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성(四姓)·계급·등급·족보 등으로 번역되지만 어느것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카스트라는 말은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혈액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사회적 說法이라는 뜻)가 인도-유럽계(系) 언어로 전화한 것으로, 인도의 바르나(varna) 즉 ‘색(色)’, 나아가서는 피부의 색을 나타내는 말에 해당한다.
카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는데, 복잡한 인도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카스트의 기원(起源) 등에 관한 제설(諸說)과도 관련되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카스트의 성립은 아리아인(人)의 일부가 인도에 침입한 것은 대략 BC 1300년 전후 무렵이다. 이 침입을 당하여 선주민(先住民)인 문다인(人) ·드라비다인은 아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사라고 하는 노예의 위치에 놓이고 말았다.
다사는 이란어의 다하에 해당하는데, 고대 이란에는 제승(祭僧) ·무사(武士) ·농민 ·공장(工匠)의 네 다하가 있었다. 아리아인이 침입했을 때만 해도 인도에는 아리아인의 일반 자유민과 선주민의 두 사회구분(신분 또는 계층), 즉 두 바르나가 생겼을 뿐이다.
그런데 이란의 네 다하가 이 인도의 신분제도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마침내 아리아인은 바라문교 문화를 완성하고, 그후 많은 변천을 거쳐 사제자(司祭者)와 무사가 분화했으며, 선주민은 오직 육체노동이나 잡역에만 종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라문 또는 브라만(Brahman:사제자) ·크샤트리아(Kshatrya:무사) ·바이샤(Vaisya:농민 ·상인 등의 서민), 피정복민(被征服民)으로 이루어진 수드라(Sudra:노예)의 네 바르나, 즉 카스트로 나타났다.
수드라를 제외한 세 카스트는 종교적으로 재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드비자(再生族)라고도 한다. 네 카스트는 존귀한 자와 비천한 자라는 고저(高低)의 서열을 나타내고 있어, 보다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보다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의 곁에만 가도 더럽혀진다고 할 정도로 본다.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부정시(不淨視)되었고, 따라서 각 카스트는 직업을 세습하였으며, 카스트 상호간의 통혼(通婚)은 금지되었다.
또한 이 네 카스트 밑의 불가촉민(不可觸民:언터처블 ·하리잔)을 아웃 카스트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카스트제(制)라고 할 때는 불가촉민도 포함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카스트 중의 어느 하나에 자동적으로 귀속되게 마련이며, 대대로 이 카스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카스트(Caste) 라는 말은 흔히 오해하듯이 인도의 계급 제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 계층 제도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현재까지도 엄연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또 워낙 널리 알려진 터라 마치 인도만의 계급 제도를 뜻하는 말처럼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고대국가부터 최근 백년 전까지는 왕족-귀족-평민-노예 계급이 엄연히 존재했던 카스트 사회였죠. 평민 안에서도 사-농-공-상의 순서가 있었고 말이에요.
인도의 카스트
고대의 먼 옛날부터 인도 사회는 자띠(Jati)라고 부르는 수천 개의 집단, 카스트, 혹은 공동체로 나뉘어져 왔다. "힌두 카스트 제도"는 두 개의 상이한 체계가 혼합된 말인데 - 하나는 바르나(계층/그룹)라고 하는 관념적 체계로 이상적인 브라만 전통과 중세의 규범에 기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가 기록된 이래 인도 사회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자띠 시스템이다. 비록 현재에는 카스트라는 단어가 바르나와 자띠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지만, 몇몇 관찰자(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연구해 온..)들은 이 카스트 체제가 종교적으로 기인한다기 보다는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K. 스리니바술루 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
"바르나 시스템은 오늘날의 카스트 현황을 이해하는 데 포괄적인 관념적 용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카스트 제도를 전통적인 바르나 모델에 맞추어 고찰해보려는 시도는 현대 인도의 사회-정치적 변천 과정에서 그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타당성에 한계를 갖게 될 것이다."
바르나
리그베다, 푸라나 같은 초기의 인도 문헌은 '바르나'를 언급하는데, 그 뜻은 질서, 구분, 종류, 색깔(물질의), 그리고 아래와 같이 인간 사회를 네개의 주요 유형으로 나눈 그룹들을 뜻한다.
1. 브라만 (학자, 교수, 사제, 수행자) - 진리를 추구하고 도를 닦으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각종 의식을 주재하는 계층
2. 크샤트리아 (전사, 왕, 군인) - 전쟁으로 영토와 국민을 지켜야할 의무를 가진 왕족과 무사 계급
3. 바이샤 (상인, 농업인) - 세금을 내는 일반 평민들
4. 수드라 (일꾼, 장인, 서비스업 종사자.. ~왈라 라고 하는...) - 다른 계층에 대한 봉사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층
이 힌두 사회의 전형에 들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 외국인을 포함하여 유목민과 다른 부족들, 추방된 사람들은 믈레챠 혹은 "아나랴"라고 불리며 더러운 균을 옮기는 보균자이기 때문에 접촉을 해서는 안되는 것들로 (들어는 보셨나, Untouchable~) 취급받는다. 즉 인도 여행 가는 외국인들은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는 카스트로 인도사회에서 자기 자신이 인식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다. ㅋㅋ 아, 물론 개념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는 어딜 가나 돈 가진 사람이 대접받는다. ^^; 어찌됐든, 외국인을 열등한 종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자기 한족들이 사는 중국땅이 세상의 중심이고 동서남북의 나머지 이민족들은 죄다 오랑캐라고 여기는 것과 아주 비슷한 개념이다.
