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견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장백산-1 2012. 2. 9. 13:14

 

 

 

견성(見性)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화엄사강원 강주-- 종곡

 

    

 

 

                 견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서문  

                           

이 글은 불교 수행의 목적인 깨달음이 독립된 별도의 선정수행을 거치지 않아도 이치에 대한 이해와 확신만 있으면 견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데 있다. 한국 수행 현실을 돌이켜보더라도 선정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어떠한 깨달음도 있을 수 없다는 독단적이며 근거없는  믿음의 경향이 만연해 있다. 우리 수행이 선정수행 위주의 신비주의에 빠져있어 은둔자적, 현실도피적 경향의 병폐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선정중심적 경향을 제거하면 불교의 본래적 모습이 바로 드러나고 깨우침이 매우 간단해진고 쉬워진다. 곧 깨달음의 실천적 행동적 성격이 유감없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견성문제를 빠른 시간에 해결하고 그 해결된 정신으로 현실세계를 아름답게 가꾸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발전이 있다. 견성이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禪定이다. 이 선정을 닦기 위해서 번잡한 세속을 등지고 오직 수행일념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것이 바로 허망한 세월이며 비 건설적인 세월이다.

 

다음으로는 먼저알고 닦아야한다는 것이다, 무지의 암흑 속에 헤매지 말고 첫째 (내가) 닦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한계범위를 분명히 알아야한다. 그래야 가는 길의 지도가 마련되고 지도가 마련되면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목적지가 저절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지도가 없으면 그냥 암흑 속을 헤매게 된다. 자기가 수행을 하면서 목표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끝없이 헤매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갑갑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견성할 땐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또 신비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명확히 밝히면 수행하는 사람들이 길을 알고 지도를 따라 가게 되므로 이 일이 꼭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견성 할 때 일어나는 신비한 선정현상에 눈이 팔려- 그것이 특이하기 때문에- 자기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을 놓쳐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허둥대고 있다면, 그보다 억울한 시간낭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하나는 오매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로 대표되는 이 선정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이 선정을 통해서 견성에 들어가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이 선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병폐가 더 많다.

 

그러므로 무작정 닦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지도를 가지고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환히 눈에 보듯이 확인하고 닦는다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깨침이 무엇인지 그 한계를 명확히 모르면 신비한 형상들에 잘못 현혹되어 그것이 진리인 줄 착각하여, 일생을 허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글은 이러한 점들을 바로 잡아 보고자 하는 것이며. 4개의 소주제로 구분하여 관점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나누어 설명하다 보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사유, 검토가 가능할 것이다.

 

                   1. 見性이란 무엇인가 

                     

見性이란 自己의 本來性品을 봤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本來性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自由이자 解脫이다. 세상의 모든 觀念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本來性品이라고 하면 무슨 固定된 自己의 本性이 있는 것으로 錯覺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實際로는 그런 것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알아차리는 자 卽  主視하는 主視者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사람은 사물을 보고 들을 때 바라보는 자가 있고 듣는 자가 있다.

 

그런데 그 듣는 내가 없고 보는 내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인식한다. 그러나 자기를 봐도 자기를 인식 할 수 없는 상태), 다시 말해 각자 사람은 自己가 있다. 自己가 있어서 사물을 상대적으로 본다. 나의 입장에서 대상을 본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무시하면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화를 내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주시자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에 한 예 룰 들어보자.

 

육조단경에 1) 있는 육조스님과 신수대사의 이야기를 가지고 한번 살펴보자. 신수대사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내면 된다고 말씀했고, 육조대사는 거울이라는 것이 원래 없는데 무슨 때가 낄 것이 있다고 때를 닦는다고 하는가 하고 반문 하셨다. 즉 육조스님은 한마디로 “마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자아가 없다는 것이요, 자아가 없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마음의 본체를 볼 수 있다고 생각 하지만 자기의 마음 本體를 볼 수는 없다. 마음의 本體는 어떤 形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없는 마음’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實體라고 錯覺하는 虛想이며, 이 虛想을 자신의 마음이라 여길 뿐이다. 예를 들어 보면. 컵을 본다고 할 경우, 이 컵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이 컵을 실제로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착각일 뿐이다, 결코 이 컵의 실체를 볼 수 없다. 이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컵을 보는 순간, 이 컵의 있는 그대로 즉 自然 그대로의 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다. 컵을 보는 순간 自己의 過去 記憶 속에 담아놓았던 情報들이 튀어나와 컵에 덮어씌워놓고, 그 덧칠한 그 모습 卽 마음이 만들어낸 觀念의 虛想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컵의 實體를 보는 것이 아니라 自身에 投影된 컵의 觀念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더 세부적으로 보자), 컵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면 흰색이며 둥글고 손잡이가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에서 흰색이라는 것은, 갓난아이가 그것을 판단 할 수 없다. 갓난 애기들은 흰색과 붉은색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흰색과 붉은색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經驗이 있어야 한다. 흰색이 붉은색과 또는 파란색과는 다르다는 經驗이 있을 때 비로소 흰색을 구분하는 것이지, 그러한 앞선 經驗이 누적되지 못하면, 즉 다시 말해서 머릿속의 腦 細胞에 흰색과 붉은색 등등이, 이전부터 먼저 經驗에 의해서 貯藏되어 있어야, 그 經驗의 情報를 가지고 눈앞에 있는 컵을 區別할 때, 컵의 색깔이 붉은색이나 파란색과는 다른, 흰색이구나 하고 比較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약 비교할 것이 미리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구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컵을 보고, 이 컵은 흰색이구나, 하고 判斷했다면 이것은 지금 컵을 實際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보는 것은 腦細胞 속에 저장된 나의 過去의 經驗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앞에 있는 컵에 덧칠을 하고 그 덧칠한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이므로,, 實際는 腦 속에 있는 自己의 過去情報 卽 觀念을 確認하고 있는 것이지, 눈앞에 있는 컵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을 본다고 하는 것은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만든 허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진실이다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가 모두 마음이 만든 虛想일 뿐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 앞서 거론했던 本性問題를 다시 살펴보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虛象”이면 그것을 보는 우리의 本性自體는 眞實일까? 이는 本性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 本性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느낄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만약 자기가 그것을 느끼고 있다면 그 느낌은 자기가 만든 허상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알아차리고 느끼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虛想이다. 왜냐하면 일단 느껴지고, 알아차려지고, 체험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본성 앞에 나타난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본성자체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체험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무심이라 한 것이다. 무심이란 말 그대로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즉 “없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면 이것을 예를 들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여기에 눈이 있다. 이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눈이 눈 자체를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눈의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거울이 있다. 거울 앞에는 모든 사물이 다 그 거울에 비쳐진다, 그러나 이 거울이 하나 못 비춰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거울이 거울자체를 비춰보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의 구조가 그래서 그렇다. 또 여기에 마음이 있다, 마음은 마음 앞에 나타난 것은 모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못 알아차리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음이 마음 자체를 알아차릴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구조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우리 마음 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본 것이다.

