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경계[無境界]- 켄 윌버 譯 김철수 No Boundary Ken Wilber
대립對立을 만들어 낸 것은 경계선 자체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問題는 경계境界의 문제이며, 경계가 만들어낸 대립의 문제라는 것..이것의 해결책으로 대립 중 어느 한쪽을 근절시키려는 틀에 박힌 시도였다.
악惡을 전멸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선악善惡의 문제를 다루며, 철학에서는 개념적槪念的 대립의 문제를 양극 중 하나를 내던지거나 다른 것에 환원시키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유물론唯物論자는 마음을 물질로 환원시키려 하고, 유심론唯心論 자는 물질을 마음에 환원 시키려고 노력한다. 일원론자는 다원성을 통일성에 환원시키려 하고, 다원론자는 통일성을 다원성으로 설명하려고 애쓴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경계境界를 실.재.하.는.것으로 받아들이고, 경계境界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을 실재實在로 다루려고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경계 자체의 존재를 결코 의문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대립對立이란 영원히 분리分離된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다음과 같은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아무런 경고나 그럴만한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갑자기 나는 붉은 빛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았다. 한순간 저 거대한 도시 어딘가에서 엄청나게 큰불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나는 그 불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았다. 그러자 곧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적 광명光明과 더불어 엄청난 기쁨과 환희가 밀 려 왔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우주가 죽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현존[現存 Presence]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 의 의식이 되었다.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내가 그 당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의식意識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존재임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모두의 선善을 위해 함께 협력한다는 것, 모든 세계의 근본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 긴 안목에서 볼 때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적 으로 확실하다는 것. 우주의 질서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았다. [R.M. 버크 加]
◇.길가의 먼지와 돌들이 황금처럼 반짝거렸다. 처음 보았을 땐, 여러 문들은 세상의 끝이었다. 그 문 하나를 통해 초록색 나무들을 보자, 그 나무들은 나를 도취시키고 황홀케 하였다. 길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모두가 움직이는 보석이었다.
길들은 나의 것이었으며 사원도 사람도 나의 것이었다. 하늘도 나의 것, 해와 달과 별들, 또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었다. 나만이 그것을 보고 즐기는 유일한 존재였다. 내가 곧 보물이었으며 그것들의 소유자였다. [토마스 트래헌 英]
위와 같이 오목面을 나타내는 선線을 그어보자. 똑같은 하나의 선線이 볼록面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이야 말로 도가道家의 현자 노자老子가
“모든 대립은 상호적相互的으로 동시同時에 발생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 선線은 오목면과 볼록면을 구분 짓기는커녕, 오목면의 외선外線은 볼록면의 내선內線 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은 다른 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대립물은 함께 생겨난다. 오목면을 어떻게 그리던지 그 한 개의 선線이 또한 볼록면을 그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線은 境界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논리적인 것이든 선線은 나누고 구분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結合시킨다. 경계境界는 순전히 환상(幻想)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는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척만 할 뿐이다. 현실세계에서 선은 있지만 그 어떤 실질적인 경계境界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경계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해안선, 지평선, 피부표면 같은 자연의 선線을 따르거나 정신적인선線<관념, 개념>을 구축하여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분류하고 나눈다. 분류의 안과 밖, 바위와 바위 아닌 것, 장애자와 비장애자, 즐거운 것과 즐거움이 아닌 것, 큰 것과 큰 것이 아닌 것의 차이점을 인식하도록 배운다.
이 시점에서 선線은 경계境界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명백히 드러난 '차이점은 인식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통일성(統一性)을 망각忘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부류部類[class]의 안과 밖에 이름을 붙이고 말에 상징성을 부여해 감에 따라 더욱 촉진된다.
동일同一한 부류의 안쪽에 적용하는 ‘빛’ ‘위’ ‘즐거움’ 과 같은 단어單語는 그 바깥에 적용되는 ‘어둠’ ‘아래’ ‘고통’ 과 같은 단어로 대립의 상징물象徵物을 독립적으로 분리 分離해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즐거움을 원한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문장에서는 즐거움의 필수적인 대립對立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실세계에서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과 떼어 낼 수 없는 데도 단어單語에 의하면 즐거움과 고통을 분리시킬 수 있다.
바로 이 시점視點에서 즐거움과 고통 사이의 선線은 경계가 되고 그 둘이 단절斷切되어 있다는 환상幻想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대립對立은 그저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忘却한 채, 서로 다른 과정이 존재한다고 상정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에서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단일單一한 것이 틀림없는 진실眞實이 모순矛盾으로 시달리게 된다.