소속한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구성원들이 정해진 규범을 위반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마하바라타의 샨티 파르바 중 한 부분에서 이 추방 관습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 "말을 함에 있어 난폭한 사람, 혹은 기질이 폭력적인 사람, 다른 이의 여인을 유혹/유괴하거나 다른 이에게 속한 재물을 훔치는 사람은 우리에 의해 버림 받아야 한다."
그럼 신화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 바르나 시스템을 보고 있는가~ 한번 살펴 보자.
힌두교 신화는 신의 몸에서 4개의 카스트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 그(신)의 입은 브라만이었다 - 입에서 나온 브라만은 최상층 계층으로서 사제와 학자가 될 수 있다.
* 그의 두 팔은 통치자를 만들었다 - 팔에서 나온 크샤트리아는 무사나 왕족 같은 통치자가 되었다.
* 그의 두 넓적다리는 바이샤였고 - 넓적다리에서 나온 바이샤는 생산활동을 맡으며
* 두 다리들에서 수드라가 생겨났다 - 하층민은 수드라는 신의 발에서 태어났으니 다른 카스트를 섬겨야 하고
모하칸과 같은 불가촉천민은 네 개의 카스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 천민이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요, 구원의 길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이 있었기에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제도로 현재까지 유지되어 온 것이다. 물론 영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카스트 제도로 인한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왔으나, 최근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사회 변화가 있기 전까지 그 성과는 미미했다고 보여진다. <= 이건 내 견해지만 사실이 그렇다.
파리야, 안탸쟈, 혹은 언터처블(불가촉)이라고 하는 사회의 최하층민은 하수 오물 처리와 동물의 도살 등 모두가 꺼리는 일을 한다. 그들은 특정한 구역에 살며 성스러운 책(바가바드 기타나 다른 경전들)을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체제로서의 바르나 시스템은 인도 전역에 고대부터 널리 퍼져있던 사회-문화적-자띠-카스트-시스템과 구별되어야 한다.
바르나 시스템에 따르면 브라만은 청빈하게 살 것이 요구되며, 그들의 주된 사명은 베다의 가르침과 성스러운 말씀, 교구 밖의 일들(속인들의 일들)을 배우고 다른 이들을 가르치며, 모두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크샤트리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武勇에 힘쓰는 것과 국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바이샤는 상업과 소를 키우는 일을 포함하여 농업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인 반면, 수드라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 제공자들과 일꾼들이다. 모든 바르나 계층은 예외 없이 무소유와 도둑질하지 않음, 진실성, 비폭력과 자비심(선행)을 베풀도록 가르침을 받는데, 이러한 덕목들은 자이나 교와 불교 교리에서도 나타나는 특질들이다.
사학자 Romila Thapar가 그녀의 'The Past and Prejudice(과거와 편견)'에서 지적한 바 : "인도 사회의 역동성은 수행해야 할 계율, 즉 마땅히 되어야 하는 이상적인 삶의 구성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의 구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데 있다. 가장 평범한 것에서부터 가장 행복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양상에는 반드시 현실을 반영하는 것만은 아닌 어떤 원리가 작용한다. 그 원리는 이상적인 관념이며, 따라서 두 가지로 양분되는(이상과 현실) 결과는 대립을 강요 받는 것이 아니라, 조정이 되었다. 그러한 타협은 그들의 문화가 일정불변하게 더 관대하고, 명상적이며 덜 경쟁적으로 보이는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는 더 쉬워보인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비록 브라만이 성직자 계급으로 언급되어 왔지만, 이는 전체적으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사원의 사제는 브라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었고, 엄청난 사원의 수와 빈약한 브라만의 인구 밀도를 고려해보면 사실 아주 적은 인원이 브라만 출신 사제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위한 베딕 야즈나의 수행자 또는 공개적인 야즈나 불 희생 의식은 브라만이 하였다. 모든 드비자(두 번 태어난 재생족, 카스트 상위 3계급을 뜻함)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는 그들 자신을 위한 호마 불 희생 의식을 수행할 수 있었고 그리하였다. 심지어 이 의식은 힌두이즘 안의 모든 분파에서 항상 지켜져 온 것이 아니었다 - 예를 들어 아랴 사마즈에서는 수드라를 포함하는 모든 카스트가 불 희생 의식을 할 수 있다. 브라만 사이에서도 몇가지 구별되는 범주가 있었고, 사원의 승려들은 보통 브라만의 사회적 계급에서 가장 낮은 아랫부분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 예를 들어 Megasthenes는 그의 Indika에서, 그리고 무슬림들, 예를 들어 Alberuni는 브라만을 철학자라고 묘사했다. Megasthenes는 그들을 Brachmanes라고 부르며 아래와 같이 특성을 기술하였다.
"그 철학자들은 계급의 가장 첫번째에 위치하지만, 숫적으로는 가장 적은 계층을 형성한다. 그들의 봉사는 희생을 제공하거나 기타 신성한 의식을 수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적으로 요청받아서, 또한 공개적으로 왕의 요청에 의해 Great Synod라고 하는 신년의 시작에 모든 철학자들이 왕 앞에서 성문에 모여 어느 철학자이든 왕에게 유용한 제안을 할 수 있으며, 혹은 작물의 경작과 소의 사육을 향상시키는 방법들을 관찰하고, 혹은 대중의 관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것(신년에 모여서 이것저것 하는 그 행사)을 선언하기도 한다."