 

그래도 노파심에서 여기에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 왜냐하면 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여의주(마니보주)가 있다 2). 이 여의주는 상상의 구슬이다, 그 모양새는 둥글고 속은 투명하여 너무나 맑아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즉 전혀 색깔이나 불순물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길거리에 내 놓으면 사람들이 걸어가다 발길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투명하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두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맑고 깨끗한 구슬을 가져다가 노란색 보자기에 올려놓으면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여의주는 노란색이야’ 라고 한다. 또 이번에는 빨간색 보자기에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모두 ‘여의주는 빨간색이야’ 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의주 자체에는 색이 없기 때문에 주위의 색깔에 의해서 여의주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의주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여의주 같이 自體의 色이 전혀 없기 때문에 주위의 마음인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에 따라서 색깔도 없고 모양새도 없는 마음이 따라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마음의 本體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체험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느낄 수 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마음의 본모습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눈뜨고 봐라! 이 알 수 없고 체험도 안 되는 이것이 이렇게 신령스럽고 환하게 행주좌와 일상생활 속에서 뚜렷이 作用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것이 왜 없겠는가! 그러므로 없다는 말이 아니니. 이것을 찾아야한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그렇다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이 말뜻은 수행을 통해 그 근처까지는 도달할 수 있게 할지언정 직접 그 자리는 결코 수행이 도달시켜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면 그냥 수고 만 할뿐이다. 이것은 智慧로 깨치는 것이지 수행을 통해 점차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친다!”는 이 말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錯覺하고는 이것도 삼매에서 체험했던 것처럼 명징하고 고요한 그런 것이겠지 하고 수행을 통해 그것을 體驗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것은 ‘체험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正確히 認知해야 된다. 깨친다는 이 말뜻은 이 이치(본성)를 믿고 확신 한다는 뜻이다. 바로 확신하면 눈앞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예문을 가지고 좀 더 관찰 해 보자.

                 

               (ㄱ). 본성은 체험되는 것이 아닌 이유

 

本性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여기 꽃이 있다, 이 꽃의 본래모습(본성)은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 우 리 인간이 보는 꽃의 모습은 인간의 잣대로 보는 것이다. 색깔은 붉고 꽃잎은 아름답게 펼쳐져있고 꽃의 향기는 매혹적이다. 이렇게 보는 관점은 인간의 시각이다. 그러면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 즉 박쥐, 붕어, 개구리, 메뚜기, 쥐벼룩도 우리 인간처럼 꽃을 아름답게 볼까? 절대 아니다! 만약 그들도 우리 인간처럼 똑같이 느끼고 본다면 분명코 그들도 꽃을 꺾어다가 자신의 보금자리 옆에다 갖다놓고 또 그들의 집을 장식 할 것이다.

 

그러나 쥐벼룩이 꽃을 아름답게 장식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각이 우리와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꽃의 본 모습을 보려면 인간의 시각도 버리고 쥐벼룩의 시각도 버려야 한다. 모두가  自己 式 視覺이므로 진정한 꽃의,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는 완전히 배치된 것이다. 그러면 꽃의 진정한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렇다, 인간의 시각도 버리고 쥐벼룩의 시각도 버렸을 때 비로소 자연 그대로의 꽃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꽃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의 참 모습은 표현 할 길이 없다. 만약 표현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반드시 자기의 人爲的 視覺이 튀어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즉 쥐벼룩이 표현하면 쥐벼룩 적 시각이 나올 것이요, 메뚜기가 표현하면 메뚜기 식 시각이 나온다. 그것들의 시각은 그들의 것이므로 또 인간의 시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 까닭에 만약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이것을 제3의 판단자인 신에게 물어 봐야 할텐데, 과연 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아마,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오고감이 없고, 생사가 없고, 미추가 없는 자리)은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틀려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려고 한다면, 즉시 어떠한 인위적인 시각도 모두 배제 해 버려야 하고, 그렇게 하여 모두 배제하여 해체한 그 상태가 바로 완전한 진리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完壁한 眞理를 알려고 하면 이것은 智慧의 일이므로, 이러한 事實을 智慧가 백퍼센트 確信을 가지고 깨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길의 核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꽃의 본래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은 그냥 텅 비어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인위적 시각이 깨졌을 때 나타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서, 꽃과 마찬가지로, 꽃이 實際가 아니듯 우리의 몸도 이 꽃과 같아서 實際가 아니다, 그런데 내 몸이 實際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이 몸을 나라고 錯覺했던 오랜 執着에 의한 誤解에서 시작된 것이다. 無始以來로부터 이 몸을 ‘나’ 인 것처럼 여기고 조금도 의심 없이 살아온 세월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오해가 꺼지면, 즉시 내 몸을 묶고 있던 집착의 밧줄이 끊어지게 되므로, 마치 거짓말처럼 내 몸이 비었음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이 몸도 집착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든, 몸이든, 어떠한 사물이든, 이러한 빈 상태가 반드시 확인 돼야한다. 왜냐하면 나의 錯覺인 人間的 視覺이 깨져야 참을 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비록 참은, 보이지 않는 속성이 있지만  그것은 제일 가깝게 확인 할 수 있는 증거가 이것이므로 반드시 깨진 모습이 확인되면, 그 즉시 그 裏面에 있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그 본래자리를 이 지혜가 발동하여 마음에 確信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혜이어야 하는가 하면, 이것은 체험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屬性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現實이란 實際 하지 않는 것으로서, 나의 觀念이 만든 虛想이라는 사실이다. 實際의 모습은 우리의 認識 體系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이 世界는 우리의 業이 만든 假想世界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이 世上은 無常하여 꿈이며 허상이라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게 되면, 그 즉시 묶임에서 벗어난 自由를 느끼게 된다. 왜 자유가 느껴지는가 하면, 이때까진, 現實이 實際 한다고 믿었기에 갖가지 責任을 지려고 했는데 이젠 그 責任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단번에 마음이 가벼워져 自由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二律背反的 이지만, 現實이 實際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이 現實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정리하면 --

처음에는 空(텅 빔)을 터득하고, 그 다음에는 有(있음)로 돌아와야 한다. 즉 平常心으로 돌아와서 現實을 아름답게 가꿔야한다. 그와 동시에  이젠 두 번 다시 그 空에 미련을 가지고 그것에 聯緣해선 안 된다. 한번 그 空을 강하게 확신하고 나면 되는 것이지, 그 空을 또 보고 또 보며 반복해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허송세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백번 보던 한번 보던 같은 것이다. 꼭 백번을 봐야 確信이 생기겠는가! 智慧가 있으면 한번만 봐도 確信이 생기는 것이니, 이 確信을 가지고 다시 平常生活로 돌아와서 이 有(있음)의 세계인 惡濁惡世를 굴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절대 이 오탁악세(욕망과 두려움과 고통)를 버리고 그 어떤 절대의 세계를 구한다고 한다면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므로

이왕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면 비록 이것이 꿈일 지라도 이 오탁악세를 자유롭고 또 아름답게 가꾸면서 살다 가야하지 않겠는가! 여태까진 이것에 묶여 그것에 책임지려는 책임감에 갖가지 번뇌에 구속됐지만, 이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비록 가짜 이지만 우리 눈에는 實際처럼 보이도록 構成된 이 現實을, 마치 實際 인 냥 속아 주면서 멋있게 한바탕 꿈을 꾸어 보는 것도,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이것이 자유인의 삶이리라.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여기에 옛 선사들의 이야기를 한번보자.