불교佛敎에서 법계[法界 Dharmadhatu]의 주요 원리를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부른다.
사事는 사물 사건 실체 형상 대상 과정을, 무無는 없음을, 애碍는 장애 봉쇄 경계 분리를 의미 한다. 따라서 우주 속의 “모든 사물과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무경계이다.”고 번역된다.
사물들 사이에는 실제로 분할하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세계 속의 모든 실체는 다른 모든실체와 상호 침투相互浸透 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선 우주를 거대한 보석의 직물織物로 비유한다.帝網刹海 그곳 에는 보석 한 개의 영상이 모든 보석들에 담기고, 모든 보석의 영상이 개개의 보석에 담 긴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것이다.[一卽一切多卽一]
동양인들에겐, 인간이 만든 경계투성이인 지도 밑에 잠복해 있는 전체성을 시사하는 오직 하나 의 길, 도[道 Tao], 법[法 Dharma]만이 있었다. 동양인은 모든 경계가 환상幻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도地圖와 영토, 경계境界와 실제, 상징象徵과 사실,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을 혼동混同하는 오류를 범犯하지 않았다.
대부분 수세기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어떤 불경佛經을 보아도 이와 유사한 것을 읽게 될 것이다.
겉모습이란 그 자체가 오감과 분별심分別心에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며, 모양 소리 냄세 맛 촉 감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겉모습에 대비對比하고 이름을 비교해서 우리는 이것은 코끼리, 말, 수레, 보행자, 남자, 여자라고 말하거나, 이것은 마음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분별分別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별 <境界>을 실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올바른 지식이다.[능가경楞伽經]
사물事物을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 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기’와 ‘사물화事物化하기’는 우리가 실재를 잡기 위해 던진 경계 라는 그물에 붙인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佛敎에서 실재實在를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계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실체가 단순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난 뒤에 무無라는 순순한 진공眞空, 무분별한 일원론의 혼돈만 남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경계境界들을 마치 삶 자체인 것처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實在란 무경계無境界라고 하는 통찰의 진수眞髓는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예컨대, 시야視野를 예로 들어보자. 자연풍경風景을 죽 훑어 볼 경우, 눈은 홀로 분리된 어떤 단일[單一]한 사물을 보는 것일까? 과연 눈은 한 그루의 나무, 한 개의 파도, 한 마리의 새를 본 적이 있기는 한가? 아니면 나무에 하늘이 더해지고 땅과 풀과 바위와 산에 구름이 더해진 온갖 종류의 변화하는 만화경萬華鏡을 보는가?
지금 이 글의 문장을 읽는 경우만 하더라도, 시야視野 전체에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한 번에 한 단어만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눈은 실제로 읽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 면面의 모든 단어들을 보며, 그에 더해 주변의 배경들, 아마도 손과 팔, 무릎, 책상, 방안의 다른 부분들을 볼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각성(覺性)에는 어떤 분리된 사물도, 경계도 없다. 실제實際로는 단일單一한 실체를 본 적이 결코 없다. 언제나 풍요롭게 짜여진 하나의 장場을 본다. 그것이 당신의 즉각적인 實在의 본질이다. 경계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동양의 모든 현자賢者가 사물은 공空이다. 둘이 아니다<不二>. 상호침투相互浸透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다른 점을 부정하고 개별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온갖 유형의 특징과 표면表面과 선線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의 무봉無縫의 장場으로서 짜여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自己’의 느낌과 외부外部 세계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면의’ 라는 감각과 ‘저 밖에 있는 세계’ 라는 감각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두 감각이 실제로는 하나이자 동일同一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밖에 있는 객관적客觀的 세계世界라고 느끼는 것은 내면內面의 주관적 자기自己가 느끼는 것과 같은 것' 이라는 말이다.*♡*
경험자와 경험된 세계사이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境界를 믿는 데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말이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자신은 소리를 듣는 자이고, 감각을 느끼는 자이며, 광경을 보는 자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처럼 생각된다.
자기 자신을 보여진 사물을 보고 있는 보는 자라거나, 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듣는 자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정말로 지각知覺이 그렇게 복잡한 것일까?
지각과정에서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진 것이라는 세 가지 개별적인 실체가 포함되는 것일까?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 진 것은 모두 한 과정의 세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든 다른 둘이 없이 하나만 존재存在하는 일은 결코 없다. 나머지 없이는 그중 어느 하나도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문제問題는 우리가 단일單一한 작용作用인 본다는 경험에 대하여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진 것’ 이란 세 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전적으로 동의어 반복에 불과하며, 실은 하나 밖에 없는 곳에 세 개의 요인을 도입하는 꼴이 된다.