몇몇 연구자들에 따르면, 기원후 4세기까지, 그리고 확실하게는 기원후 7세기까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그 그룹은 현재 그들 자신을 가리켜 달릿(Dalits) 혹은 "짓밟힌, 학대받는"으로 부른다. 따라서 불가촉(Untouchable) 혹은 아웃카스트(outcaste, 카스트 밖이라는 뜻)는 바르나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바르나를 가지지 않았다고 간주되는 사람이었다.
자띠 (Jatis)
1983년, Madav Gadgil 교수는 인도에서 자띠라고 부르는 카스트의 현실을 시골 지방인 마하라쉬트라에서의 그의 연구에 근거하여 기술하고 있다: "인도 사회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카스트와 부족, 종교적 공동체들의 덩어리이다. 부족과 카스트 그룹들은 족내혼으로 인해 번식적으로는 고립된 집단이며, 전통적으로 제한된 지리적 범위에 분포하였다.
부족들과는 달리, 갖가지 카스트의 집단은 지역적으로 널리 겹쳐지며 (이 말은 동일한 지역 내에 상위 카스트 사람들도 살고, 하위 카스트도 산다는 뜻) 몇몇 카스트의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복합적 촌락 사회를 형성한다. 그러한 촌락 사회에서 각 카스트는 전통적으로 카스트 위원회에 의해 자체적으로 통제되며, 비교적 자율적인 생활 양식을 갖게 한다. 각 카스트는 세습적으로 미리 정해진 직업에 종사하곤 했는데; 이는 기능공과 서비스직의 카스트 그리고 유목민 카스트에게 특히 그러했다.
그 몇몇 카스트들은 전통적으로 정해진 서비스와 제품의 물물교환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카스트 집단은 심지어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각 카스트 그룹들은 따라서 그 체계가 완전히 구체화되었던 최소한 최근의 1500년 동안, 그리고 십중팔구 그보다 더 오랫동안 내부적으로 문화적인 그리고 아마도 유전적인 진화도 일어났던 하나의 편성 단위였다. 이 기간에 걸쳐 다양한 카스트들은 수많은 유전적 특질은 물론 소유한 기술, 식습관, 의복, 언어, 종교 의식 등의 문화적 특색에 있어 두드러진 차이점들을 드러내왔다."
Stanley Wolpert는 "A New History of India"에서 언급하기를, "확장의 진행, 농업 생산의 정착과 새로운 인구의 다원론적 통합이 인도의 독특한 복합 시스템(직업에 따른 사회 조직으로서)의 발전을 이끌었다."
자띠 체제 하에서 개인은 나면서부터 얻게 되는 사회적 역할을 가진 자띠로 태어나고 동족결혼, 다른 말로 하면 오직 그 자띠 내에서만 결혼을 할 수 있다. 자띠는 정체성, 보호, 지위를 제공하며 경제, 사회 그리고 정치적인 영향에 근거한 변화에 역사적으로 개방되어왔다. (예 : Sanskritization) 초기 인도의 변천사 과정에는 다양한 부족,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요인이 끊임없는 폐쇄와 통합, 그리고 우월한 사회적 계층(사회 구조에서 전통적이고 세습적인 체제가 되는 경향이 있는)의 변동을 가져왔다. 이 수천개의 배타적이며 동족내 결혼을 하는 집단들의 시스템을 자띠라고 부른다. 비록 인도의 전역에 걸쳐 몇가지 종류의 변종이 있었지만, 자띠는 그 안에서 결혼을 하고 개인의 일생 대부분을 보내는 효율적인 공동체였다. 종종 그 공동체(자띠)는 개인이 도움을 요청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또한 발전을 추구하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그 범주에 걸쳐 있는 다양한 자띠의 사람들-소위 상급 카스트부터 하급 카스트까지-은 다른 계급과의 결혼, 음식과 마실 것을 나누는 것, 심지어는 다른 자띠의 사람들과 친밀한 사회적 교류를 갖는 것까지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자띠 카스트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 자신이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고 사실 정반대였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적 특성을 강화하기 위한 민담, 전통, 신화와 전설을 갖고 있었다.
고대 북부 인도 사회에 관한 흥미로운 견해가 그리스인 Megasthenes의 Indika에서 보이는데, 그는 인도 사회를 "일곱 계층"으로 구성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인도의 전체 주민은 일곱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철학자들의 공동체로 형성된 집단이며 다른 계층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이지만 위계상으로 가장 높은 계층이다. 철학자들은 모든 공공의 의무로부터 면제되며, 다른 사람들의 주인도 아니고 종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생전에 제물을 바치기 위한, 그리고 죽은 이의 장례식을 치루기 위한 사람들의 일에 관여한다: 그들은 신에게 가장 사랑을 받으며, 저 세상과 관련된 일에 가장 정통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수고의 보답으로 그들은 값진 선물과 특혜를 받는다.
그들도 또한 인도의 일반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데, 연초에 다함께 모여서 (철학자들이 다 모여서...) 집합한 군중들에게 가뭄과 우기, 상서로운 바람, 질병, 그리고 듣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만한 다른 주제들에 관하여 미리 주의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왕과 일반인들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미리 알게 되어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한 적절한 준비를 항상 할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무엇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해 실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의 예언이 들어맞지 않은 철학자는 불명예 외에 다른 처벌을 받지 않으며, 그의 남은 인생동안 침묵을 지키게 된다."
다른 계급에 대한 언급도 The Anabasis Alexandrae, 8권 : Indica에 나타난다.