             

                (ㄴ)  견성의(구체적)상태

                 

옛날에 주금강(뒤의 덕산스님)이 3), 등에 금강경 논서를 짊어지고 천하를 얕보며 다니다가, 그 당시 유명했던 용담선사를 찾아가 법거량을 하며 문답을 했지만 결국 계합되지 못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 용담선사와 작별하고 문밖을 나서는데, 밖이 어두워 발밑이 보이질 않자 불안해져 용담선사에게 “바깥이 너무 어둡습니다!”라도 하자. 용담선사가 촛불을 들고 나왔다. 촛불 덕에 순간적으로 문밖이 환하게 밝아지고 주금강은 눈앞이 훤히 보이자 안심했다. 즉 마루가 보이고 신발이 보이고 어디가 깊은지 어디가 낮은지 또 어디가 위험한지 모두가 한눈에 보이니까 안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용담선사는 훅- 하고  촛불을 꺼버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위는 암흑천지가 되어 조금 전까지 보이던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다시 어둠속으로 묻혀 버렸다. 주금강은 그 순간 깨치고 말았다. 자- 여기에서 주금강은 무엇을 깨쳤을까? 이것을 살펴보자, 그것은 바로 一切가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주위의 지형과 사물은 촛불이 환하게 밝혀졌건 말건 어제도 오늘도 항상 변함없이 자연그대로 있건만, 이것을 나의 觀点으로 再解析 하여 그것에 대해서 불안 하느니 편안하느니 하고 分別 했던 것이다. 즉 이 몸을 내 것으로 錯覺하는 내 中心的인 觀点에서 이것이 나에게 利益이 되는가? 損害가 되는가의 判斷 基準으로 事物을 分別했던 것이다. 卽 天然 그대로의 自然을 나의 人爲的인 視覺을 通해서 再解析해서 오염시켰던 것이다.

      

自然 그대로의 모습은 우리의 視覺과 體驗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에 우리의 認識體系를 들이대면 그 즉시 자연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남는 것은 오직 내가 만든 변형된 우리의 세계가 그 앞에 나타나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해, 본래자리는 그냥 그대로 있는데 人間이 自身의 過去 情報에 의한 잘못된 視覺과 잣대를 들이 댄 것이다 .      

즉 내 本性자리는 오고감이 없으며 불안과 편안이란 두 가지가 모습이 없는, 그냥 如如한 自然그대로 인데 내가 나의 기준잣대를 들이대어 불안하다 편안하다 하고 妄念을 일으켰다는 것을 그 瞬間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 여기에서 살펴보면 과연 이렇게 理解했다고 해서 깨쳐지는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그 理解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그날따라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알아차림이, 다른 날 과는 전혀 다르게, 완벽하고 뚜렷하게 그것이 알아졌고 그 완벽해진 앎이 활짝 열어놓은 마음의 문을 따라 확연한 체험으로 온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깨침의 끝이다. “확신하는 것” 이것이 전부일 뿐이다. 이렇게 확신이 되면 그 즉시 눈앞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 아래의 글들은 이것을 보충설명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細部的으로 한번 보자 이 體驗이 갑자기 온 것 같지만 절대 갑자기 오는 법이 없다. 오래전부터 깨달음에 대한 確信 정도가 점차 上昇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이라는 특별한 계기를 만나 그것이 폭발 했던 것이다. 자세히 보면 오늘 이전에도 ‘주금강’은 금강경을 수없이 읽고 그 내용에 대해서 완벽 하리만큼 이해도가 높아있다. 그렇지만 완전하지 못한 것은 構體的인 體驗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이 단지 자기 견해에 불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에 비로소 그 이해가, 이것을 계기로 완벽해졌고, 그러다보니 觀点의 轉換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前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그 裏面의 모습을 오늘 봤던 것이다. 여태까진 자존심 명예심 하는 이 쪽 세상의 모습만 자신의 전 價値觀으로 여기고 전력투구하면서 살았는데, 오늘 그것의 뒷면에 있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볼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 裏面의 모습은 평소에는 닫혀있어서 전혀 엿볼 수 가 없었던 것으로 그것은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價値觀이란 어떻게 하면 명예를 얻어 남에게 認定받고 살까 하는 것 이었기에 그것과 反對인 그 裏面은 완전히 닫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을 180도 바꿔 볼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있었기에  단번에 그 裏面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生覺 바꿔먹기 라는 것이다. 이것은 生覺해 보면 쉬울 것 같아도 엄청 어려운 것이다. 生覺이라는 것이 쉽게 바뀌질 않기 때문이다. 世上을 다른 角度에서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되면 쉽게 그 裏面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다른 角度에서 보지 못했던 것은, 自己의 智慧가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裏面에 대한 關心度가 낮아서 그러한 것이다. 생전 한 번도 生覺해 보질 않았고, 또 그런 노력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계기가 주어지면 개중에는 生覺을 轉換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生覺을 바꿔놓을 수 있는 그 確信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 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천문학자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 내용인즉 다음날 오전 (8시)에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접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오전 8시면 그를 포함한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담한 심정으로 문밖을 나와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인다. 그러다가 문득 초등하교 정문 앞을 지날 때, 막 수업을 끝낸 어린학생들이 깔깔거리고 웃고 떠들며 쏟아져 나오는 그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평소와는 달리 그런 모습들이 조금도 생동감으로 보이지 않고 아무의미도 없는 어두운 암흑과 같은 회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저 어린 학생들 -마치 아침이슬을 머금은 새싹 같은 것들-이 내일이면 모두 죽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아는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회색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確信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은 비유이지만 이와 똑같이 이러한 믿음과 확신이 마음속에 오면 어떤 특별하고 신비로운 경지 속에 잠겨 있지 않아도, 눈앞에 보이는 世上에 대한 視覺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특수한 수행을 쌓고 특별한 경지를 얻어야 시각이 바뀌는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生覺해 보라, 그 초등생의 모습들이 암울하게 보이는 것은 어떤 특별한 수행을 쌓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수행을 쌓지 않더라도 來日 終末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變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 單純할 뿐이다. 그리고 또, 만약 종말의 그 사실을 믿었다면 내일 먹을 라면을 사기위해 상점에 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상점에 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이 사실을 충분히 믿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사실을 충분히 믿었다면 절대 내일 먹기 위해 라면을 사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이와 같은 강한 믿음이 있다면 世上을 對하는 觀点이 極的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一切가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强한 確信과 믿음이 있는데 왜 열리지 않겠는가! 당연히 마음은 열린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믿지 못해서 그렇지 진정코 이것을 믿는다면, 여태까지 닫아뒀던, 나를 지키려는 이 마음의문이 저절로 열려재껴지는 것이다.