그런데도 말의 최면에 걸려있는 우리는 '보는 자' 라는 분리된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며, ‘보는 행위’ 라는 과정을 통해서 ‘보는 자’ 는 ‘보여진 것’ 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자랑스럽게 자신을 '보여진 것' 과는 전적으로 분리 된 단지 '보는 자' 라고 가정假定한다. 그렇게 해서 오직 하나로 주어진 우리의 세계는 ‘저 밖에 보여진’ 사물과 심연 深淵을 가로질러 대치對峙하고 있는 ‘내면의 보는 자’로 분리된다.
여기서 과연 경험자가 경험된 것과 전적으로 다른 것인지 듣기부터 살펴보자. 먼저 눈을 감고 주의를 기울여 보라. 새들의 노래 소리, 자동차의 소음, 바람소리 컴퓨터 소리, 아이들 웃음, 귀에 거슬리는 TV의 소리...
그러나 그 모든 소리에 아무리 신중히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소리를 듣는 자는 들을 수 없다.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듣는 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는 자’ 라고 부르도록 배워온 것은 실제로 다만 듣는 경험 자체일 뿐, 누구도 듣기를 듣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는 소리의 흐름만 존재하며, 그 흐름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아무 경계境界도 없다.
어떤 노선사老禪師는 자신의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원寺院의 종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거기에는 종鐘도 없고 나도 없었다. 단지 종소리만 있었을 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그러한 실험을 통해서였다고 전해진다. 듣는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며서, 듣는다고 하는 흐름 자체 이외에 분리된 자기自己나 '듣는 자者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듣는 자를 들으려고 애쓰더라도, 듣게 되는 것은 객관적인 소리들뿐이다. 이 말은 당신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소리들이라는 의미이다.
듣는 자란 한 발 물러서서 듣기를 듣고 있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들리는 소리 모두이다.
이것은 보는 과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공간에 진열된 것처럼,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산의 모양, 저기에는 구름 모양을, 저 아래는 시냇물 을 이루면서 빛과 색체로 음영으로 한없이 풍요로운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모든 광경 중에서 내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여전히 볼 수 없는 한 가지는, 시야視野를 보고 있는 보는 자이다. 보는 자를 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보는 자 없음으로 인해 더욱 곤혹스러워진다. 오랫동안 자신은 광경光景을 보는, 보는 자라고 생각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보는 자를 아무리 찾아 보아도. 나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다.
보는 자를 보려고 고집固執스럽게 지속하더라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진 사물 들 뿐이다. 이것은 ‘보는 자’ 인 내가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 인 내가 지금 나타나 있는 모든 광경과 동일同一한 것이라는 말이다. 소위 '보는 자'란 '보여진 모든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 ‘나무’ 라는 하나의 경험과 ‘나무를 본다’ 는 또 다른 경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단지 나무를 본다는 한가지 경험만 있을 뿐이다. 내가 냄새 맡기를 냄새 맡거나, 맛보기를 맛보지 않는 것과 똑같이, 나는 보기를 보는 것이 아니다.
경험자를 찾으려 할 경우, 또 다른 경험만을 발견하게 되며 주체主體와 객체客體는 언제나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폭로된다. 이러한 사실은 꽤나 안절부절 하게 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볼 경우, 다소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 더 밀어 붙여 보자.
당신은 지금 이점에 관해 생각하면서 이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思考者를 발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나는 혼란스럽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고자가 있는가? 아니면 단지 ‘나는 혼란스럽다’ 라는 생각만 있는가?
분명分明히 현재의 생각만 존재한다.
현재現在 ‘나는 혼란스럽다’ 고 생각하고 있는 당신은 동시에 ‘나는 혼란스럽다’ 라고 생각하는 사고자를 인식하지 않는다.
거기엔 단지 ‘나는 혼란스럽다’ 라는 현재의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결코 현재現在의 생각과 분리된 사고자思考者를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그 둘이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리된 듣는 자, 맛보는 자, 생각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내부에 분리되고 고립된 자기라는 핵심적 존재감이 어쩔수 없이 있을 것이다.
저 밖의 세계와 분리된 자기自己가 있다는 느낌은 여전如前히 존재한다.
내면內面의 자기가 있다는 느낌은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있다. 자기를 보거나, 맛보거나, 들을 수는 없을 지라도 나는 틀림없이 나의 自己를 느낀다.
