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대한민국의 부자들도 불쌍하다
(서프라이즈 / 강목어 / 2008-12-18)
사람들이 왜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잘 먹고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럼 왜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하는가? 당연한 본능이라고? 그 뿐만은 아니다. 본능을 넘어선 그 무엇. 그건 바로 죽음의 공포 때문일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없어지기에 죽기 전에 원 없이 욕망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종말의 순간이 되면 돈도 필요 없다며 돈을 길거리에 뿌리고, 시한부 생을 사는 사람들은 돈을 포기하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매달리려 한다. 인간에게 종교나 사후 세계가 필요해진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그렇게 인류의 역사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노환과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에 매달렸다. 가장 쉽게는 돈에 매달려 안전한 노후를 준비하기도 하고 권력에 집착하거나 종교에 몰입해 천국과 극락에 매달린다. 예수 믿고, 부처 믿어 천국 가고 극락 간다면 죽음의 공포가 그나마 줄어들기에 그렇게 거기에 매달렸다. 물론 모태 신앙이나 그 외의 이유와 목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많은 분들이 사실은 돈과 권력만으로는 안 되는 그 무언가의 대안으로 찾은 것이 종교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공포심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돈과 권력에 초연했던 사람도 그에 매달리게 되며, 그런 변화에 대해 겉으로는 처자식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노후와 삶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에 따른 공포심이 있다. 그런 공포에 대안으로 돈과 권력을 따라다니다가 도저히 안될 때 매달리는 것이 종교, 조상, 자식이다. 혹시 조상이 돌봐줄까, 자식이 돌봐주거나 기억해줄까, 자꾸만 미련을 갖고 집착하게 된다.
실제로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도 노후에 아주 극도로 종교에 빠져들었고 성경 그대로를 따르는 원리주의자가 되었다. 그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톨스토이 자신만이 알겠지만 나는 그것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랬을 거로 생각한다. 비슷한 사례가 될지 모르지만 왜 일평생 제사를 무시하고 밖으로만 돌던 사람이 환갑이 넘어서야 제사 지내기에 몰두하고 자식들이 제사를 소홀히 하면 화를 낼까? 그것 역시 그대로 세상에 잊힌다는 공포감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의 수많은 욕심의 가장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신문 기사를 본 적 있다. 천재 소리를 듣던 어느 예술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드라큘라'란 영화를 보고 한 달 동안 잠을 못 자고 '죽기 전에 어떻게 살까'를 깨우쳤다고 한다. "드라큘라에 물려 죽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 나도 죽겠지, 그럼 일 회뿐인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래, 나는 나 살고 싶은 데로 살자.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 자유의지대로 살자…."
이렇게 그 누구에게나 죽음은 심오한 인생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고 거기에 따라 각자 자신의 삶의 해답을 내고 방향을 잡게 된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답으로 아주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돈과 종교를 선택했다. '살아생전 마음껏 즐기고, 하고 싶은 거 다하자'와 그래도 '천국 가서 구원받자'로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만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매달려서 그분들은 부와 권력을 움켜쥐었다. 일단 축하한다. 상위 5%에 든 분도 축하하고 상위 1%에 드는 분은 더 축하한다. 그런데 말이다. 상위 1%든, 5%든 상관없이 그런 부자와 전혀 상관없는 나는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의 부자들이 불쌍하게 생각된다.
이 무슨 생뚱 맞고 억지스런 말이냐고? 아니, 그렇게 잘 먹고 잘 살고 떵떵거리며 목에 힘주고 권세 누리며 사는데 무엇이 불쌍하냐고? 당신 미쳤느냐고?
맞다. 내 생각은 당신들의 기준으로는 많이 이상하다. 그래도 괜찮다. 이런 내가 미련해 보일지라도 내가 당신을 이해 못 하듯 당신도 내 생각을 이해 못 한다. 하지만 분명 세상의 여러 부자들 중에서 최소한 대한민국의 부자들만큼은 분명히 불쌍하다.