 

끝으로 確信이 무엇인지 또 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섭대승론의 비유가 있다. “옛날 어느 한 사람이 길을 가는데 갑자기 큰 뱀을 만났다, 깜짝 놀라 펄쩍뛰어 그 자리를 벗어난 후 놀란 가슴을 누르고 자기를 놀라게 한 그 뱀을 자세히 관찰하자 놀랍게도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 그 순간 그것이 새끼줄 인줄 알고 나니 두려움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고 하셨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깨침의 核心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 卽 事物의 實像을 正確히 아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선정수행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事物의 理致를 正確히 꿰뚫어 볼 수 있는 智慧가 核心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이란 自己의 錯覺이다, 그러므로 그 錯覺만 解體해 버리면 끝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깨침은 어떤 수행을 거치지 않아도 理致에 대한 믿음과 확신만 있으면 시각이 완전히 바뀐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기 위해 觀察하고 思惟하여, 잘못된 錯覺을 걷어내고 바른 理致를 세워나가는 것도 수행으로 분류한다면, 그런 차원에서는 분명 수행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수긍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몰입을 통한 삼매수행이 없으면 절대 깨침은 오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앞에서 ‘완벽해진 앎이 활짝 열어 놓은 마음의 문을 따라 確然한 體驗이 온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체험이라는 것은 ‘내가 없는’ 상태가 직접 체험된 것이다. 즉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이놈이 사라진 것이다. 여태까진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이 주체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놈이 아주 사라져버린 것이다.(이 말은 여태 내가 있었는데 그것을 지금 제거하여 없앴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발견했다는 뜻이다. 원래부터 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 만 해도 나의 입장이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사물을 바라봤다. 즉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둘로 나눠졌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보는 내가 없어졌으므로 보이는 대상이 나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무를 봐도 돌을 봐도 모두가 깨침이고 모두가 부처님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一切에 自由롭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 간과하고 말지만 핵심은 정작 이것이다 즉 ‘나의 自性이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고유의 자기 성품이라는 것이 원래 없었다는 것을 깨치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나라는 것이 있어서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번뇌가 따라 일어났지만. 지금은 책임질 나가 사라졌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자유로워 진 것이다.

 

원래가 ‘나’ 라는 놈은 태어난 적이 없었기에 또한 살 놈도 없고 따라서 죽어야 할 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것이다.(앞에서 自性이 없다는 것은 虛想이 없다는 것이지 本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本體는 마치 여의주의 맑은 성품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고 체험이 안 되지만 24시간 항상 나와함께 여여하게 있다.)그러면 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우면 번뇌도 없고 또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여여한가 하고. 그러나 절대 그럴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煩惱가 없고 生覺이 없는 것이 아니다.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으며 분노도 있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日常的인 平常心 일 뿐이다. 단지 특별하다면 그 속에는 나를 인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認識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기를 봐도 자기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生覺한다, 모든 것을 超越하였으니 萬事에 無心 하겠구나할 수도 있다, 그러나 無心이라는 것은 生覺이 안 일어나고 고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錯覺일 뿐이다. 煩惱 妄想이 예전같이 일어나지만 나는 그것에 묶여있지 않는 것이 바로 無心이다. (묶여있지 않다는 것은, 즉 그것에 연연하여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깨어있으므로 명징하고 고요한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 이것이 本性이라 錯覺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이 명징하고 고요한 상태도 결국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것으로 써, 단지 마음 앞에 나타나는 對相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끄러운 것도 對相이지만 마찬가지로 고요한 것도 對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본성자리는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恒常 存在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견성이란 명징하고 고요한 이런 경지를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달리 나의 잘못된 觀点에 의해 내가 스스로 묶어놓은 그 觀念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 自由로운 것이지, 이런 테크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요하다든지 명징하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見性’ 이것을 總整理하면

‘내가 없어 나의 본래자리는 항상 여여하여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다는 확신’과

그것을 확고하게 믿게 되면 반드시 생기는, 이 自由(解脫)의 體驗.

바로 이 體驗이 깨침이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인다면, 이 세상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이

모두 사라져 없어진다는 점이다.

           

                 2. 깨달음의 量과 質         

             