"그리고 다음에 농부들이 위치하는데, 인도인들 중 가장 수가 많은 계층을 형성한다; 그들은 군인이나 전쟁 용도로는 쓸모가 없지만, 땅을 경작하며 왕과 도시(자치 도시, 공동체)에 세금을 낸다. 그리고 만약 인도인들 사이에서 내부적인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전쟁 주도 세력들)은 이런 일꾼들을 건드리지 않으며, 토지 자체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모든 침입자를 살해하는데, 근처의 다른 사람들은 평화롭게 땅을 경작하거나 과일을 따 모으거나 사과를 으깨거나 수확을 한다. (그게 인도 땅 아니겠는가! 남의 일에 신경쓰지 않는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졌다는...ㅋ) 인도인의 세번째 계층은 양과 소를 치는 목자들이며, 이들은 도시 가까이에도, 마을 가까이에도 거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언덕에 살면서 가축에 대한 세금을 낸다; 그들은 새와 야생 짐승을 사냥하기도 한다.
네번째 계층은 장인과 소매 상인들이다. 이들은 일꾼들이며 그들의 작업에서 공물을 내고, 전쟁 무기를 만들어 비축하며;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에 의하여 보상받는다. 배를 만드는 장인들과 강을 항행하는 선원들이 이 계층에 속한다. 인도의 다섯번째 계층은 군인이며 숫자로는 농부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계층이다; 이들은 가장 큰 자유와 가장 무거운 충성심을 가지며 오로지 군사적인 것들만 익힌다. 그들의 무기는 다른 이들이 만들고, 또 다른 이들이 말을 제공하며; 역시 다른 이들이 캠프를 공급하며, 그들의 말을 돌보고 무기를 광내며, 코끼리를 조련하고, 체계를 유지하며 전차를 몬다. 그들 자신은 전쟁이 필요한 때 전쟁에 나가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결혼을 하고, 공동 사회에서 아주 괜찮은 보수를 받아서, 그 돈으로 쉽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된다.
여섯번째 계층은 감독자(반장)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지방이나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독하며, 그래서 왕이 다스리는 곳은 왕에게, 혹은 독립된 곳은 자치 당국에 보고를 한다. 이들이 허위 보고를 하는 것은 불법이며; 어느 인도인도 그러한 허위 보고로 고소당한 바 없다. (허... 믿을 수 없게도 당시 인도는 아주 정직하고 신의 있는 사회였던가 보다... Incredible하게도 말이지~)
일곱번째 계층은 왕 혹은 자치 도시의 경우 당국과 함께 공동체에 관한 심의를 하는 이들이다. 이 계층의 수는 적지만, 지혜와 공정성은 다른 모든 계층보다 우월하다. 이 계층은 통치자, 지방 통치자, 대표자, 문화재 관리인, 육군과 해군 장교(당시에 물론 공군은 없었다는 거~), 재무 담당 관리, 그리고 농업 감독 중에서 선택된다. 계층 밖의 결혼은 불법이다 - 예를 들어 장인 계층에서 농부 계층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유목민이 농부가 되거나, 장인이 유목민이 되는 등의 변화는 안된다.
현대 인도의 카스트
19세기 영국 식민 정부는 수천개의 자생적이며 유동적인 계층 사회(자띠)를 직면하여, 10년 마다의 인구조사 목적을 위해,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인도의 전체 힌두 인구를 이론적인 바르나 시스템 안의 각 자띠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901년 Herbert Hope Risley에 의해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바르나 기반의 카스트 정체성이라는 현실적인 법으로 이 최초의 체계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대영제국의 통치기간 동안 자띠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을 바르나 범주에서 보다 높은 계층에 올려놓고자 방법을 모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낮은 카스트 계층에 속한 대부분의 자띠 그룹은 바르나 범주를 거부하였는데, 이 임의적인 분류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며 받아들일 수 없고,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새롭게 동결된 카스트의 구현은 첫째로 그 시스템 자체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둘째로 그 조정의 최대 수혜자로 여겨지며 이제 공식적으로 사회 계층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브라만에 대한 분노를 가져왔다. 正義黨, 남부 Periyar에서 Kolhapur 마하라자(위대한 왕이라는 뜻), 서부 인도의 저명한 학자인 Ambedkar 박사 등이 20세기 초에 이 시스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인도 사회와 정치에 미쳤다.
식민 영국 정부가 보편적이며 유동적인 자띠 시스템을 1901년부터 인구조사를 시작하면서 이론적이며 엄격한 바르나 시스템으로 융합시켜 버린 것은 많은 사람들이 힌두 사회가 고대부터 바르나 체계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잘못 여기게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 인도의 다양한 주민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엄격한 체계는 불공평하다고 보았다. 현대의 인도 사회는 1901년의 인구 조사 이래로 카스트에 대한 이 문제있는 경직된 해석과 싸워왔다.
몇몇 운동가들, 특히 Durgan의 UN 위원회는 카스트가 인종 차별의 한 형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Andre Beteille 같은 몇몇 사회학자들은 카스트를 인종주의의 한 형태로 다루는 것은 "정치적인 장난질" 그리고 심지어는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그러한 견해에 반박하는데, 왜냐하면 브라만과 Jatav 같은 지정 카스트(SC, 불가촉천민에게 쓰는 공식 호칭) 사이에는 식별할 수 있는 인종적인 특색의 차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회 단체는 우리가 그들을 편견과 차별로부터 보호하기를 원한다고 하여 단순히 한 인종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고 기술하였다.
인도 정부도 사회적 신분에 관한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인종 내부, 그리고 문화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며 카스트와 인종 차별이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마찬가지로 부정하였다. 카스트를 "고정적이며 불변하는" 시스템이라고 보는 견해도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인도 정부는 카스트들 간에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교육 기관들에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좌석을 확보하고, 정부기관의 직업 (그리고 승진도!) 분배, 그리고 심지어는 지정 불가촉 카스트와 부족들을 위한 의회의 좌석수까지도 정했다.