아무리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학벌로 지식인이고 엘리트고 지배계층이라고 떵떵거려도 난 당신이 불쌍하다. 그렇게 많이 배우고 잘 알고 똑똑하고 잔뜩 가진 당신이 더 가지려 그렇게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까지 아등바등하며 사는 모습이 애처롭다. 혹시라도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봐 잔뜩 웅크리고 세상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인생밖에 살지 못하는 당신들의 삶의 질이 정말 측은하다.
그 대단한 한자리를 하시는 의원님들과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회장, 사장, 이사, 부자님들께서 그렇게 폼 잡고 근엄한척하며 회사에서 사회에서 정의를 외치고 진리를 가르치시려는 분들이 어찌 돈과 권력에는 그토록 애절하도록 비굴하게 굽실거리나. 국민 대부분이 아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뻔한 논리로 종부세 폐지를 서슴없이 결정한 대한민국의 부자들과 그들을 수호하는 정치인과 법조인들.
그렇게 부자들에게 감세 선물을 주면서 슬쩍 그 부담을 서민들에게 떠넘기는 작태를 보이면서도 법복의 권위 뒤에 숨어 근엄한 표정으로 정의로운 판결을 한다는 그들의 모습이 왜 정의롭기보다는 애처롭고 엄숙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 매일 쏟아지는 신문을 보면 수많은 박사, 교수, 학자 칼럼니스트들이 세상을 똑바로 살라는 훈시를 하며 사실 자신들은 전혀 똑바로 살지 않는 그들의 이중성은 위선적이다 못해 과연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슬픔으로까지 보인다. 이런 경제 한파를 맞아 여러 선진국들이 부자들의 증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위기를 헤쳐가려는 대한민국 부자들과 지배층의 무리한 도전이 안타까울 뿐이다.
원래 가난하고 못 배워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왜 더 많이 가진 당신들이 가난에 찌든 사람들보다 더 가지려고 악다구니 같은 모습으로 발버둥치나. 원래 인간의 생이 다 그렇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들이거늘 왜 그렇게까지 뻔뻔하고 비굴하게 더 벌려 하나.
굳이 최고급 외제차 안 타고 그냥 좋은 차만 타도 행복하고 굳이 초대형 평수 안 살고 그냥 대형 평수만 살아도 충분히 잘 살아갈 분들이 왜 그리도 나머지 10%에 집착하나. 10억 버나 9억 버나 많이 버는 거는 똑같거늘 왜 그리 나머지 1억에 안달해 스스로의 삶들을 추하게 만드는가.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덜 벌면 삶이 보람되고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왜 그렇게 악의 편에서 양심을 팔고 자신의 본 모습조차 잃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나.
내가 알던 어느 부자 사장님은 틈만 나면 양심과 도덕을 말씀하셨다. '성경을 읽으려 할지라도 촛불을 훔치지 마라.' 깨끗하고 투명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사실 본인은 회사의 주요 계약은 자신들의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 돌려 실익을 챙기시고 직원들에게 0.1원을 아끼라고 호통치면서도 본인은 비즈니스를 핑계로 틈만 나면 장기간의 해외 체류로 사적 일정을 보내셨다. 그리고 늘 당당하고 깨끗하게 살라던 그분은 결국 임기가 만료되자 임기 연장을 위해 별별 로비를 다했다. 끝내 그만두는 날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직원들을 사주해 구명운동까지 펼치며 전전긍긍하다가 쓸쓸히 떠났다.
이건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이나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애처롭고 불쌍하게 구걸하는 삶을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는 오히려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지만 너무 많이 가졌기에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징징거리듯 매달린다. 이래서 너무 없어도 불쌍하고 너무 많아도 불쌍하다.