깨달음에는 크기와 양이 있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이 觀点 즉 자존심, 명예심,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 등 이런 것들로 똘똘 뭉쳐져 있는,  나를 지키려는 이 마음이 나의 個體的 自我다. 이 個體意識이 처음에는 단단히 뭉쳐져 있어 감히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狀態지만  불교의 가르침에 의해서 無我, 無常, 苦 등 이러한 이론들을 들음으로써, 처음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들어도 관심이 없었으나, 자꾸 반복하다 보니 점차 그것이 理解가 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내가 없다’ 는 말을 들으면 저것이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敎育과 慣習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존심 명예심이 있어야 이 세상에 올바른 사람구실을 하지, 만약 명예심이 없으면 마치 금수와 같은 짐승이 된다고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이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점차 이해가 되고, 또 모든 것이 緣起에 依해서 이루어지며, 하나도 實體가 없다는 뜻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차 그 理解의 양과 크기가 커지기 시작하고 따라서 理解의 농도도 더 깊어간다. 그러다가 理解가 더 높아지면 이제는 “나”가 없다는 말을 들어도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지며 ‘나’라는 것은 原來가 實體가 없고 단지 因緣에 依해서 地, 水, 火, 風 이 모여 잠시 이루어졌다가 다시 因緣이 다하면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도 理解가 된다. 이렇게 하여 理解의 程度가 점차 높아지게 되면, 이제는 이것을 움켜쥐고 있던 자존심, 명예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나의 價値觀이, 卽 自身을 붙들어 매고 있던 虛想들이, 더 이상 維持되지 못하고 자꾸 解體되려고 꿈틀거린다. 原來가 나라는 執着은 하나의 헛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와 같아서 그 實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 自身을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내가 있다고 執着 하고 그 나를 지키려고 하다 보니 자존심, 명예심이 虛想으로 만들어 졌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러한 虛想들을 神主 모시듯이 모시고 虛妄한 錯覺의 드라마를 쓰게 된 것이다. 이러한 理解가 絶頂에 달해 온전한 確信으로 가득차면 어느 瞬間 거짓 ‘나’가 홀연히 解體 되는 時期가 온다. 더 이상 붙들고 있을 餘力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꾸 理解의 농도가 진해지면서 내가 있다는 거짓 虛想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瞬間 밧줄이 툭- 끊어지듯 나를 버팅기고 있든 거짓나의 觀点이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確信으로 가득차고 그 確信에 의해서 마음의 문이 열려 탁트인 眞正한 自由를 느낀다.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텅 빈 자유가 펼쳐지고 나라는 자아가 사라져 없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던, 즉 나를 지키려는 내가, 지금은 사라져 없어졌다. 나무를 봐도 그것이 비었고 산을 봐도 그것이 비었다. 어디를 봐도 모두가 텅 비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가 나와 둘이 아니요, 산이 또한 나와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보지 않는 다는 뜻으로 하나라는 것과는 다름, 만약 하나 되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도 버려야 된다. 왜 이렇게 되는가하면 여태까지는 나의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봤다. 즉 나라는 個體를 基準臺로 삼고 그것에 의해서 相對的으로 남을 봤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相對的 視覺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은 自由의 現狀을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특별난 것 같아도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단지 우리가 關心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드라마 속에도 있고 소설 속에도 있고 음악에도 또한 경전 속에도 무수히 있다. 여기에 드라마를 한 예로 들어보자.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 헌신적으로 환자를 보살피며 자신의 목숨까지도 팽개치고 노력 할 때 그것을 보는 시청자는 자기도 그 주인공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마치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의 그의 마음은 個體的 自我가 엷어져 있다. 자기의 몸을 지키려는 生覺이 매우 엷어져 있어서 모든 사람을 慈悲로 대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바로 이것이 大乘的 慈悲가 形成됐다는 징조다. 바로 이때 절호의 機會가 오는 것이다. 그 감정이 극적으로 치닫으면 어느 瞬間 열어져있는 마음이 텅--하고 비어지면서 완벽하게 나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음을 여는 과정이다.

 

이런 것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法問을 들을 때도 동일한 과정이 펼쳐진다. 가령 법문을 듣다가 큰스님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그 법문에 감화되어 큰스님이 “나를 버린다” 하면 자기도 그 말과 같이 自己의 執着을 버려보고 또 큰스님이 “나를 놓아버린다” 하면 그 말씀과 같이 자기의 집착을 놓아버려 본다. 그렇게 되면 그 瞬間 한껏 높아진 感動에 의해 열려져 있는 그 마음에서 爆發하듯 自己를 지키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텅-비어져 아무 곳에도 걸리지 않는 自由를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理解와 確信의 程度를 높인다고 하는 것이다.

 

또 경전을 볼 때나 큰스님과 법거량 할 때도 동일한 현상이 생긴다. 물론 現實 속에서는 이렇게 되기 힘들다, 왜냐하면 눈앞에 생존경쟁의 현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 좀처럼 이렇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러나 법문이나 경전 같은 혹은 음악 등, 특수한 상황이 펼쳐지면 다르다.

 

                  (ㄱ)  自由란 어떤 것인가      

 

自身의 名譽心과 自存心 또 남에게 認定받으려는 마음 등을 다 버리면 自身이 만든 觀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自由다. 그런데 사람들이 自由롭지 못한 것은 이것들에 구속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이 世上에 執着하며 살아가는 理由가 남에게 認定을 받거나 또는 명예 자존심 등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名分이 있다, 그런데 만약 이것들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까? 그러면 이것들을 모두 버린 사람이 어떻게 되는 지 한번 살펴보자......

 

여기 자존심도 버리고 명예심도 버리고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도 버리고 또 재산도 버리고 몸을 가꾸려는 마음도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다시 말해 그는 이제 몸에 대한 執着과 愛着을 버렸으니 당연히 몸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어 몸속의 장기도 남에게 떼어주고, 눈알도 남이 필요 하다면 떼어 줄 것이다. 물론 재산도 남에게 주었으므로 집도 없고 논밭도 물론 없다. 수중에 돈도 없어졌으니 오늘 당장 먹을 음식이 없기에 길거리에 나가서 남에게 밥을 구걸해야 된다. 그뿐만 아니라, 병이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손발이 부러져도 치료 할 돈이 없으니 절뚝거리며 병신이 돼야 할 것이다. 또 내 몸에 대한 애착을 버렸으니 남이 나에게 눈알이나 장기를 달라고 하면 스스럼없이 그것을 빼어 줄 것이고, 또 집이 없으니 별수 없이 다리 밑이나 남의 담벼락 밑에서 잠을 자야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할까, 아마 함부로 대하고. 길거리에 서 있어도 방해 된다고 아무렇게나 밀쳐버리고 발로 차버리게 될 것이다. 전에 명예심, 자존심이 있을 때는 남이 함부로 나를 대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나를 천히 여겨 마치 짐승과 같이 취급해서 함부로 물건 취급하듯이 나를 다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살 수 없게 된다. 자존심, 명예심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살아야 할 名分을 못 찾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은 아마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더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은 죽고 만다.(이 상항을 실제처럼 상상해 보라 - 우리의 뇌는 꿈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만약 이때 죽어가는 이 사람에게 누가 와서 북쪽에 있는 아오지 탄광에 갈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또 그 속에서 평생 나오지 못하고 석탄만 캐면서 일생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 할까. “나는 갈 수 없다”, 라고 대답 할까? 만약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답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愛着이 남아서 내 몸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또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미련을 못 버린다는 뜻이 된다. 그렇지만 만약 “예!” 하고, 가겠다고 한다면 즉시 그는 마음이 열려 大 自由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죽을 각오가 됐으니 죽음에 대한 미련을 버렸을 것이고 몸에 대한 執着을 버렸으니 勞動으로 因한 몸의 苦痛과 病苦에 대한 걱정은 이미 넘어섰고, 세상의 즐길꺼리에 대한 미련도 이미 버렸으니 바깥세상을 더 이상 탐착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집착을 버렸으니 이 이상 그를 묶어둘 요인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대답과 동시에 자유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 그의 관점이 바뀌었던 것이다. 나를 놓아버리자 마자,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生覺의 다른 面이 보이는 것이다. 즉 나를 쥐고 있던 여태까지의 觀点을 놓자 다른 角度의 世上이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즉 내 마음의 觀点이 죽었다는 것, 나의 舊時代의 觀念이 끝맺음을 했다는 것, 그 사실을 깨치자마자, 그의 마음은 텅 비어져 온 宇宙로 터져 나가고 어느 한 곳에도 묶여있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나" 라는 執着이 없기에 나의 觀点에서 世上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무나 산을 봐도 나와 둘이 아니다. 여태까진 “나” 라는 視覺이 있었지만 이젠 그 나가 사라졌다. 사람을 봐도 보는 자, 즉 認識하는 者가 없어졌다. 남들이 나에게 모독을 줘도 옛날에는 그것에 대항하는 나가 있었다. 卽 過去記憶 속에 넣어뒀던 基準臺가 있었다. 그래서 그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튀어나와 相對에게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없어졌다. 이러한 現狀은 나를 묶어뒀던 나의 觀念으로부터 解放이 됐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自己가 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며 또 後天的으로 敎育과 慣習에 依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觀点에 依해서 世上을 본다.