이들 모든 그룹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열려져, 그들이 더 쉽게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이것이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높였다. 사회학자들은 고정적이며 원론적인 계층화로서의 카스트 제도의 개념이 어떻게 무너져서 보다 병렬적이고 경험적인 계층의 카스트 제도 개념으로 되었는지 기술한다. 다른 사람들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이동성과 융통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적 모델을 적용한다. 이러한 학자들에 따르면, 낮은 카스트의 개인 그룹들은 높은 카스트의 관습을 흉내내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카스트 지위를 올리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저명한 사회인류학자인 M. N. 스리니바스도 또한 카스트의 경직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산스크리트화(Sanskritisation)의 개념을 소개했다.
어느 경우에도, 이제 현대 인도에서, 급속한 도시화와 대량 이주, 그에 이은 붐비는 생활환경과 대중 교통, 그리고 폭넓은 범위의 직장 동료들의 혼합 등으로 인해 최소한 큰 도시들에서 그리고 확실히 대도시들에는 사회적 태도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왔다. 직업과 카스트의 결합도 또한 변해왔는데, 특히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나면서 두드러졌다.
지정 카스트 (Scheduled castes)
농촌 지역과 작은 도시들에서 자띠-카스트 제도는 농촌 문화적 가치의 일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농촌 사회가 도시 문화를 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촌의 문화적 가치와 역사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띠-카스트 제도는 남아시아의 다문화적 유산의 일부지만, 이론적인 바르나 원형에 자띠 체제를 던져넣었던 영국의 식민 정책으로 인해 왜곡되었다. 이 인공적인 바르나-카스트 체제에서 상호 존중이라는 것은 어렵고 거리가 먼 제안으로 보인다, 만약 실현 가능한 목적이 있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인도 정부는 예약 좌석(교육과 직업에 혜택을 주는 긍정적인 차별)을 받을 사람을 판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식적으로 하위 카스트(backward castes)와 서브 카스트(subcastes)를 문서화하였다. 인도의 예약 시스템은 주로 힌두 하위 카스트와 하위 계층에 대한 할당에 의존하는데, 이 제도에 의하면 교육 기관과 공무원의 거의 50%의 좌석 혹은 공석이 그들을 위한 것이 된다. 공무원의 승진 또한 이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 정부의 목록에는 지정 카스트, 지정 부족과 기타 하위 계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지정 카스트 (Scheduled castes, SC)
SC는 일반적으로 예전의 "untouchables(불가촉천민, 선교사들이 쓰던 용어)"으로 구성된 카스트이다. ("Dalit-달릿, 억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 라는 뜻" 이란 용어는 현재 운동가들이 선호하는 말이다.) 현재 인도 전체 인구의 16%인 약 1억 6천만명이 이에 속하며, 예를 들어 수도인 델리에는 SC 목록에 오른 카스트가 49개 있다.
지정 부족 (Scheduled tribes, ST)
일반적으로 부족 집단으로 구성된다. 현재 인도 전체 인구의 7%, 약 7천만명이 해당된다. 인도의 소수민족-북동쪽에 위치한 미얀마 근처의 몽골리안, 인도 중남부 정글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 등, 어떤 특정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기타 하위 계층 (Other Backward Classes, OBC)
Mandal 위원회는 OBC 범주 아래 3천 개가 넘는 카스트를 포함하고 있으며, OBC가 인도 인구의 52%를 구성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국가 표본 조사는 그 수치를 32%로 보고 있다. 인도 OBC의 정확한 수치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많은 사람들은 Mandal 위원회나 국가 표본 조사에 의해 인용된 수치보다는 적을 것으로 믿는다.
카스트 정책
마하트마 간디, B. R. Ambedkar, 그리고 자와할랄 네루는 카스트에 대해, 특히 헌법 정책과 불가촉 천민의 처지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가졌다. 1970년대 중반까지, 독립 인도의 정치는 주로 경제 이슈와 부패 문제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카스트가 인도 정치의 주요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Mandal 위원회는 1979년 "사회적으로 또는 교육상으로 뒤처진(backward) 사람들을 판별" 하기 위해, 그리고 카스트 차별을 바로잡기 위한 쿼터 할당과 좌석 확보의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80년, 위원회의 보고서는 인도법 하에서 그 차별 철폐 조처(소수자 우대 정책) 관행으로 낮은 카스트의 사람들이 공무원직과 공립 대학 정원의 일정 할당량에 독점적인 접근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단언하였다. 1989년 부통령 싱이 이끄는 정부가 Mandal 위원회의 권고안을 실행하려고 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순전히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카스트에 근거한 예약제를 시행하여 개인적 이득을 챙기려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인도의 정당들이 공개적으로 카스트에 기반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BSP(Bahujan Samaj Party) 같은 정당들은 달릿 계층에 의존하며, the Rashtriya janata Dal, the Samajwadi Party 그리고 Janata Dal 정당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 주로 OBC와 무슬림 계층의 지지에 의존한다.
인도 역사의 특징
○ 인도는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 생활풍습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대륙과는 지리적으로 차단된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이루어 왔음.
○ 5,000년 이상의 긴 역사 중 정치적 통일을 이룬 시기는 마우리아왕조(B.C.321-185), 굽타왕조(A.D.380-606) 및 무갈왕조(A.D.1526-1858) 등 3개 왕조에 불과하며, 북서부지역은 외부세력 침입의 출입구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외부 세력과의 항쟁 속에서 성쇠를 거듭하였으나, 데칸고원 등 남부지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외부세력의 침입을 비교적 적게 받아 왔음.
