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진 교수의 과학과 불교사상] 39. 진여 즉 제법
- ‘사과와 달’‘번뇌와 보리’둘 아닌 하나 -
- “현실 떠난 곳에서 진여·열반을 찾지 말라”-
물리학의 전 역사를 단 한 마디로 꿸 수 있는 단어가 있 다면 그것은 통합일 것이다. 여기서 통합이란 그 이전보다 더 종합적으로 자연 세계를 이해하여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서로 연관이 없다고 여겨졌던 잡다한 현상들이 점차적으로 적은 수의 원리에 의해 통일적으로 설명되었던 예는 무수히 많다. 물리 현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그 자체가 대단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현상 간에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여러 현상들을 보다 간단한 통합 원리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과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밤하늘에 떠 있으면서 한 달을 주기로 그 모습이 바뀌는 달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은 초기 조건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이 다를 뿐, 사실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운동이라는 것을 뉴턴은 밝혀내었다.
뉴턴에 의하여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를 공전하는 달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물리학에서의 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가지 중요한 예만을 들어보자.
전자기학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동일한 근원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 전자기학의 기초를 완성한 맥스월은 빛이 바로 전자기 파동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폭과 깊이는 현대물리학에 오면서 더욱 깊고 넓어지게 된다. 20세기에 들어 오면서 우선 파동과 입자에 대한 이해가 종합된다. 전에는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성을 가지며, 전에는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전자나 빛 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본 입자가 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기본 입자에 대해서는 입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고 파동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다. 또한 역으로 입자라고 해도 좋고 파동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언어의 궁색함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우리의 경험에 근거한 언어가 자연 대상을 표현해 내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물리학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이 사건은 현대물리학의 한 기둥인 양자역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현대물리학의 또 다른 기둥인 상대론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그 이전에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이 사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삼으면서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동력학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나, 이러한 개념은 단지 근사적으로만 참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리고 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개념은 중력과 가속도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눈에 비치는 개개의 세계, 우리가 상상하는 개개의 세계는 차별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과의 운동은 달의 운동과 다르고 전기는 자기와 다르고 파동은 입자와 다르고 시간은 공간과 다르며 중력은 가속도와 다르다. 그래서 또한 번뇌는 보리와 다르고 생사는 열반과 다르며 마음은 중생과 다르고 중생은 부처와 다르다. 그러나 자연 세계에 대한 깨우침은 사과의 운동과 달의 운동을, 전기와 자기를, 파동과 입자를, 시간과 공간을, 중력과 가속도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는 세계가 오직 연기요 공이어서 움직이지 않는 단 하나의 근본이 있을 뿐이지만 그 현현함에 있어 개별 세계의 차별성이 드러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일이다. 그래서 또한 부처님은 번뇌와 보리가 하나요 생사와 열반이 하나며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고 하셨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장엄한 화합이다. 그리고 그 이상을 현실을 떠난 곳에서 찾지 말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당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발디디고 서 있는 현실 속에서 찾는 진여의 세계, 그래서 제법이 진여와 상즉하는 그 세계가 바로 대승의 세계일 것이다.
글: 양형진<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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