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생각(生覺)에 대하여

장백산-1 2011. 12. 14. 00:14

 

 


 

 

몇 가지 基本 原則들


내가 ‘作業’을 좋아하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內面으로 들어가서 自身의 幸福을 찾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自己 안에 있는, 變하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 늘 여기 있는, 늘 기다리는  ‘그것’을 

經驗할 수 있도록….

어떤 스승도 必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금껏 기다린 스승은 당신 自身입니다.

당신의 苦痛을 끝낼 수 있는 存在는 당신자신밖에(外部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 마세요”라고 종종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게 眞實한 것이 아니라

당신自身에게 眞實한 것을 찾기 願합니다.

그렇지만 다음의 몇 가지 原則들은 ‘作業’을 始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現實과 다투는 生覺을 알아차리기

우리는 ‘지금 있는 現實’'과 다투는 생각을 믿을 때 苦痛을 받습니다.

마음이 티 없이 맑을 때는 '지금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願하는 것입니다.
現實이 實際와 다르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고양이를 개처럼 짖게 하려고 애쓰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온갖 努力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당신을 올려다보며 울 것입니다. “야옹.”

現實이 實際와 다르기를 바라는 것은 可望 없는 일(事)입니다.

우리는 고양이를 개처럼 짖게 하려고 애쓰며 平生을 헛되이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自細히 觀察해 보면, 우리가 이러한 생각들을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친절해야 해”, “아이들은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해”, “이웃들은 밤에 떠들지 말아야 해”, “식품점 계산대에 늘어선 줄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해”, “남편(아내)은 내 말에 찬성해야 해”, “나는 더 날씬해야 해(더 예뻐야 해, 더 성공해야 해).” 이런 생각들은 現實이 實際와 다르기를 바라는 方式들입니다.

이 말들이 우울하게 들리나요?

맞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苦痛)는 모두 '지금 있는 現實'과 다투는 生覺 때문에 일어납니다.

 

1986년에 '참 現實'로 깨어난 뒤, 사람들은 나를 바람과 친구가 된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살던 바스토우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사막 지대의 작은 읍이었는데, 다들 바람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바람을 견디다 못해 그 곳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바람, 곧 現實과 親舊가 된 까닭은 내게 選澤權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저항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現實과 맞설 때 나는 時間을 백 퍼센트(100%) 잃을 뿐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지금!

 

처음 ‘作業’을 接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現實과 씨름하지 않으면 無氣力해질 것 같아요.

現實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受動的이 될 거예요.

行動할 意欲까지 잃을 거고요.”

 

나는 對答  對身 이렇게 質問합니다.

“당신은 그게 眞實인지 정말로 알 수 있나요?”

예를 들어 당신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일자리를 잃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와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無氣力하게 들리나요?

‘作業’은 당신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生覺하는 일(事)이 일어나야 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은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 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도 그 事實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默認하거나 承認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는 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갈등과 혼란 없이

지켜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병에 걸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 일어날 때 그 마음다툰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그 点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다투곤 합니다. 멈추는 方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있는 現實을 사랑합니다. 내가 靈的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現實과 다투면

나 自身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現實이 '지금 있는 그대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現實과 다투면 긴장하고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便安하거나 自然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現實에 맞서기를 멈출 때 行動은 單純하게, 물 흐르듯이, 친절하게, 두려움 없이 일어납니다.

 

自身의 일(事)에 머물기

 

나는 온 宇宙에서 세 가지 일(事)만을 봅니다 ―

나의 일,

남의 일,

神의 일.

(내게는 ‘神’이라는 말이 ‘現實’을 뜻합니다. 現實은 神입니다. 現實이 다스리고 唯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統制, 당신의 統制, 모든 사람의 統制를 벗어나는 은 무엇이든 神의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스트레스(苦痛)를 받는 까닭은 大部分, 마음 自己의 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너는 職場을 求해야 해,

네가 幸福하기를 바래,

너는 時間에 맞춰 와야 해,

너는 健康해야 해” 라고 생각할 때 나는 남의 일에 干涉하고 있습니다.

地振, 洪水, 戰爭, 혹은 내가 언제 죽을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나는 '神의 '에 干涉하고 있습나다. 내가 마음으로 남의 이나 神의 에 干涉하고 있을 때 分離가 일어납니다.

나는 이 事實을 1986년에 깨달았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어머니의 에 ― 例를 들어 “어머니는 나를 理解해야 해”와 같은 생각으로 ―

干涉할 때 나는 즉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통이나 외로움을 느꼈을 때는 늘

다른 사람의 에 干涉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살고 있고 나도 마음으로 당신의 삶을 살고 있다면,

여기에 있는 나의 삶은 누가 살까요?  우리는 둘 다 거기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남의 에 干涉할 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있습니다. 나 自身에게서 分離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이 왜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最善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으로 包裝해도 그것은 純全한 誤慢이며, 그 結果는 긴장과 걱정, 두려움입니다.