고대
○ 인더스 문명(기원전 3000-2000)
-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으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의 유적이 있음.
-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서, 종교는 다신교, 정치 체제는 제사장 중심의 공화제를 형성
○ 아리안 문명(기원전 2000-1000)
-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 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 침입 후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 사제 계급인 브라만 중심의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리그베다 등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됨.
○ 도시국가의 형성
- 기원전 7세기경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을 건설
-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왕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중/근세
○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1-185)
- 3대왕인 아쇼카왕(BC 272~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포교에 힘써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함.
○ 쿠샨왕조(78-226)
- 쿠샨족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나라,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
○ 굽타왕조(380-606)
-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에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하였으며, 불교, 힌두교 및 자이나교 등이 융성, 부흥했음.
○ 무굴제국(1526-1858)
-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악바르 이후 150년 간 전성시대가 지속됨.
-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남김.
- 1707년 이후 지방토후의 발호,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약화
- 1757년 영국이 프랑스와의 플랏시 전투에서 승리
- 1857년 영국이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
근대
○ 반영 독립투쟁
- 18세기 후반에 생겨난 많은 정치단체 중, 1885년 결성된 "인도 국민회의"가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함.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에 대응하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게 됨.
-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영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회교도 연맹을 결성함.
- 1차 대전 이후 인도 국민회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 지위를 거부하는 등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많은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반해 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함.
○ 독립
- 2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방안을 제시한 바, 동 제안을 국민회의가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1947.8.15 영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됨.
현대
○ 인도 헌법 채택
- 1947년 8월 15일 독립과 함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초대 인도 총리에 취임한 후, 1949년 제헌의회에서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헌법이 채택되고, 1950. 1월 발효됨으로써 영연방 자치령의 지위에서 탈피함.
○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강화
- 한편, 독립 당시부터 파키스탄과는 종교적, 영토적 분쟁으로 1947. 10월, 1965. 6월, 1971. 12월 등 3차례 전쟁을 치뤘으며, 중국과는 국경문제로 인해 1962년 전쟁을 겪는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겪기도 했으나 비동맹주의와 균형 및 실용주의를 적절히 추진함으로써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강화시켜 옴.
○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 시현
- 국내 정치적으로 국민회의당(Congress Party)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추진해 오다가 1990년초 경제상황 악화에 따라 1991년 신경제정책을 채택하여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실시함. 1990년대 이후 국내 정치권력은 국민회의당․BJP 양대 정당과 군소 정당들이 합종연횡하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오고 있으며, 경제개방 및 개혁의 성과로 꾸준히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시현하고 있음.
정치 개황 |
국내 정치의 특수한 여건
○ 인도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는 주요 요인으로는 일반국민의 민주의식, 언론자유의 보장, 관료제도, 군부의 중립성, 사법부의 독립 등 긍정적인 요인들과 카스트 제도, 종교간 대립, 빈부격차, 지방주의, 취약한 정당기반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있음.
○ 인도의 고질적 사회풍습인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고 특히 전체국민의 22.5%에 해당하는 최하층민(Scheduled Caste와 Scheduled Tribe)과 52%에 해당하는 하층민(Other Backward Castes)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 문제는 인도정치가 안고 있는 최대 과제 중의 하나임.
- 오랜 인습은 타파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음. 2006년에는 정부의 OBC에 대한 국립대학 입학할당제도 도입 방안추진계획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가열되기도 함.
헌법과 정부형태
○ 1950년 1월 26일 공포된 헌법은 22장 395조 및 부칙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특징은 아래와 같음.
-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 공화국 표방
- 종교 무차별주의로 신앙의 자유 허용
- 주정책에 대한 지시지침(Directive Principle of State Policy)을 통해, 부의 공정하고 적절한 분배 및 생산수단의 집중방지 규정
○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음.
- 연방은 28개 주(state, 2000년도에 3개 주 신설)와 7개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
○ 각 주에는 주 정부와 주 의회가 있음.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Governor)는 5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주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 총리(Chief Minister)가 장악함.
입법/행정/사법부
○ 상원(Rajya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238명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12명 등 총 25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6년으로 매 2년마다 1/3씩 새로 선출함.
○ 하원(Lok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대표 543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Anglo-Indian community 대표 2명 등 총 545명으로 구성하며, 임기는 5년임.
○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총리 및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구성
-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 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접 선출되며,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역할 수행(군 최고통수권 보유)
○ 사법부는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of India), 주 최고법원(High Court), 지방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임. 대법원은 인도 헌법과 법률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권을 가지며 대법원의 판결은 모든 법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짐.
외교 |
대외정책의 기조
○ 1947년 독립이후 인도의 외교정책을 지배해 온 기본적 원칙은 “네루외교노선”에서 비롯된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 원칙이며, 이와 같은 외교기조는 인도가 처한 특수한 외교 및 안보환경 즉, 광대한 국토와 복잡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국가적 단결이 독립초기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대외정책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국내적 제약조건에 기인한 것이었음.
- 인도는 독립 당시부터 패권주의 반대, 군사동맹 가입 반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 수립 등 비동맹회의와 유사한 기본이념을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으로 표방하면서 비동맹운동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비동맹주의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음.
최근 외교정책 노선
○ 점차 과거 비동맹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지속적 달성을 위한 실용주의적, 친서방적 외교정책 노선을 강화하는 추세이며,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강화가 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저하게 대미국관계 강화를 시도하는 실용주의 노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2004년 재집권한 Congress당 중심의 UPA 연합 정권 하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음.