 

그렇지만 그 觀点은 내가 만든 것이다. 그것을 任意的으로 만든 根本理由를 따져보면 ‘내가있다’ 라는 錯覺에서 시작한다. 이 몸이라는 것은 결국 因과 緣에 依해서 임시적으로 和合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모르는 無明에 의해 이것이 진짜 내 것 이라는 錯覺을 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만들어져, 이제는 完全한 事實이 되고 또 固定不變의 確信까지 가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觀念의 틀이 깨지니까, "나" 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自由롭게 世上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ㄴ)  내몸의 實體

                 

내 것이라고 執着할 어떤 “나” 라는 個體가 있는가? 진정 "나" 라는 것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나의 生命이 維持되는 것은 數많은 外部의 도움에 依해서 存在한다. 우선 매일 숨 쉬는 空氣가 없다면 우리는 단 5분도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空氣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太陽이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太陽이 宇宙에서 사라진다면 그 즉시 지구의 온도는 零下 273度 로 떨어진다. 그러면 단 1분도 견디지 못하고 얼음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太陽이 있기에 내가 存在하므로 太陽이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물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 할 수 없다. 우리의 인체는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약 20일 이내에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이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음식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 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약 50일 정도면 우리의 인체는 죽고 만다. 그러므로 들판의 곡식과 야채 과일 등이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人體가 維持되기 위해서는 갖가지 要素들이 複合的으로 도와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더 細部的으로 따져보면 우리는 크게 나눠서 들판의 곡식과 우물의 이다.

 

우물의 물을 목으로 부어 넣으면 하루정도 몸속에 있다가 다시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 이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몸속에 있을 땐 이 물을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서 몸을 빠져 나가면 이때는 이 물을 남이라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물이 내 몸속에 있을 땐 굉장히 소중히 여겨 내 몸처럼 아끼지만 일단 내 몸을 빠져 나가고 나면, 설혹 이것이 나의 소중한 피라 할지라도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더럽게 여겨 혹시라도 이것이 내 몸에 묻을까 전전긍긍 하고, 어쩌다 내 몸이나 내 옷에  묻기라도 하면 더럽다고 기겁을 하며 얼른 닦아버린다.

 

또 한편 들판의 곡식을 보자. 이것을 목에 부어 넣으면 하루정도 몸속에 있다가 그 다음 몸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이것도 몸속에 있을 땐 내가 되지만 일단 일을 마치고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남이 된다. 또 몸속에 있을 땐 영양분이 되고 열이 되어 갖가지 중요한 요소로 일을 하다가,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바깥으로 빠져나가 지, 수, 화, 풍 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우리의 몸은 우물의 과 들판의 곡식으로 되어있다. 이것들이 몸속에 머물 땐 내가 되었다가 밖으로 빠져나가면 남이 된다. 그러면 과연 ‘나’ 라는 것은 무엇인가? 들판의 곡식이 ‘나’ 인가 아니면 우물의 물이 ‘나’ 인가? 무엇을 가지고 ‘나’ 라고 하는가, 이 몸이 ‘나’ 라고 하는 이유는 현제 이 몸이 存在하여 形像이 있기 때문이고. 또 오늘 봐도 이 몸이 있고 어제 봐도 이 몸이 그대로 있다. 전혀 變함없이 뚜렷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恒常 變함없이 이 形態를 維持하는 것을 보니까, 이 몸이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땐 작았고, 더 어릴 때 즉 갓난 아이  일땐, 더 작았으며 어머니 몸속에 있을 땐 더 작았다. 그리고 더 소급해 보면 아버지의 정자로 있을 땐 더 작았다. 그 땐 현미경 속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정자가 들판의 곡식과 우물의 물을 몸속에 채우면서 이것이 점차 자라 애기가 되고 소년이 되고 청년과 장년이 된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의 정자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결국 아버지의 정자도 들판의 곡식과 우물의 물을 잡숫고 만든 것이다. 그러면 과연 ‘나’ 라는 正體性은 무엇을 보고 ‘나’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이 몸이 내가 아니다, 결코 우물의 물과 들판의 곡식이 ‘나’일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나’ 일까? 사람들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이 내가 아니면 분명히 이 精神이 ‘나’일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이精神이 ‘나’ 일까? 이제 그것을 한번 觀察해 보자. 精神이라고 말하는 것은 生覺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生覺은 本體(보이지 않고 체험될 수없는 마음의 근본성품)와 作用이 있다. 우선 작용을 말해 보자, 작용은 구체적으로 나눠보면 자존심, 명예심,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 등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가 하면 結局 이 몸을 지키려는 데서 生긴 것이다. 자존심, 명예심이란 이 몸이 ‘나’라고 生覺하고 이 나를 어떻게 하면 效果的으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몸을 잘 간수 하지 못하면 타인들이 나를 무시하고, 또 함부로 대하게 되면, 목숨을 유지 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고귀하므로’ 너희들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自尊心이다. 또 名譽心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공동사회에서 명예스럽지 못하면 남들이 천시여기고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認定을 받지 못하면 의식주를 구하기도 힘들고 사회로부터 도태 당하기 십상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야 음식을 구하기도 쉽고 따뜻한 보금자리와 몸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자존심, 명예심 등이 필요한 것은, 내 몸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은 실제 들판의 곡식이며 우물의 물이다. 이 들판의 곡식을 지켜야하고 우물의 물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원래부터 ‘나’ 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다. 나는 결코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우물의 물이 태어났는가? 아니면 들판의 곡식이 태어났다는 말인가. 우리는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인데도 本體的(佛性)인 이 보이지 않고 體驗 될 수 없는 마음의 根本性品이 작용 없는 작용을 하는 것을 보고 마치 작용이 있는 것처럼 錯覺했기 때문이다.      

                 

               3.  禪定중심 수행체계 비판  

                 

集中을 通해 禪定을 이루어 世上을 超越하려는 禪定修行은 인도의 수행법에 바탕을 둔 것으로 思惟를 通해 智慧를 啓發하는 불교의 수행법과는 크게 구별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불교수행법과 인도수행법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돌이켜 보고자 한다.

