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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야당 지도자 였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서 민주화에 투신하였고, 온갖 고초를 넘기면서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룩하고, 노벨평화상을 받고, 6.15공동선언을 이끌어 내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뭐 이 정도가 대부분 알고 있는 전부 아닌가? 자, 그럼 1971년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렇다. 언론이건 뭐건 간에 1971년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언제 태어났는가 그 정도만 -그것도 고령의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도 한국 현대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에 아무런 배경없이 도깨비 방망이에서 뚝딱 튀어나오듯이 역사에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김대중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저 그렇게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비전과 철학, 가치가 그저 1971년 이후 수많은 탄압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온 결과물을 1971년부터 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필자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연설과 자료들을 보게 되었으며,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그 분의 면모를 계속 새로 발견하게 되고, 경의와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잘 모르던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보면서 그 분의 거대한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김대중은 처음부터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인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때야 동영상도 많이 남아 있고, 최근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자료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료들도 극히 일부분을 확대 과장하거나(좃선벼룩 류의 '김대중 분석'이 그러하다.) 어떤 이야기를 끌어 나가기 위해서 일부만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단 확인된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생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제대로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따라서 1923년~1925년까지 여러 설들이 있다. 웃기지 않는가? 무슨 고대사 인물 탐방도 아니고, 출생연대부터 분명하게 알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보다 오히려 더 자료가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우등생으로 자라났고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좌익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잠깐!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 씨앗이네, 젊을 때부터 빨갱이 짓이었구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딴지에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술자리에서 빨갱이론에 대처하기 위해서 논리를 제공한다면 아래와 같다. 당시 미군정에서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우파는 겨우 10%,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무려 90%가 나왔다. 1920년대부터 민중들에게 침투하고, 지하조직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좌익세력은 이미 대중화 되어 있었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이상, 민중 뿐만 아니라 소위 글 좀 읽고, 쓴다는 사람은 모두 좌익계열이었다. 김대중 빨갱이론을 펼치는 사람에게 '까놓고 니 조상도 전부 빨갱이였어'라고 정중하게 설명해주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나타나서 간신히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 또한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냉전은 어린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상처로 남기고 만다. 보통 이쯤 되면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상이다. 뉴또라이처럼 되거나 혁명가가 되거나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기보다는 유연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특히 목숨을 잃을 뻔 했다면 더더욱 드물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의 유연한 사고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1955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로 인해서 젊은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그런데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니. 무슨 꼭 80~90년대 운동권적인 제목의 글 같지만 1955년의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시 1950년대의 한국노동운동의 모습과 대안이 매우 잘 제시되고 있다. 실로 80~90년대의 이론과 비교해봐도 글의 수준이나 통찰력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 글은 일단 반공을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북한과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지만, 실제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동의 유연성' 어쩌구 저꺼구 씨부려대는 뉴또라이들이나 재벌들의 논리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하여야 하고, 관료자본주의 지배체제를 극복하여 합리적인 경제시스템을 얘기하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 잘 들어보면 흡사 민주노동당 분위기를 나타내는 이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전략... 여기서 장황하게 정치론을 늘어놀 여유는 없지마는 여하간 자본주의의 제도하에서는 노동자의 복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가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근대적 생산을 급속히 확충 발전시켜야 함을 서두른 나머지, 우선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놓고 그 후 서서히 노동자의 후생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논자가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고기더러 동해 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는 개철지어의 장자고어와 마찬가지 모순으로서 그간에 있어서의 노동자와 전 근로계급의 고초와 희생을 무엇으로 감당해낼 것이며, 기술한 바 공산당과 대항해서 노동자가 어떻게 굳센 민주 진영의 선봉으로서 싸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가? 그렇다고 필자는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당장에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도록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초보조차 제대로 못 갖춘 우리 나라 경제 형편으로 사회주의를 꿈꾼다는것은, 그것이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만의 관장을 주장하는 소극적 사회주의건 생산, 소비 양면의 장악을 목적하는 적극적 사회주의건 도저히 현실을 무시한 공상에 불과한 것인 동시에 사회주의 그 자체 역시 각국에서의 실험의 결과 상당한 결함이 있다는 것도 이미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지향할 길은 죄악적인 착취와 지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일방, 우리의 실정이 용납지 않고 겸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를 면치 못하는 사회주의 자체도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결국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는 이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되 종래와 같은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단연 배격하고 노동, 자본, 기술의 3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그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노동자와 기술자 역시 응분의 참여가 허용될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 사회주의가 생산 수단의 사회화에만 중점하던 것을, 이제 생산수단보다도 기업운영과 이윤분배에 있어서의 사회화라 할까, 즉 노동자와 기술자를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처우함으로써, 생산능률화의 감퇴를 가져옴이 없이 사회주의 본래의 목적인 근로계급의 복리의 증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새로이 각성된 세계적 사조의 지향이며, 이러한 경향은 북구제국을 위시한 구주 여러 나라와 심지어 자본주의의 본가인 미국에서까지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며 , 지금 미국에서는 각 기업체의 주권을 노동자에게 적극적으로 분배하는 노력이 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후략...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54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럼에도 현재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그 만큼 우리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당시 31살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석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영민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연거푸 실패한다. 1954년 총선에서도 떨어지고, 뒤이어 강원도 인제에서도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에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1961년 5월 14일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16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국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드디어 국회의원 뱃지를 달게 되는 것은 1963년 6대 국회의원선거였다. 고향 목포에서 승리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 전라도에서 민주당 달고 이기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냐?'라고 하겠지만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11곳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휩쓸었다. 전라북도는 2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민주공화당이었다. 당시는 우리가 아는 그런 지역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국회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만큼이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특히 1964년 4월 21일에는 김준연이라는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상황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무려 5시간 19분에 걸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였다.(이는 현재 한국 기네스에 올라있다.).6대 국회의원 활동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유력 야당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얘기하면서 '반독재 투쟁, 민주화, 민족화해-평화노선'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견제를 받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타동적인 외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60년대에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적 흐름이나 과정에서 타동적으로 묻혀가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만들었고,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내놓았다.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을 쥔 세력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솔직히 내가 기득권 세력이라도 이건 가만히 둬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비전은 점점 정교해지고, 구체화 되었고, 또한 확대되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 속에 그 분이 겪을 험난한 여정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글을 쓴 지 무려 28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비상 상태였고, 그의 '70년대 비전'은 나온지 무려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현실화 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영민했으며,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시대상황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독재자와 기득권의 공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늘 거꾸로만 돌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역주행을 멈추게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으로 잠시나마 역사의 온전한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에게 말하는 듯한 글이 하나 있어 인용하도록 한다. 이것은 1973년에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에서 펴낸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책에 있는 -경애하는 국민에게-라는 글의 첫머리 부분이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67&article_id=4654
역사전달자(lim1498@gmail.com) / 딴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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