극 활동했다는 이유로 보복인사를 당하고 징계 대기 중인 조합원이다.
"난 싸우지 않을 것이다. 싸울 이유를 잃었다. 그리고 지켜볼 것이다. 구속을 각오하고 KBS를 살리고 깨지려 한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난 2년 동안 절대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우선 사원행동 소속 조합원들의 징계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부터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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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순 KBS 사장 취임식이 열린 지난 8월 27일 사복을 입은 청원경찰들이 공영방송사수KBS사원행동 직원들이 취임식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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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창피해서 취재를 어떻게 나가냐... 죄인된 심정"
KBS의 대오각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12년차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부끄럽지만 이게 KBS의 현주소다. 딱 이 정도다. 밖에서는 당연히 사원행동 후보가 당선될 것 아닌가 이런 얘기가 있는데, 내부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KBS 사람들… 부족한 거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 업무 환경 나쁘지 않다. 연봉도 낮지 않다. 꽤 받는다. 그런데도 당장 내 일이 없어지거나 당장 연봉이 깎이거나 이런 것만 걱정한다. 촛불? 외부의 시선? 중요치 않다. 큰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니 이런 결과가 또 빚어졌다. KBS 내부에서 각성하지 않으면 정말 국민들 등 돌리는 거 시간 문제다. 그런데 이런 것조차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권이 우습고 국민이 무서운 걸 아직도 모르는 거다.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부터 반성해야 한다."
다른 운동원이 거들었다.
"KBS 조합원들 중에는 언론운동과 노동운동 사이에 선이 딱 그어져 있다. 우리를 배척한 조합원들은 언론운동하지 말고 노동운동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복지 따내고 구조조정만 막으면 된다, 그 이상은 우리 모른다, 우리 하지 말자 이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언론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지금도 내 입장엔 변함이 없다. 우리 KBS 투쟁의 역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KBS가 괜히 국민의 방송인가? 국민 수신료로 운영된다고 만날 강조하면서 노조 위원장에게는 노동운동만 하라고 한다. 밥그릇만 지켜달라고 한다. 돈만 많이 주면 된다고 한다. 선거 때마다 계속 이런 국면이 반복되고 있다."
2시간쯤 흐르자 후배 조합원들부터 서서히 취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책상을 치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억울함이 표출됐다.
"앞으로 창피해서 어떻게 취재를 나가냐" "YTN·MBC에 뭐라고 얘기하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뒤섞여 튀어나왔다.
한 조합원이 맥주를 따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
"지금 개표가 끝난 직후라서 우리 내부만의 일인양 이렇게 억울해 하고, 열받아 하지만 국민들에게 또 죄를 진 것이다. 역사에 죄를 진 것이다. 난 지금도 두렵지만 앞으로 KBS를 둘러싼 이러저러한 이슈, 상황과 국면에서 번번이 이런 생각 들까봐 그게 참 걱정이다. 나서지 않으면서 조용히 KBS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 사람들에게 정말 한마디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그리고 후배들, KBS만 콕 집어서 시험봐 들어온 후배들을 다독거릴 말이 없다. 이래저래 죄인이 된 심정이다."
선거 운동 기간 못다했던 말들을 쏟아내고, 울고 달래는 사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새벽 3시가 됐다. 선배들이 차례로 일어나고 곧 후배들도 뒤따랐다.
그들과 함께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휴대폰을 보니 한 KBS 조합원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죽어야 산다더니… 숨통을 원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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