좋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자기’ 라고 부르는 그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느끼고 있는 느끼는 자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만일 찾아낼 수 있다면, 이번에는 느낌을 느끼고 있는 느끼는 자를 느낄 수 있는가? 이 경우에도 느낌을 갖고 있는 느끼는 자라는 감각은 그 자체가 단지 또 다른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사고자思考者가 단지 현재現在의 사고思考이고, 맛보는 자가 단지 현재現在의 맛인 것과 똑같이 ‘느끼는 자’ 도 현재現在의 느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도 현재現在의 느낌과 분리되어 느끼는 자란 없다. 또한 결코 있어 본 적도 없다.
이렇게 해서, 세계와 떨어져 있는 분리된 자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이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이 분리된 경험자라고 상상해 왔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찾으려는 순간 그것은 경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즉, 과거나 미래를 직접 감각해 본적이 있는가,없는가, 먼저 듣기부터 시작해보자. 잠시 동안 그저 들리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각성 전반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는 소리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 보라. 사람의 얘기소리, 개 짖는 소리, 아이들 노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빗방울 소리, 수도꼭지 물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집이 삐걱대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도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소리들이 현재現在의 소리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과거의 소리도 미래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듣는 유일한 소리는 바로 현재現在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를 듣는 것이 아니며 들을 수도 없다.
모든 소리가 現在의 소리인 것과 똑같이, 모든 맛은 오직 현재의 맛이며, 모든 냄새도 현제現在의 냄새이고, 모든 광경 역시 현재現在의 광경이다.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만지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 직접直接적이고 즉각卽刻적인 각성 속에는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시간이 없다. 1초도 안 될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現在만이 존재할 뿐이다. 직접적인 각성은 모두 무시간無時間적인 각성이다.
자기[眞我]뿐이며 그 하나의 자기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든 육체를 초월해 있는 동일한 나임을 똑같이 직관하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진정한 자기는 마음과 몸을 초월超越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불멸不滅적 존재라는 내적인 느낌을 품고 있다. 자신自身의 비존재를 상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상은 불가능하다. 마음.자아. 몸이 불멸이 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든 연기緣起된 합성물과 마찬가지로 죽을 운명에 처해있다.
그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으며, 그들 중 어떤 것도 영원히 살아남지 못한다. 還生이란 자신의 자아自我가 전생轉生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샹카라[Shankara]가 말한 것처럼, 유일하게 전생하는 것은 오직 초월적 자기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사不死의 초월적 자기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허구虛構의 분리된 自我로 부터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서 “그대가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 는 유명한 역설逆說이 생겨난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은 어제의 자신自身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또한 자신은 1년전 자신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여전히 같은 사람처럼 느낄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당신은 自身이 아니었던 때를 결코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 內面의 어떤 것은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남아있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몸은 분명 1年 전前의 몸과 똑 같지 않다. 또한 오늘의 감각感覺은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다르다. 기억 역시 10年 전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무언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당신도 그 무언가는 변變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무언가는 똑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무엇일까? 1년 전에는 관심도 달랐고 전혀 다른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도 달랐고 생각 역시 달랐다.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지만 당신의 내면內面에 무언가는 그대로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인생人生 초기 10년, 15년 또는 20년을 잊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동일한 나'임 이라는 내적內的 느낌을 느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당신의 내면內面에는 기억이나 생각 마음 몸 경험 환경 느낌 갈등 감각 기분이 아닌 무언가 깊은 내면에 나라는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내면의 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모든 것들이 변했으며 또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시간의 흐름에 간섭 받지 않는 초개인적 주시자注視者이자 초개인적 자기自己이다.
당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20年 전과 동일同一한 사람 <같은 자아나 몸이 아니라, 같은 나임> 이라고 느낀다면<기억, 마음. 몸은 변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200年 전에도 동일한 나임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만일 기억이나 마음, 몸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20年 전이나 200年 전이나 무슨 차이差異가 있겠는가?
합일의식合一意識에는 어떤 경계도 없다. 깨달음은 바로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선명하게 빛을 비춘다.
비유를 들자면 대양大洋의 수많은 파도, 하나하나의 파도는 다른 모든 파도와 분명히 다르다. 해변에 가까운 파도는 강력하고 힘이 있지만 먼 곳의 파도는 약하고 힘이 없다. 그러나 물과 파도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어떤 차이도, 어떤 분리도 없다. [水波不異]
[샹카라Shankara] 그 사람에 의해 획득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황벽黃檗 선사]
[에크하르트 Eckhart]
[크리슈나무르티 Krishnamurti] 진리를 찾는 자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현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우리의 찾음, 우리 자신의 욕망이 발견을 앞질러 방해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찾고 있는 열쇠는 언제나 바로 이 현재경험現在經驗임에도, 우리는 언제나 현재경험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당장해야 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일까? 현재로부터 물러나기를 멈춰야 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완전하게 접촉接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전적으로 핵심에서 빗나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시도試圖가 또 하나의 시도가 아닌가?