○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부상하는 global power로서의 국제적 영향력 확대 노력을 가속화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G-4와의 협력 유지를 통한 외교노력을 경주하고 있음.
○ 서남아 지역의 중심국가로서 지역분쟁 예방, 정세 안정화 및 역내 영향력 유지․확대를 위한 외교적 지도력를 추구하며, 특히 주변국가들에게 군림하던 과거의 형태를 벗어나 서남아지역연합(SAARC)의 활성화 등을 통한 전향적이고 유연한 지역 외교 노선으로 전환중임.
○ 고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를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추진하고, 특히 원자력 에너지협력을 위해 미국, EU, 러시아, 중국 등 기존 핵보유 국가들의 지원 확보를 위한 다방면의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출범을 통한 장기적 East Asia Community 구상 추진, ASEAN과의 FTA 협상 마무리, 한국과의 FTA(CEPA) 협상 개시, 중국 및 일본과의 FTA 타당성 검토 등 동아시아권과의 지역 협력 강화를 통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고 있음.
인도-파키스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파키스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남아시아 지역협력 연합(SAARC)
○ 국제무대에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고 역외개도국 및 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증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아시아국가간 지역협력 기구로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이어 두 번째로 창설됨,
-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 모색(정치, 군사문제 제외)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몰디브, 부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 8개국이 회원국이며, 한국, 중국, 일본, 미국, EU 옵서버 가입
○ 역내국가간 국력의 불균형과 회원국간 다양한 갈등 및 대립 등 어려운 문제가 있으나 회원국 상호간의 공동체 인식과 함께 협력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바도 있음.
사회 |
카스트(Caste) 제도
○ 수천 년 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습으로 존재하고 있음.
○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짐.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 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은 subcaste가 있음.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있음.
○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져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규범을 준수해야 했었음.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큼.
○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많은 사회개혁운동가들은 불가촉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 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보호에 앞장섰음.
- 오늘날 인도에는 1억이 넘는 하리잔이 있는 바, 정부에서는 입학, 취업시 일정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 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으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임.
언어
○ 다양한 인종과 더불어 180여종이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헌법으로 인정한 지역별 공용어는 18개임.
- 힌디어, 텔루구어, 벵갈어, 마라티어, 구자라트어 등
○ 이중 인구의 38.7%가 사용하고 있는 힌디어는 전국적 공용어이며, 영어는 18개 공용어에 해당하지 않으나 의회, 행정부, 사법부 및 사회 각 분야에서 널리 사용하는 공용어이자, 학력이 높은 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함.
복장
○ 남자 : 고유의상으로는 도티(Dhoti), 룽기(Lungi), 아즈칸(Achkan), 파자마 등을 들 수 있음. 그러나 도시에는 하절기에 사파리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
- 도티 : 동부‧남부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긴 천을 밑으로 늘어뜨린 후 다시 허리춤으로 올려 동여 입는데 흰색의 얇은 천을 사용함.
- 룽기 : Kerala 등 해안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좁은 폭의 천을 늘어뜨린 후 허리를 동여 입음.
- 아즈칸 : 네루 전 총리가 즐겨 입었던 목이 올라온 제복 스타일의 옷
- 파자마 : 우타르 프라데쉬 주에서는 무릎 아랫부분이 꼭 끼는 추리다(Churidar) 파자마를 입으며 Punjab에서는 헐거운 쿠르타(Kurta)를 입음. 흰색 천을 주로 사용함.
- 사파리 : 하절기(4월-11월)에 많은 도시인들이 즐겨 입는데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점차 양복, 넥타이 차림이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임.
○ 여자 : 사리(Saree)라는 고유의상을 주로 입는데 지역에 따라 매는 방법, 천의 길이, 천의 개수가 다름.
- 입는 방법은 천을 허리에 감아 맨 다음 어깨에 걸쳐 밑으로 내려 입음. Punjab 지방에서는 사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라는 상의가 길고 바지가 넉넉한 옷을 입으며 우타르 프라데쉬, 라자스탄, 구자라트에서는 가그라(Ghaghra)라는 긴 스커트를 입음.
문화
○ 베다문화(B.C.2000-500)
- 아리안 족의 침입 후 형성된 베다문화는 인도의 종교‧사회‧관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힌두교를 탄생시켰으며, Veda와 같은 대서사시적인 경전을 발전시켰음. A.D.6세기-10세기를 통해 힌두문화는 건축․조각․회화 등 각종 예술 분야에서 번창했으며 힌두사원 등 많은 기념비적인 힌두문화 유물을 남겼음.
○ 불교문화(B.C.500-A.D.1100)
- 불교문화 전성기는 B.C. 3세기 야쇼카대왕 시대로 산치대탑, 보드가야의 대탑, 녹야원의 석탑, 아잔타․엘로라 동굴 조각 및 건축 예술에서 절정을 이룸. 아울러 불교는 중국, 한국 및 동남아 등 여러 나라로 전파됨.
○ 이슬람문화(A.D.1100-1600)
- 이슬람문화는 특히 건축에서 페르시아 및 힌두의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조화를 이룬 대표적 양식으로, 초기의 상호배척을 점차 극복하고 상호간의 종교적 관용이 정착하면서 우루두어의 탄생 등 언어, 문화,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함.