물론 부자인 당신들은 비록 그렇게 해서라도 한 몫 잡고 한 자리 차지하면 사람들이 당신들께 고개를 숙인다고 자부하고 뿌듯해하며 그런 삶을 즐긴다. 그런데 당신이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빌려 입고 있는 법복이나 군복, 제복과 계급장에 고개를 숙이고 당신이 잠시 갖고 있는 돈에 고개를 숙이고 당신이 잠시 머물러 있는 그 자리에 고개를 숙일 뿐 당신이란 사람 자체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고 그 옷을 벗으면 당신은 과거를 회상할 뿐 아무도 당신을 찾지 않기에 쓸쓸함으로 살아간다.
그런 허상을 붙들고 살고 있기에 당신들이 불쌍한 거다. 하긴 그 쓸쓸함을 견디지 못한 열혈 수구 노인 분들은 세상을 향해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그렇게라도 주목을 받으려 하는 그분들도 그 연세가 되어서까지 그렇게 사니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 그렇게 허상에 매달려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갈 건가. 왜 그리 많이 배우고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 허상으로 살아가나.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의 손녀도 남몰래 8억5천이나 기부하는데 왜 위대하신 영도자라던 전 장군의 손녀는 8백만 원의 기부도 했다는 소식이 없을까. 아니 그 잘난 지식인들과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의원님들의 자식들을 통틀어도 그런 소식이 없을까. 빨갱이에 대한 분노로 지금도 고이 늙지 못하시는 조씨 성을 가진 전사장님의 손녀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반드시 많이 가졌다고 더 행복하고 덜 가졌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논바닥의 물도 과하면 넘치고 부족하면 마른다. 그래서 적당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쪽 논은 물이 넘치고 한쪽 논은 물이 없어 마르면 결국 그 동네에 싸움이 생긴다. 조금만 덜어주면 자신은 넘침을 막고 옆의 논은 갈증을 풀 수 있지만 넘쳐 버릴지언정 남 주기는 싫다.
남들보다 밥도 적당히 많이 먹어야 배부르고 기쁘지 너무 많이 무식하게 먹으면 배탈이 난다. 그동안 꾸역꾸역 먹은 것 다 토해내게 된다. 차라리 안 먹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자기들끼리만 더 먹으려 한다. 그러다 결국 꼭 일을 치르게 되는 것이 세상의 순리다. 역사의 수많은 혁명과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네티즌의 지적처럼 그 욕심 많았던 유럽의 지배층도 몇 번의 혁명과 전쟁을 통해 적당히 나눠 먹는 것이 오히려 기득권 유지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대중을 통제하는 법은 대중들과 나누는 몫을 늘려 자신들이 조금 덜먹는 대신 안전하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지금 이 나라처럼 소수 상류층이 혼자 독식하고 철저히 통제하는 방법은 당장은 먹을 수 있는 양이 많지만 불만이 폭발하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적당히 나눠 먹는 선택을 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그런 불행의 서곡이 될 수 있다. 자진해서 내놓기 힘들면 못 이기는 척 여론에라도 따라야 하는데 세상의 순리도 거부하며 자신들의 몫만 챙기려 한다. 그래서 배 고파 죽겠나 배불러 배 터져 죽겠나 불행한 건 마찬가지다. 이런 초등학생보다 못한 수준의 인성을 가진 삶들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이런 단순한 원리를 덜 배우고 못 배운 나도 아는데 항상 남에게 가르치려 들고 정의의 사도인양 준엄하게 꾸짖는 수많은 신문들의 의원, 박사, 교수, 학자, 전문가인 당신들은 왜 모른단 말인가. 이래서 한국의 지식인, 엘리트, 부자들은 무식하거나 허위에 가득 찼거나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과 영혼이 있다면 자성의 목소리가 지금은 들려야 할 때이지만 모두가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오히려 더 챙길 기회라 생각하며 한 몫 잡을 눈치만 보고 있을 뿐 아무도 자신들의 한심함을 반성하지 않는 한심함을 보인다.
