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마음 162
# 다음 글은 [불교와 문화]라는 월간지의 2006년 8월호에 실린 것이다.
< 수행자라면 태교를 어떻게 해야 하나 >
--오직 선한 조건을 만들 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부모와 자식의 만남은 조건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각자가 심어놓은 원인들이 짜깁기하듯 어우러져 부모와 자식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일대사 인연이다. 선한 조건을 만들었으면 선한 인연을 만나고 선하지 않은 조건을 만들었으면 선하지 않은 환경에서 서로가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 순간 파장이 맞아서 똑 떨어지는 순간 부모자식의 관계로 또 하나의 일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생명이 나에게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데 나는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부모들은 대개 이런 배려에서 태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탐심 덩어리다. 내 자식만큼은 훌륭하게 키워야한다고 분수에 넘치는 교육을 하는가 하면 자식을 통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는 어리석은 부모도 많다. 또 자식을 자기의 것 혹은 자신의 분신으로 알아 자기 방식을 강요한다. 이런 마음에서 부모들은 태교조차도 탐심으로 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 원인과 결과, 조건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으로라도 이해한다면 자기 각본대로 자식이 살아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아이의 입장에서도 역시 수많은 세월을 두고 쌓아온 선업과 불선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과보심(果報心)을 가지고 불만족스러운 새 삶을 시작하여야 한다. 이런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설계도를 아이에게 그려 넣을 때 인생의 번뇌는 시작된다. 부처님은 그것을 고(苦, 불만족, dukha)라 하였다. 애초부터 인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도록 되어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우리의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처럼 힘들게 태어난 한 생명을 귀하게 받아들여 그의 타고난 성품을 인정하고 편안한 파장을 보내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너도 힘들겠구나” 하며 받아들이면 모두가 편안해진다. 이것이 선업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의 교류는 이미 태교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태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조건이란 무엇인가. 미얀마에서는 큰 스님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
“죽어서 남는 것은 오직 선업과 불선업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가야 할 선업은 관용, 지계, 수행이다”
이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기도 한데 스승들은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항상 강조하며 수행자들에게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계율을 지키며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관용은 보시(報施)의 다른 말이다. 보시가 좀 더 적극적이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관용(寬容)은 주어진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관용의 마음이 선행하여야 남의 사정도 알아주고 보시도 한다. 주어진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남을 편하게 할 줄도 안다. 마음을 꽉 닫아버리면 자신 뿐 아니라 남에게도 자비를 보낼 줄 모른다.
또한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보통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세속 5계를 의미하지만 사실 수행만 잘 하면 그것 자체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고 스승들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수행만 잘하면 관용, 보시의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수행을 하면 그 순간 탐진치가 끊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탐진치가 끊어진 자리에는 그 반대의 개념인 관용, 자애, 지혜가 들어온다. 그러므로 수행을 생활화한다면 이미 계율은 지켜진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켜지는 계율에는 탐심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관용, 보시의 마음이기도 하다.
수행은 꼭 좌선을 하거나 절에 들어가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념처경(大念處經)에 보면 행주좌와 모두가 수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걸을 때, 밥 먹을 때, 망상할 때, 화낼 때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수행이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sati, 사띠)이다. 무엇을 하든 그 순간 알아차림이 있으면 바로 마음이 평온해지고 이런 평온함을 유지될 때 선한 조건이 만들어진다. 예전과 달리 요즘 젊은 산모들은 많은 정성을 들여 태교를 하고 있는데 이 때 수행자라면, “응, 내가 지금 좋은 아기이기를 바라고 있구나” 하고 그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그 순간은 탐심이 없는 청정하고도 편안한 파장을 아기에게 보낼 수 있다. 또 “이 아이가 부모의 나쁜 점을 타고나면 어쩔까”: 하는 근심이 생긴다면 그냥 “ 내가 지금 근심하고 있네!” 하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아기에게 나쁜 파장이 가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선한 조건을 만드는 방법이다. 뿐만 아니다. 아기의 발길질이 뱃속에서 느껴질 때는 그 느낌이 있는 줄 알고 그것 때문에 가슴의 두근거림이 있었으면 가슴의 느낌이 있는 줄 아는 것, 그것이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이고 바로 수행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현상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자연스레 뱃속의 아이도 평화로워진다.
동류(同類)는 동류를 따르고 아닌 것은 반발한다는 원리가 있다. 항상 이렇게 선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면 건강하고 지혜로운 자식이 올 가능성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부모에게도 이런 마음가짐을 권하고 싶다. 미리부터 선한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어른들은 결혼을 앞둔 딸아이에게 몸과 마음가짐을 정결히 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던 것 같다. 특히 뱃속의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특이한 교감이 오고가기 때문에 엄마의 마음 상태와 직결된다고 한다. 엄마가 편안하면 아기도 편안하고 엄마가 불안하면 아기도 불안하다고 한다. 엄마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은 태아에게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엄마의 편안한 마음가짐은 아기가 태어나서는 물론 성장하여서도 평생을 지배하게 된다. 엄마로부터 배운 것이 그대로 몸과 마음에 배어 자기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얀마 스승들에 의하면, 이렇게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하고 지혜롭다고 한다. 심지어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는 아이들은 학습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할 일은 오직 선한 조건을 만드는 것밖에 없다. 이는 태교를 하는 산모뿐만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 나아가 모든 수행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스스로 수행을 해서 “그렇구나” 하고 관용의 마음을 키우면 비록 현재는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그야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바, 번뇌를 번뇌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선한 마음을 유지하면 다음을 위한 새로운 선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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