무언가를 하려하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든, 그것에는 반드시 어떤 움직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첫 단계에서부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것을 획득하려 하더라도 실제 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합일의식의 가장 큰 역설逆說이다.
마조馬祖道一선사는 이에 대해 퉁명스럽게 말한다. 도道에 있어서는 자신을 수행해야 할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 곳에 수행할 것이 있다면, 그 수행의 완성은 도道의 파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도道에 아무런 수행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명無明상태로 머물게 될 것이다.
기억記憶으로서의 과거와 기대期待로서의 미래가 현재의 사실로 보여질 경우, 이 현재를 가로막은 얇은 판은 붕괴된다. 이 순간을 둘러싸고 있는 境界들이 이 순간으로 녹아들고, 달리 갈 곳 없는' 이 순간' 만이 남는다. 한 노선사老禪師는 이렇게 말했다.
억겁億劫이래 나라는 자기는
브라흐만[Brahman]이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흐만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처럼 보였던 것초차 실제로는 브라흐만의 운동이었다.
지금Now 이외에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최초의 물러남처럼 보였던 것은 실은 지금의 원초적인 움직임이었다.
본증묘수本證妙修.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永遠한 지금只今이 바로 그 움직임이다.
대양大洋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질을 적시며 자유롭게 해변海邊을 넘나든다.
◇ 스코트 워렌[Scott Warren]과 대담 ◇◇◇
-웨렌[Warren]: 순수의식(純粹意識)이란 순수純粹한 공空입니까?
-윌버[Wilber]:
이란 순수한 공空이라고 은유적으로 시사示唆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공空이란 개념이 아니라 단순하고 직접적인 각성覺性입니다.
자, 보세요. 지금 당신은 다양한 색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는 초록이고, 저기 있는 대지는 붉으며, 하늘은 푸릅니다. 당신은 색을 볼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자각自覺 그 자체는 무색無色입니다. 그것은 당신 눈의 투명한 각막과 같습니다. 만일 각막이 붉다면, 붉은 색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이 붉은 색을 볼 수 있는 것은 각막이 ‘붉음 없음‘ 또는 무색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똑같이 당신의 현재의식이 색色을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무색이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신의 현재 의식이 무공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은 시간을 의식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의식은 무시간(無時間)이기 때문입니다.
형체形體를 보는 것은 의식이 무형無形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기본적인 의식, 즉각적인 의식意識<의식의 대상이 아니라>그 자체, 주시注視 하는 각성은 무색. 무형. 무공간. 무시간입니다. 바꿔 말하면, 당신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각성은 한정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형태. 색. 공간. 시간이 없습니다.
이 순간 당신의 의식意識은 순순한 공空이며, 또한 우주전체가 생겨나는 공空입니다.
이 순간 푸른 하늘이 당신의 의식意識 안에 존재합니다. 이 순간 붉은 대지大地가 당신의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이 순간 저 나무의 형상이 당신의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바로 이 순간 시간이 당신의 의식意識 안에서 흘러갑니다.
따라서 이 순간, 유형有形의 세계전체가 당신 자신의 무형無形의 의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공空과 형形은 둘이 아닙니다. 그 둘은 이 순간 속에서 한 가지 맛입니다. 또한 당신 이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 정말입니다. 공空과 의식意識은 동일한 실재實在에 대한 두 개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전체宇宙全體가 순간순간 생겨나는 광대廣大한 개방성開放性과 자유自由입니다. 공空이란 이 순간 당신자신의 원초적 자각自覺입니다.
공空이란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근원적根源的인 영靈 그자체입니다.
우리는 내면內面의 나-나 <마하르쉬가 자각自覺의 원천인 관조자觀照者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개념>를 탐구함으로서 영靈의 진실을 확인합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옳지만, 그 실재를 발견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면內面의 나-나를 따르는 것이지, 생명生命의 織物을 찾아다니면서 객관적인 세계 주위를 내달리는 것으로는 발견發見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표적標的을 빗나갈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한다면 영원히 표적을 빗나갈 것입니다.
─────────────────────────────────── ()()() ───── ♧ 출처: 무경계[無境界]No Boundary [무우수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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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르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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