○ 서구문화의 영향(A.D.1700-1947)
- 250년에 걸친 영국 지배하에 인도예술, 특히 전통회화분야에서 서구 예술의 영향을 받음. 또한 영어의 도입과 함께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학의 발전을 가져옴. 그러나 힌두문화는 상당부분 그대로 전승됨.
○ 독립이후(A.D.1947-현재)
- 독립 이후, 전통문화 창달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의 진흥을 위한 국가적 지원과 문화재 발굴, 보존, 전시 등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관리국 등 국가행정기관을 통하여 현재 문화와 함께 전통문화를 조화시켜 나가고 있음.
교육
○ 교육의 기본정책은 지역 간의 교육격차해소, 전 계층 간의 균등한 교육기회, 국가사회 요구에 부응하는 인력자원개발 등에 목표를 두고 14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 영어, 힌디어 및 주 공용어 등 3개 언어교육, GNP의 6% 교육투자 등을 통해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노력하고 있음.
○ 학교교육은 10+2+3의 15년 과정의 교육제도로써 1968년도 채택 후 현재 거의 모든 주가 이를 실시하고 있음.
종교
○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Jainism), 시크교(Sikhism) 등 4개 종교의 발생지이며 이슬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등 다양한 외래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임.
○ 종교는 인도 국민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종교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종교는 인도인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종교는 인도인의 일상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임.
○ 헌법은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 신앙의 절대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국가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음.
○ 인도의 종교인구 분포는 힌두교 81.5%, 이슬람교 11.2%, 기독교 2.7%, 시크교 2.4%, 불교 0.7%, 자이나교 0.4%, 기타 1.1%임.
힌두교
○ 힌두교는 B.C 2000년경 아리안족 침입 후 최고경전 Veda가 집대성되면서 정치, 사회생활을 지배해 왔으며, 이슬람교 등 이교도의 수세기 동안에 걸친 침략 속에서도 이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하면서 오늘에 이름.
- 드라비다족의 토속신앙, 아리안족의 자연신 숭배 등에 바탕을 둔 다신교인 힌두교는 외래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인내와 관용을 특징으로 하며 생활경험, 도덕, 사회관습, 규범의 총체로서 Dharma(정의 또는 의무)에 따른 수도생활과 최고 정신을 탐구하는 고도의 생활 철학적 종교임.
- 소를 신성시하고 카스트제도를 정착시킨 힌두교는 해외 전파보다는 인도인의 종교로 존속하길 바라는 성향을 띠고 있음.
- 현재 약 8억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힌두교는 인도사회에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종교임.
보건
○ 약 26%의 빈곤층을 가지고 있는 인도는 모든 국민의 건강향상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농촌, 빈민층에 대한 위생, 의료혜택을 확대 실시하고 있음. 특히 UPA 정부는 집권기간 중 GDP의 2-3%를 보건 분야에 투입하되 기초보건에 우선적으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의 조기 도입과 필수 의약품의 저렴한 판매 방안 마련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음.
○ 지난 30년 간 평균 수명은 31세에서 52세로 사망률은 천 명당 27.4%에서 14.2%로, 유아 사망률은 천 명당 146명에서 125명으로 개선됨. 또한 전염병퇴치를 위한 특별대책을 실시하고 있는 바, 1977년도를 기해 천연두는 퇴치되었으며 학질, 사상충, 나병, 콜레라, 결핵 등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출발로 시작한 가족계획은 많은 성과를 가져와 출생률은 60년대 4.12%에서 1978년도 3.33%로 감소되었으며, 2002년에는 2.38%로 정부는 2001-11년의 10년 간 인구증가율을 16.2% 이내에서 억제한다는 계획임.
관습
○ 인도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절이나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음.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교리나 성찰보다는 수많은 제신들의 형상화를 통한 의식이 주요 신앙생활을 이루고 있으며, 도덕률이나 내세구원보다는 개인의 현세구복에 치중하고 있음.
○ 오랜 카스트제도 하에서 묵묵히 순종해온 생활태도, 불교의 자비와 관용적 사상, 장기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등의 영향에 기인하는 관용적 태도, 생명존중 사상, 무저항주의 같은 평화주의 사상이 인도인들의 생활 저변에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주의도 이러한 전통적 사상의 계승 내지 발전으로 볼 수 있음.
- 그러나 이슬람-힌두 등 종교, 종파간 갈등 분규가 발생시 폭력사태로 변질되기 쉬우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여 외국인의 주의를 요함.
○ 인도인들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보수적 풍속을 벗어나는 외국인은 풍속사범으로 체포, 처벌하기도 함.
○ 인도에서는 금주제도를 실시하는 주가 있으며 일반 식당에서도 금주일이 있고, 판매시간이 제한되어 있음. 주류 판매는 호텔이나 규모가 큰 대중식당에만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
○ 매춘은 불법이며, 지역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대체로 자국인들 간에 이루어지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음.
○ 여성들은 복장법령에 따라 공적 활동시 반드시 전통의상인 사리 또는 사르와르 카미즈를 입어야 하며, 일반대학에서도 여학생들에게 전통의상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음.
언론
○ 인도의 언론은 스스로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을 쟁취하는데 공헌한 바 크고, 독립이후에는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음.
- 개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이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 신문 등 정기간행물(약 8,000종)은 대부분이 개인소유로 운영되고 있음. 특히 TV 및 라디오는 방대한 지역과 인구의 1/3 이상이 문맹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보도‧교육‧오락 등 일반적인 방송기능은 물론 정부의 대국민 홍보기능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 인도 유일의 공중파 방송인 국영 TV Doordarshan(DD-TV)은 DD National, DD News, DD India(해외방송) 등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민영TV 채널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케이블 TV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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