민초들이야 못 배워서 그렇고 천민이라 돈밖에 몰라 전과 14범이라도 믿고 따르지만 많이 배우고 그 잘난 당신들은 어찌 그를 따르나. 그 정도 지적 양심도 없고 그 정도 삶의 자부심도 없나. 몰라서 그럴 수 있어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는 당신들의 영혼은 얼마나 불쌍한 것인가.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서 지식인이 아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만큼 진짜 지식인이다. 그래서 실천의 양만큼 당신들을 평가하면 천박하고 무식하다는 사람보다 더 실제로 무식하다. 실제 주위에서 그런 것을 본다. 늘 대학원을 나왔다고 자부하며 초등학교 나온 형을 무시하지만 실제 마음 씀씀이나 인간적인 배려는 초등졸업 출신 형의 반의반도 못 되는 그런 인격의 동생을 보며 나는 교육의 양과 실제 지적 수준이나 삶의 인간 됨됨이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안다. 지금 한국의 부자와 지식인과 엘리트들이란 사람들이 바로 그 꼴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 속에서 존재 가치를 확인하거나 보람을 느낀다. 가장 쉽게 인정받거나 보람을 느끼는 방법은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 더 가진 자리를 유지하려고 발버둥치지만 지나고 나면 그 더 가진 자리란 것도 별것 아니다. 천년만년 가는 자리는 없고, 천년만년 이어지는 부도 없다. 당신들이나 나나 2000년 전후의 한순간의 찰나를 살다간 우주의 한 티끌 같은 인생에 불과한데 당신은 잔뜩 갖고 살고 우리네는 가난에 힘겨워 살다간 들 그 차이가 뭐가 그리 클 것인가. 그런데 그 조금 나누는 것이 무어 그리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가. 더더군다나 기부도 아니고 세금이다, 세금.
가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다. 누군가는 출세하고 돈 많으면 더 행복할 수 있지만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힘든 삶을 알기에 남을 이용하고 아프게 해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행복은 싫다. 설령 다소 어렵게 살고 남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난 덜 죄짓고 살고 싶다. 그래서 다른 이의 아픔을 이용해 성공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도 오히려 내가 덜 부끄럽고 덜 죄지었다 믿는다.
세상 모든 일이 음양이 있어 양면성이 있듯이 세상 모든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고 흑백이 있다. 내 스스로는 정당하게 떳떳하게 성공한 듯해도 의외로 나의 성공으로 인해 피눈물 흘리는 피해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세상이다.
사람들이 많이 선호하는 전문직인 의사, 판검사도 자신을 찾는 고객들의 병을 고치거나 어려움을 구해주는 보람도 있지만 반드시 누군가의 아픔이 뒤따른다. 환자의 아픔이 있기에 고치는 보람이 있고 피해자의 아픔이 있기에 법적 판결을 하는 그들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세상에 인정받는 이런 직업도 그럴 진데 남들을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죄는 얼마나 큰 것인가.
맞다. 가장 악하게 살아도 성공하고 가장 선하게 살아도 성공할 수는 있다. 성공의 기준만으로 보면 그 방법은 모두 옳을 수 있다. 지금의 세태가 무조건적 성공만을 원하고 워낙 결과에만 매달리는 상황이라 나 역시 함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남들에게 강요하기는 어렵다. 살면서 그냥 잘 살면 되지 더 죄짓고 덜 죄짓고 가 무슨 차이가 그리 크겠느냐마는 그래도 이것은 분명하다.
당신이 가난한 자들을 비웃고 무시해도 나는 돈에 미쳐 사는 당신네들이 더 불쌍하다. 그래도 더 많이 갖고 불쌍한 것이 좋다면 그럼 계속 그렇게 믿고 살면 된다. 부디 '종부세' 따위는 모두 폐지하고 '강부자'네, 뭐네 하며 당신들끼리만 계속 잘살아라. 가난한자들 가슴에 대못들을 박아가며 잘 살면 된다.
