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과 분명한 앎
알아차림(sati)과 분명한 앎(sampajana)
위빠사나 명상수행의 경전적 근거는 『염처경(念處經)』이다. 여기서 염처란 '알아차림의 확립(satipatthana)'으로 번역된다. 어원적으로 보면 'sati'는 '알아차림'으로 'patthana'는 '확립'에 해당된다. 다시 확립으로 번역되는 'patthana'는 '다가가다'는 의미의 'pa'와 장소를 의미하는 'sthana'가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의 확립(念處)이란 몸(身), 느낌(受), 마음(心), 현상(法)과 같은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 장소에 다가가서 '머물다'는 의미가 된다. 아...비담마론서에서는 염처를 알아차려서 머물다는 의미로서 '염주(念住)'라고도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 대상에 다가가서 어떻게 머물 것인가? 『염처경』에서는 이것을 '열렬함', '분명한 앎', '알아차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고 설한다. 열렬함이란 정진에 대한 열정, 부지런함을 말한다. 분명함 앎은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올바른 통찰로서 집착을 방지한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음을 뜻한다. 현재에 직면하여, 과거의 흔적이나 미래의 바람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명상수행이다.
여기서 알아차림[念, sati]과 바른 이해로서 분명한 앎[知, sampajana]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일은 필요하다. 이들은 쌍둥이처럼 함께 매우 자주 설하여지고 있다. 먼저 sati를 보면, 한역에서는 '현재에 마음을 두다'는 의미에서 '염(念)'이라고 번역을 했다. 사띠의 어원적 의미가 '잊지 않고 기억하다'는 범어 'smrti'와 동의어이다.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다'는 용례에서 보듯이, 기억하다는 念이란 번역은 좋은 번역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염이란 낱말은 일반적으로 '생각'이라는 분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많아, 사띠의 본래적인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sati의 한글번역이 새롭게 이루어지고, 그 적절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 sati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문제가 많다. 예를 들면 어깨라는 장소에로 다가가서 그 특정한 느낌을 '포착'하는 일은 '알아차림'의 역할이다. 이때 이런 자각현상을 '느낌의 마음챙김'이나,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수행자와 지도자에게 관찰의 대상이 느낌인지 마음인지를 혼돈하게 만든다. 분명하게 느낌과 마음은 『염처경』에서 중시하는 혼돈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범주의 영역이다.
다음으로 일부 학자들은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잘못된 번역어이다. 이를테면 어깨에서 발생되는 느낌에 대한 자각은 알아차림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 느낌의 유형(즐거움, 혹은 괴로움)이나 그 변화(발생과 소멸)에 대한 앎은 올바른 이해(知)의 영역이다. sampajana에서 'sam'은 함께, 나중에, 이차적으로라는 접두어이고, 'pajana'는 지혜를 의미하는 'panna'와 같은 어근으로서 대상의 전체적인 특성을 이해는 통찰을 의미한다. sati가 순간순간 변화되는 개별 사물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사물의 전체에 관여된 sampajana는 반복적인 알아차림을 통해서 드러난, 고, 무상과 같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방식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그래서 sampajana는 ‘알아차림’이 아닌, ‘분명한 앎’이나 ‘바른 이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사띠와 삼빠잔나는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명상수행의 실질적인 길잡이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열렬한 정진이 없으면 불가능한 점에서 부지런한 정진노력이 필수적인 에너지가 된다. 비유하여 보면,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sati[正念] 곧 알아차림이라면, 그것에 다가가서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서,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 철저한 앎이 발생된다. 이것이 sampajana[正知]이다.
어떤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현재의 알아차림은 그것에 대한 전체적인 바른 이해에 근거한다. 반대로 사물에 대한 전체적인 앎은 개별사물에 대한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언어를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사물에 대한 이해는 먼저 교설을 듣고 그것에 대한 언어를 익히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개념이 확립되면, 그 사물에 대한 개별적 현존을 ‘알아차림’할 수가 있다. 반대로 알아차림은 다시 그 사물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강화시킨다. 이들은 함께 작용한다.
다만 특별하게 『염처경』에서는 그 순서가 먼저 '분명한 앎(正知)'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알아차림(正念)'이 있다. 왜냐하면 분명한 앎은 부처님의 설법에서 비롯된 까닭이다. 하지만 대부분 경전에서는 먼저 '알아차림(正念)'이 있고, 다음에 '분명한 앎(正知)'의 순서로 함께 묶어서 교설된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이며, 직접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이런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 분명한 앎이 생겨난다.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이 결여된 알아차림은 성립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족을 먼저 알아보는 것은 알아차림 이전에, 먼저 가족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런 경우라면 '분명한 앎(正知)'이 있고, 그런 다음에 '올바른 알아차림(正念)'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고 순환적인 관계를 가진다.
- 인경스님 -
출처 : 생활속의 명상도량 광주자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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