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의식의 지도

장백산-1 2011. 6. 17. 21:18
 

의식의 지도1)


신의 관점

세속의 관점

수준

대수의 수치

(깨어남의 정도)

감정

과정

자아

존재

깨달음

700-1000

언어이전

순수의식

항상 존재하는

완전한

평화

600

축복

자각

하나

전부 갖춘

기쁨

540

고요함

거룩함

사랑

자비로운

사랑

500

존경

계시

현명함

의미 있는

이성

400

이해

추상

인정 많은

화목한

포용

350

용서

초월

감화 주는

희망에 찬

자발성

310

낙관

의향

능력이 있는

만족한

중용

250

신뢰

해방

용납하는

가능한

용기

200

긍정

힘을 주는

무관심한

요구가 많은

자존심

175

경멸

과장

복수에 찬

적대의

분노

150

미움

공격

부정하는

실망하는

욕망

125

갈망

구속

징벌의

무서운

두려움

100

근심

물러남

경멸의

비극의 

슬픔

75

후회

낙담

비난하는

절망의

무기력

50

절망

포기

원한을 품음

사악한

죄의식

30

비난

파괴

멸시하는

비참한

수치심

20

굴욕

제거

** 200이하의 수준은 개인이든 사회이든 파괴적인 삶을 뜻하며, 200이상의 수준은 잠재력의 건설적인 표현이다.

 

* 에너지 수준은 곧 사띠(깨어남, 알아차림, 주시, 마음챙김, 깨어있음)의 정도를 말한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에게 깨어있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삶이 달리 보인다. 이는 곧 자신의 뇌에너지수준이기도 하다. 뇌에너지를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수준이 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뇌에너지, 곧 마음을 깨어 있게 해서 보다 높은 수준의 삶을 살게 하고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 이제 자신이 얼마나 사띠하고 사는지 그 수준을 알아보고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은 부단히 마음챙김공부나, 참선, 염불등의 수행을 통해 에너지수준을 높여야 한다...


* 에너지 수준 20 :  수치심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로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을 할 수도 없으니 마지 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수치심은 잔인성의 도구로 쓰이며, 여기에 희생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들 또한 잔인해지는 경우가 있다. 동물학대, 자기들 끼리도 잔인하게 논다.

비판적이고, 피해망상적인 환상을 보기 쉽고, 정신병 환자가 되거나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

‘수치심’이 바탕이 되는 성격의 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환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수치심을 보상하려고 하고, 무엇에 사로잡힌 것 같이 자기 자신을 몰아간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과격한 도덕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적인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여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 시킨다. 연쇄살인자들은 ‘나쁜’ 여자들을 벌하여 성도덕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자신을 정당화시키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잦다.

자만심이나 분노, 죄의식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에너지 수준 30 :  죄의식

자기 연민, 자기 학대, 피해의식에서 생기는 여러 증상들. 무의식적인 죄의식은 정신 이상에 원인이 있는 신체의 질병을 초래하고, 사고를 저지르기 쉽고, 자살을 감행한다.

죄의식에 가득 한 사람들은 종교단체의 선동자들에 의해 강요당하고 조종당하기 쉽다. ‘죄와 구원’을 파는 파렴치한들은 응징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 씌우는 경향이 짙다.


*에너지 수준 50 :  무기력

빈곤, 절망, 자포자기.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살려는 의욕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며, 시선은 더 이상 사물을 쫓지 않고, 주어진 음식도 삼킬 만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 에너지 수준 75 : 슬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 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 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비탄, 공허,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 수준을 지배한다. 실패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만성적인 도박 등으로 돈, 건강, 직장, 친구, 가족,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무기력’의 상태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충격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다. 또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 에너지 수준 100 : 두려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이다.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두려움은 독재자가 민중의 통제를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고, 불안감 조성은 시장을 독점하려는 회사들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언론이나 광고업체들도 두려움을 유도하여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이 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번져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를 유발하고, 만성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두려움은 편집증, 신경증적인 상태로 진전될 수 있고,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의 수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지도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 에너지 수준 125 : 욕망

경제적인 욕구를 위시한 욕망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광범위한 동기로서 작용한다. 광고업자들은 본능적인 욕망을 이용하여 육감적인 유혹을 한다. 목표 달성과 보상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욕망은 우리를 다그친다.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

욕망은 또한 집착의 수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때로는 욕망이 인생 자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성적인 매혹에 대한 욕구는 화장과 패션 산업의 번영을 불러 왔다.

욕망이란 축적이나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욕망이란 언제나 계속되는 에너지 장이기 때문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를 채우고 나면 다른 무엇인가를 또 채우고 싶어진다.

TV는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만든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성취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설 수 있다. 욕망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 높은 수준으로 뛰어오르는 도약대가 될 수 있다.


*에너지 수준 150 : 분노

분노는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수준 자체는 죽음의 주위에서 맴도는 단계에서 훨씬 벗어난 상태이다.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성급한 사람들, 즉 사소한 일에 과민하고 못된 짓만 하고 잘 싸우고 소송을 일삼는 사람들이 이 분노의 수준에 속한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의 욕망의 에너지 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 에너지 수준 175 : 자존심

미국 국민이 대부분 동경하는 수준이다. 자손심은 수치심, 죄의식, 혹은 두려움에서부터 비약한 상태이다. 빈민가에서 사는 절망의 수준에서 해병대의 자존심으로 비약하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자존심은 좋은 덕목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자존심은 분기점인 200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다.

자존심이 방어적이고 약점 투성이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풀어 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약한 의식수준이다.