그런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행복한 건 행복한 거다. 세상의 부자들과 세상의 현자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하게 살아갈까. 혼자 다 가진 사람들과 함께 나눠 가진 사람들 중 누가 더 행복하게 살아갈까. 왜 저 히말라야의 가난한 나라 국민들이 부자 나라 국민들보다 더 큰 행복감을 갖고 살고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 공평하다. 부자도 죽고 빈자도 죽고 악한 자도 선한 자도 모두 죽는다. 돈과 권력과 천국이나 극락에 기댄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거나 죽음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사후의 영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세상을 지배한 역사의 수많은 영웅들도 결국 죽음 앞에 무력하게 몸부림치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불로초를 찾아 사방으로 신하들을 보낸 진시황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그 수많은 전장을 누빈 역전의 맹장답지 않게 말년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자식에 연연해 부하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추한 모습을 보이는 나약한 늙은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결국 돈과 권력이 인간을 지켜주거나 구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무엇이 그런 공포심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고 인생을 당당하고 후회 없이 살다 가게 할 수 있을까? 그 가치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자기 자신이 내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돈과 권력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는다고 주장해도 나는 괜찮다. 그렇게 믿으시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분들이 나는 측은하고 안타깝다.
내가 지난 일제시대 때의 독립군들이 거사 후 일본군에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오히려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끝까지 일제에 항쟁하라는 말을 남기는 그가 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니 나도 당신도 그런 삶을 살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돈과 권력을 따르는 당신이 그런 삶을 한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 그와 또 다른 더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거라 말하고 싶다. 설령 돈과 권력을 만들어가더라도 그것은 내 삶의 한 과정일 뿐 전부는 되지 않는 삶을 권하고 싶다.
남들이 부자에 만족하듯 나는 내 삶이 후회 없고 보람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건 오기도 고집도 자존심도 아닌 내가 수십 년을 살면서 깨닫고 받아들이고 살고 싶은 내 인생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건 큰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과 나 같은 처지의 사람, 내가 걸었던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게 이런 삶도 있구나, 이런 삶도 괜찮겠구나 하는 위로가 된다면 나름대로 만족한다.
정말 억울하고 불쌍한 건 가난한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 부자들이다.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그런 불쌍한 영혼들이기에 불쌍하다는 것이다. 그 아까운 돈들을 모두 짊어지고 떠나지 못함이 안타깝고 묘비명에 '부자'라고 새길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그렇게 당당하게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자랑이 아님이 안타깝다. 돈만 많기에, 출세만 했기에 당신의 그 허세와 어울리지 않는 뻔뻔함이 우습게 보인다.
지금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말 지식이 아닌 지혜와 지성과 인성을 가르쳐야 한다. 인생의 목표와 사회의 가치를 바로 잡고 국가의 이념과 정의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모두가 부자의 꿈을 꾸고 모두가 행복을 꾸어도 끝내 부자가 되지 못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하긴 이런 글도 가난한 자의 넋두리나 증오심 때문이라 무시하며 조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글은 당신에게 쓰는 글이 아니다. 당신들과 싸우자고 쓰는 글도 아니다. 단지, 아직 이쪽과 저쪽을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에게 이런 방향도 있음을 제시해 주고 또 이미 이 방향을 선택한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려고 썼다.
혹시, 삶을 살면서 과연 누군가에게 또 무언가가 된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그러나 만약 당신이 삶과 인생과 성공의 가치를 따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분명 '선'하게 성공한 것이 더 가치 있고 진정으로 성공한 것이다. '악'한 성공은 성공한 것이 아니라 남의 기회를 강탈하거나 빼앗은 것이다. 그런 성공조차도 무조건 성공이라고 따지거나 그렇게라도 성공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런 분은 그런 길을 가면 된다. 그러나 산이 강일수 없고 강이 산일 수 없듯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거고 가치 없는 것은 가치 없는 것, 가치 있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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