나는 내게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는가? 내가 할 은 이것뿐입니다. 먼저 이 問題를 해결합시다.

남을 위해 남의 問題를 解決하려고 애쓰기 前에….

 

세 가지 일을 充分히 理解하고 自己의 에 머무른다면, 삶은 이제껏 想像하지 못한 方式으로 自由로워 질 것입니다. 혹시 이 다음에 스트레스나 不便한 마음이 느껴지거든, 지금 마음으로 누구의 에 干涉하고

있는지 自身에게 물어 보세요.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 質問을 通해서 自身에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또 이제껏 眞情으로 現存한 적이 없었음을, 마음으로 남의 일(事)을 하며 살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단 남의 에 干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自己의 아름다운 自我'(참 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實踐해 보면, 당신이 해야 할 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당신의 삶은 스스로 完璧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生覺을 理解로 만나기

우리가 믿지만 않으면 생각은 害롭지 않습니다.

苦痛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生覺에 대한 執着입니다. 생각에 執着한다는 것은 그 생각을 眞實하다고 믿고서 調査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執着해 온 생각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생각이 自己라고 말하는 것을 自己라고 믿습니다.

어느 날 나는 숨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숨쉬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놀랍게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實際로는 내가 생각되어지고 있었고, 생각은 個人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오늘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이미 늦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납니다.

구름이 빈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듯, 생각虛空에서 나와 虛空으로 돌아갑니다.

생각들은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 옵니다.

生覺을 眞實이라 믿고 執着하지만 않으면, 생각은 조금도 害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生覺을 統制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생각을 理解로 만납니다. 그러면 생각이 나를 놓아줍니다.

생각은 산들바람이나 나뭇잎,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습니다. 생각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質問을 통해서 생각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빗방울과 다툴 수  있나요?

빗방울은 個人의 것이 아니듯,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괴로운 생각을 理解로 만나면,

다음에 그 생각이 나타날 때는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前에는 惡夢이었던 생각이 이제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다음에 그 생각이 또 나타날 때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예 그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있는 現實'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自身의 이야기를 깨닫기

나는 우리가 眞實이라고 確信하는 생각들, 잇달아 일어나는 생각들‘이야기’라고 부릅니다.

이야기는 過去, 現在, 未來에 對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해야 한다’라거나 ‘…했으면 좋았을 걸’, 또는 ‘그것은 …때문이다’라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들마음속에서 하루에도 數百 번씩 나타납니다 ― 잠에서 깨어 말없이 걸어 나올 때, 웃지 않을 때, 응답전화를 하지 않을 때, 낯선 사람이 미소지을 때,

중요한 편지를 뜯으려 할 때, 가슴에서 뭔지 모를 흥분을 느낄 때, 사장이 당신을 호출할 때, 배우자가 당신에게 어떤 특정한 말투로 얘기할 때.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고 말 하는지, 檢査되거나 調査되지 않은 理論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理論에 불과하다는 事實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예전에 내가 동네 식당에 갔을 때였습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한 여자가 칸막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미소를 지었고, 내가 칸막이로 들어가 문을 닫자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손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참 곱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떠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변기의 앉는 자리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저 여자는 어떻게 받침대에 온통 소변을 묻혔지? 변기 위에 서 있었나?” 그 여자가 실은 남자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자 화장실에서 가성으로 노래하는, 여자 옷을 즐겨 입는 變態性慾者. 그 여자(그 남자)를 뒤쫓아가서 그가 변기를 얼마나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알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변기 받침대를 닦으면서 그에게 속으로 온갖 비난들을 퍼부었습니다. 나중에 변기 물을 내리자, 변기통에서 물이 솟구쳐 받침대 위까지 넘쳐흘렀습니다. 나는 웃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多幸히도 이 때에는 내 이야기(생각들)가 더 앞으로 나아가기 前에 自然스럽게 밖으로 드러났지만,

普通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探究’를 發見하기 前에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멈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은 큰 이야기들로 자랐습니다. 큰 이야기들은 삶에 대한 主要 理論들로 자랐습니다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세상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결국 나는 너무나 두렵고 우울한 나머지

침실을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調査하지 않은 理論으로 지금 일어나는 들을 解析하고 그런 事實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때 당신은

내가 ‘꿈’이라고 부르는 狀態에 빠져 있습니다. 꿈은 괴롭게 바뀔 때가 많고, 때로는 惡夢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그런 理論에 대해 ‘作業’을 함으로써, 그 理論이 眞實한지 試驗해 볼 수 있습니다. ‘作業’을 계속 할수록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줄어듭니다. 그런 이야기가 없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당신의 世界는 얼마나 많은 部分이 調査하지 않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나요?