인도의 수행은 사선팔정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제1선부터 제4선 까지를 색계선정이라 한다. 색계선정이라 칭하는 이유는 이 선정에는 나도 보이고 사물도 보이기 때문이다. 즉 무색계선정인 제5선부터 제8선까지의 선정에서는 나도 보이지 않고 사물도 보이지 않는 것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색계라는 명칭부터 살펴보면, 이라는 것은 사물이다, 즉 사물이 보인다는 뜻이다. 이는 무색계에서는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을 위해서 사물이 보이는 색계와 사물이 보이지 않는 무색계로 나누다 보니까 이러한 용어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색계선정을 살펴보자, 이선정은 무색계선정 보다 낮은 선정에 속한다, 독서삼매와 같이 하나의 대상에 깊이 몰두하다 보면 주위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또는 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눈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잘 인식하지 못하듯이, 하나의 세상에 깊이 몰입된 상태로서, 이 선정에서는 천상의 세계도 볼 수 있고 영혼도 볼 수 있으며 신통도 생겨,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도 있고, 또 타심통 등이 생겨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알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선정에서는 사람과 사물과, ‘나’도 보이고 또 나의 생각도 느껴진다, 그래서 사물과 마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해서 색계선정이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무엇이냐 하면, 欲界라 한다, 욕심을 가지고 사는 세계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욕계선정이란 단어는 없다. 왜냐하면 일단 선정에 들면 특별한 정신세계가 되기 때문에 욕계인 현재 우리의 의식세계와는 다른 차원이 되므로, 비록 욕계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선정에 들 땐 그곳에 나타나는 세계는 색계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엔 無色界禪定을 말해보자, 제5선이 空無邊處定이고 제6선정이 識無邊處定이요 제7선정이 無所有處定이고 제8선정이 非相非非相處定이다.

 

無色界의 첫 번째가 제5空無邊處定인데 이 선정에 들면, 첫째 몸이 사라지고 둘째 대상이 사라진다. 그래서 모든 것이 텅 비어 끝없는 虛空만 펼쳐진다, 그래서 명칭이 虛空이 끝없이 펼쳐진다는 뜻의 空無邊處定이다. 이 狀態에서는 ‘나’가 없기 때문에 기준 할 기준대가 사라진다, 사물의 거리를 계산 할 때 첫째 기준대가 있어야, 그 기준대로부터 앞에 있는 대상까지 거리를 계산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이 될 기준대가 없어지면 나와 상대와의 거리를 잴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선정에선 ‘나’ 라는 기준대가 없어지면 나와 상대와의 거리를 잴 수가 없다.

 

그처럼 이 선정에선 ‘나’라는 기준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나’로부터 앞에 있는 사물까지의 거리를 잴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전, 후, 좌, 우, 상, 하의 개념이 사라진다. 보통 앞과 뒤를 볼 때 앞은 잘 보이지만 뒤를 보려고 하면 뒤가 잘 안 보인다. 그것은 習慣的으로 앞만 봐 왔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으면 눈알로 事物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뒤가 불편할 理由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눈을 감아도 뒤가 잘 안 보인다. 그 이유는 앞만 봐 왔던 습관이 남아서 그렇다. 그러나 이 선정에 들면 뒤가 앞처럼 잘 보인다. 뒤를 볼 때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아도 저절로 뒤에 눈이 있는 것처럼 앞을 보듯이 뒤도 동시에 보인다. 평소 에는 절대 이렇게 될 수 없지만, 이 선정에선 이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니까 통으로 전체가 하나로 보인다.

 

그 다음은 제6선정인 識無邊處定이다. 이 선정의 특징은 의식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 그래서 意識이 無邊하다고 말 하는 것이다. 이 뜻은 앞의 제5공무변처정에서 펼쳐졌던 허공이 끝없는 이 상태를 의식이 바라보는 형태다, 그러니까 텅 빈 끝없는 虛空을 意識하는 이 意識이, 이 텅 빈 虛空을 바라보고는 이것이 自己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텅 빈 우주 보다 더 넓다는 뜻이다. 즉 우주만큼 넓은 이 허공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 의식은 당연히 그 허공보다 더 넓은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이 의식을 식무변처정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곧 우주의식 이라고 여긴다. 여태까지 자신의 의식은 이 몸 안에 갇혀 있는 작은 의식이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것을 경험하면서, 나의 의식이 우주만큼 크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自己라는 이 몸과 마음을 固執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몸의 限界를 벗어나서

生覺 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恒常 이 몸을 基準으로 삼고 世上을 判團하는 習慣이 몸에

배여있다, 그러나 이 몸 이라는 좁은 觀点을 벗어나면 이 마음은 끝없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제7無所有處定이다. 이 선정에 들면 自己의 所有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앞의 제5공무변처정과 제6선정을 거치면서 그 텅 빈곳에선 ‘나’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여태까진 내 몸이 있다는 生覺에서, 나의 소유가

있다고 여겼지만 그것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단계가 제7무소유처정이다.

 

그 다음은 마지막 선정인 제8非相非非相處定이다. 이 선정은 전혀 生覺을 하지 못한다, 제5 제6 제7선정은 비록 시간과 공간의식은 없지만 그래도 制限的이지만 生覺은 어느

程度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선 生覺 自體를 일으킬 수 없다. 단지 意識이 깨어있을 뿐 전혀 生覺을 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선정에 들면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 스스로 自覺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 날 깨어나서야 비로소 내가 여태까지 선정상태에 있었구나, 하고 알 뿐이다,그리고 現實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生覺이 일어나고, 그때에야 自身이 여태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사유 해 볼 수가 있는 것이지, 그 선정상태 속에 있을 땐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狀態는 宿眠一如의 상태가 된다. 숙면일여란 깊은 숙면상태에도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다. 사람이 과도하게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깊은 잠속에 빠져있어도 의식이 지나치게 각성되어 있으면 잠속에서도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가 유지된다, 이 상태에서는 비록 의식이 있지만 평상시처럼 생각을 굴리거나 할 수가 없다. 단지 의식이 깨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제8비상비비상처정 에서는 의식이 깨어 있지만 생각을 굴릴 수 없는 숙면일여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모두 사선팔정의 전체과정이다. 이 선정에 들면 일체가 끊어져있기 때문에 번뇌 자체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고요하고 편안하며, 은은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선팔정의 모습들이다.    

                     

             (ㄱ)  禪定中心 修行體系의 問題들    

그러나 이 선정들에는 缺点이 있다. 이 선정에 들었을 땐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지만,

일단 여기에서 깨어나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또다시 煩惱가 일어난다는 점이 그것이다.