자존심은 파벌주의를 초래하며, 그래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러 왔으며, 군대는 지금도 애국심이라는 자존심 아래 서로를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교전쟁, 정치적인 테러리즘, 중동과 중유럽의 광적이고 무서운 역사는 자존심의 대가이고, 사회 전체가 치러야 했던 벌이었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과 부정이다. 이런 특성상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 에너지 수준 200 :  용기

내면의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단계.

이 보다 낮은 수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희망이 없고, 슬프고, 무섭고, 좌절감으로 가득차 보인다. 하지만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 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 준다.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고, 더욱 용기 백배하게 된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인류의 전체적인 의식 수준은 오랫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20년전부터 204의 수치로 괄목할 만한 비약을 보여주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 에너지 수준 250 :  중용

250 이하의 수준에서는 사물을 이원적이고 융통성 없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 때문에 흑과 백으로 분명히 가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동양무술에서도 유연하지 않은 동작은 큰 약점으로 취급된다. 구부릴 줄 모르는 완고함은 그만큼 부러지기가 쉬운 것이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반대와 장애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능력을 갖게 해 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이 직장에 못 들어가면 다른 직장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이 단계는 내면의 자신을 신뢰하는 출발점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쉽게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다.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는 일도 없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인생이 어찌 굴러가든 근본적인 수용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250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좋다.

함께 지내기 쉽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대립이나 경쟁심리, 죄책감 등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는. ‘중용’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다.


* 에너지 수준 310 :  자발성

매우 긍정적인 이 수준의 에너지는 더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한 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용’의 단계는 직장의 일이 적절하게 굴러가는 수준이지만, ‘자발성’의 단계는 주어진 과제가 훌륭하게 이루어지고 성공의 결실을 맺는 수준이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200이하의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하게 닫혀 있지만, 31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하고, 사회적·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른다. ‘자발성’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실직을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려하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사회의 선에 이바지한다. 그들은 또한 내면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이 수준에 이르면 자긍심이 높고, 이것은 사회적인 인정, 존중, 또는 보상 등에서 오는 반응에 의해 항상 보강된다. ‘자발성’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기꺼이 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이고 사회에 기여한다. 곤경으로부터의 회복 능력,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수준으로 향상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학생들이며 또 쉽게 가르칠 수 있어어서, 사회의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된다.


*에너지 수준 350 : 포용

이 수준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고 원천이 된다는 이해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이하의 사람들은 무력하며,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의 ‘밖’에 있다고 믿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지에서 그들은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포용’이란 무기력의 한 형태인 무저항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포용’이란 슬프고 기쁜 인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지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포용하는 마음은 감정적인 온화함을 가져오고, 부정의 단계를 벗어나 보고 느끼는 능력을 넓혀 준다. 그들은 이제 사물을 오해나 왜곡의 감정 없이 볼 수 있다. 경험의 의의를 깊게 이해함으로써 결국 사물에 대해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포용’이란 균형, 조화, 지나치지 않음을 말한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목표보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항상 중요하고, 자기 훈련과 일의 숙달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

‘포용’의 수준에 이르면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고,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히기 쉬운 반면,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차별과 편협을 초월한다. 평등이란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눈을 뜸으로써, 거부하기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에너지 수준 400 : 이성

이 수준에 이르면 이보다 하위 수준의 감정단계를 벗어남으로써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 준다. 관계의 미묘함, 점진적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같은 상징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 의학, 그리고 개념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차 증가되는 것도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 400수준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노벨상 수상자, 위대한 지도자, 대법원 판사 들이 이 수준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이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수준의 결점은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상에 대한 객관적·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고, 개념과 이론의 탐닉에 의해 본질의 중요성을 찾지 못하고 지식 자체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통찰력이 부족하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은 광범위한 지식과 문헌을 생산해 내지만, 방대한 자료와 결론 사이의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철학 이론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지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 사회에서 이성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흔치 않는 일이다.


*에너지 수준 500 : 사랑

500의 에너지 수준은 조건 없고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에의 눈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를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핌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도 아니고, 표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 과정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이라 불리는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사랑의 느낌을 가지면 뇌에서도 엔돌핀이 분비된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랑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을 수 없기에 ‘너와 나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 사랑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공격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그것을 녹여 버린다.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에너지 수준 540 :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변화에 의해서 오는 갑작스런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딘가에 근원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매 순간마다 솟구치는 것이다.

이 에너지장의 특징은 계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 상태이다.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망선고를 듣고도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임사체험) 그 경험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은 540~600의 에너지 수준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 에너지 수준 600 : 평화

이 수준은 천망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아주 드문 현상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나, 또 특별한 관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복의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세상일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고, 따라서 범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확연히 드러나진 않지만 인류의 개선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이들은 성인의 조건을 다 갖추고 형식을 초월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발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인데도, 세상 전체가 시간과 공간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마치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춤을 계속 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 무엇도 개념화시키는 일이 없이 절대의 침묵에 잠겨 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사람이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풍경과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 에너지 수준 700~1000 : 깨달음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단계로서,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군중들이 추종하고 따르며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 수준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다.

심오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정신을 앙양하고, 인간성의 자각에 눈뜨도록 부추킨다. 육신이 ‘나’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서, 운명이라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육신이란 마음의 창문을 통한 의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사 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이 단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의 수준이다. 의식의 분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간다. 붓다, 예수, 크리슈나 등.





1) 󰡔의식의 혁명󰡕 데이비드 호킨스, 한문화. 참조


출처 : 옥련암
글쓴이 : 산빛노을(원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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