알지 못합니다, 調査하기 前에는.

 

苦痛 뒤에 있는 生覺을 찾기

이제껏 내가 경험한 ‘스트레스를 주는 생각’들모두 眞實이 아닌 生覺에 執着한 까닭에 일어났습니다. 마음을 不便하게 하는 생각 뒤에는 늘 自己에게 眞實하지 않은 생각이 있습니다.

“바람이 계속 불면 안 된다” “남편은 내 말에 찬성해야 한다”와 같은 생각들----.

우리는 現實과 다투는 生覺각하고,

그 뒤 스트레스를 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 느낌에 따라 行動하며,

그래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最初 原因인 생각을 理解하는 對身 바깥 世界를 바라보며, 스트레스를 주는 느낌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또 일시적인 위안과 스스로 統制하고 있다는 幻想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거나 섹스, 음식, 술, 마약, 돈 등에 期待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苦痛스러운 느낌에 쉽게 휩쓸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주는 느낌은 “당신은 지금 꿈속에 빠져 있어요”라고 말하는

친절한 自鳴鐘 같다는 것을 記憶하는 게 좋습니다.

우울함과 고통, 두려움등의 느낌들은 “지금 당신의 생각을 바라보세요.

당신은 지금 自身에게 眞實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빠져 있어요”라고 말하는 膳物들입니다.

眞實하지 않은 이야기에 따라 살면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自鳴鐘을 尊重하지 않을 때 우리는 自己 바깥을 向함으로써 그런 느낌을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普通은 생각이 떠오르기 前에 느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느낌이 바로, 당신이 생각에 빠져 있음을 깨우쳐 주는 自鳴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作業’을 通해 眞實하지 않은 생각을 調査할 때 마다, 당신은 다시 '本來의 참 自己'로 돌아오게 됩니다.

自身을 本來의 自己가 아닌 다른 存在라고 믿거나, 幸福이 아닌 다른 이야기에 따라 살면

마음에 傷處를 받게 됩니다.

당신이 불 속에 손을 넣을 경우, 다른 사람이 손을 치우라고 말해 주어야 하나요? 당신이 決定해야 하나요? 둘 다 아닙니다. 불에 데자마자 손이 움직입니다. 당신은 손에게 指示할 必要가 없습니다.

손이 스스로 움직입니다.

이처럼, 眞實이 아닌 生覺은 苦痛을 일으킨다는 것을 理解하면,

생각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생각이 있기 前에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생각이 고통을 일으킵니다.

생각이 眞實하지 않음을 깨달으면, 역시 고통이 없습니다.

‘作業’은 이런 식으로 작용합니다. “그 생각生覺할 때 나는 어떻게 反應하는가?”

불 속에 있는 손. “그 생각이 없다면, 나는 누구 인가?”

불길 밖에 있는. 우리는 生覺을 調査하고, 불 속에 있는 손을 느끼고, 自然스럽게 原來 位置로 돌아옵니다. 누구에게서 指示받을 必要가 없습니다. 나중에 그 생각이 다시 올라오면, 마음은 저절로 불에서 떠납니다. 우리는 ‘作業’을 通해서 內面的인 原因과 結果를 理解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苦痛(煩惱)가 스스로 풀리기 始作하고 사라집니다.

 

탐구 (探究)
나는 ‘탐구’를 ‘작업’과 같은 뜻으로 씁니다. ‘탐구’하거나 ‘調査’하는 것은 생각이나 이야기에 對해서 

네 가지 質問을 던지고, 그것을 뒤바꾸는 것입니다(다음 장에서 설명됩니다).

탐구는, 혼돈으로 가득 차 보이는 世上에서, 혼란을 끝내고 內面의 平和를 經驗하는 입니다.

탐구를 通해 우리는 이제껏 찾고자 했던 모든 對答이 늘 恒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탐구는 하나의 技法  以上입니다. 그것은 內面 깊은 곳에 있는 '우리 存在의 참 모습'을 되살립니다.

한동안 탐구를 계속 하면, 탐구는 內面에서 스스로 生命力을 갖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나타날 때마다 탐구도 나타납니다. 生覺과 均衡을 이루는 짝으로서….

당신은 이 內面의 同伴 關係를 通해 明快할 수 있으며, 願하는 대로 自由롭게 살 수 있습니다.

친절하고 열려 있고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귀기울이는 傾聽者로서, 自己 自身에게서 배우는 學生으로서, 怨望하거나 非難하지 않는 善한 친구로서…. 때가 되면 깨달음은 저절로 經驗됩니다. 삶의 方式이 됩니다. 기쁨과 평화는 마음 구석구석에, 모든 關係와 經驗에 自然스럽게, 必緣的으로, 돌이킬 수 없이 스며듭니다. 그 過程은 아주 微妙해서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오직, 前에는 苦痛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