선정 속에 잠겨 있을 땐 일체의 모든 것이 딱 끊어져 있어서 온 우주 삼라만상 자체와 하나가 되는 특이한 상태에 잠겨있지만, 이 상태가 영원히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또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는 그 상태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다시 일어나는 이 번뇌를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에, 또다시 이 선정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수행하기 전에는 번뇌가 일어나면 당연히 싸워서 견디면서 살아왔지만 이젠 그것이 잘

안된다. 너무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맛봤기 때문에 오탁악세의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래서 점차 은둔자가 되는 것이다. 禪定이라는 것은 煩惱의 뿌리를 뽑을 수 없는 限界가 있기 때문이다. 번뇌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묻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煩惱의 뿌리를 除去하려면, 어떤 問題가 發生했을 때  그 問題의 原因을 파악해서 그 原因을 解消시켜야 解放이 온다. 그렇지 않고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한쪽에 밀어놓고, 다른 쪽인 집중을 통해 정신을 몰입하는 방식으로 문제로부터 도망가버리면, 끝내 그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이 선정이라는 것이 바로 그와 같다. 마치 풀을 돌로 눌러놓은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돌에 눌려 꼼짝 않고 죽은 듯이 있지만 언젠가 그 돌을 들어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풀은 파릇파릇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출가하셔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제7선정을 터득한 스승이었다. 그 스승으로부터 3일 만에 제7무소유처정을 완전히 터득하고는, 이보다 더 깊은 선정은 없느냐고 물으니, 그 스승이 말하길, 나의 스승님이 계신데 그 분은 제8비상비비상처정을 알고 계신다고 하므로, 그 분이 계시는 곳을 찾아가셨고 그곳에서 또 3일 만에 제8선을 완전히 터득하셨던 것이다. 그러자 그 스승이 석가모니의 대단한 능력을 보시고는 감탄하여 말하길 이 선정보다 더 깊은 정신세계는 없다. 이것이 마지막 이라고 말하고는, 그대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나와 함께 교단을 만들어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때 석가모니께선 그 제안을 거절 하셨는데 이 선정에 들었을 땐, 마음이 고요하고 편하지만 이 상태가 끝나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엄연히 번뇌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에 만족 할 수 없다 하고, 그 스승으로부터 떠나, 육년고행길에 접어든다. 이 煩惱를 解決하기 위해선 다른 方法을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년고행후 이러한 것들이 결코 올바르지 않은 줄 아시고는 모든 수행을 청산하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오직 思惟를 통해, ‘나라는 주체가 없는 줄’ 깨우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結局 禪定(三昧)만 가지고는 煩惱가 解決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께서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ㄴ) 선정중심 수행체계 비판          

               

또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인도의 수행체계에 대해서다. 한 사람의 개체가 수행을

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순수의식 상태만 남는다. 그 순수의식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나’라는 몸이 사라지고 바깥대상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텅 빈 허공 만 남는다. 이것이 제5공무변처정이며 또 제6식무변처정을 거쳐 제7,8선정상태가 된다. 이것이 아트만속에 있는 순수의식이다. 이것은 즉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생각 가운데서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한 본원적 의식을 발견하면, 비로소 이 순수의식이 곧 바깥우주 속에 항상 존재하는 그 순수우주의식과 동일한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러면 ‘나’라는 개체(아트만)속에 있는 이 순수의식과 바깥에 있는 우주의식이 똑같이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개체는 그것과 합일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트만이 브라만과 합일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일러 신인합일 또는 범아일여라 한다. 그래서 합일된 순수우주의식은 영원불변하며 우주가 무너지고 사라진 후에도 순수의식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또다시 인연에 의해서 우주가 생성되면 ‘우주의 궁극적 의식(브라만)’을 바탕으로 해서 생, 주, 이, 멸 의 과정을 반복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수행체계다.

 

그러나 이 수행에 대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셨다. 왜냐하면 이 아트만이라는 개체의 순수의식이 결국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개체가

체험한 영원성은 결국 자기가 만든 하나의 對相에 불과 하다고 본 것이다. 순수의식도

결국, 마음의 본체 앞에 나타난 ‘고요한 對相’일 뿐이다. 다시 말해 고요한 對相이든 시끄러운 對相이든 이 둘 모두 마음 앞에 나타난 對相이라는 점에서 둘 다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本體는 決斷코 衆生의 意識 속에 體驗되거나 感知되는 것이 아니다. 이 본성은 우리의 과거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사유체계로는 결코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체계는 ‘나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애초부터 오염된 것이다. 그 오염된 잣대를 가지고 나의 본성을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의 순수의식인 아트만은 결코 순수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마음의 본체 앞에 나타난 고요한 對相에 불과하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는 “그 觀念조차도 놓아라!”고 하신

것이다.

 

問題의 核心은 이제 그 觀念마저 놓아버린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로 귀착된다.

결론은 그 마지막 남는 것은 바로 “自由”다. 즉 解脫인 것이다. 그 순수의식 이라고 하는 그것 까지도 놓아버리면, 一般的인 生覺으로는 아마 더 깊은 純粹意識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하고 生覺 하겠지만 결코 더 깊은 것은 없다. 비록 우리가 非判의 對相으로 삼지만

實際 그 ‘브라만’인 순수의식 그 자체는, 곧 인간의 정신영역으로서는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는 마지막 자리이기 때문에 더 깊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최고의 자리에서도 해결이 안 된다면 우주순수의식 그것 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 그러면 그 때, 비로소 大自由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그 觀念의 束縛으로 부터 풀려난 自由가,

바로  ‘우리의 本性’ 인 것이다.

     

         ㄷ, (부처님 시대의) 인도 수행과 부처님 수행의 차이점

 

인도수행 -- 현실을 실제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현실을 초월하는 ‘선정’에 들어가 감각을 끊어 버리고 초월세계에서 편안한 자유를 누리려한다.

 

불교수행 -- 현실을 실제 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現實을 내 마음이 만든 虛想이며 꿈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현실을 인정 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초월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래서 단지 이것이 꿈 인줄 깨치기만 하면 끝이 난다. 그래서 불교에선 선정을 닦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설혹 선정을 닦더라도 인도 수행과는 달리, 꿈인 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선정을 조금 이용 할 뿐인 것이지, 결코 그 선정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는데 사용 하려는 것은 아니다.

 

육도윤회

인도수행-- 육도윤회를 실제 한다고 인정한다. 사람이 죽으면 지옥, 축생, 아수라... 등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러니 죽은 후 업력에 따라 실제로 윤회를 하여 고통을 받는다.

 

불교수행-- 육도윤회가 모두 마음이 만든 꿈이며 허상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것이 허상이며 꿈인 줄 깨닫기만 하면, 그 즉시 꿈에서 깨어나기 때문에 윤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윤회가 없다. 왜냐하면 꿈인 줄 알았는데 그 꿈을 부여잡고 실제인 냥 고통을 받겠는 가! 그렇지만, 우리는 비록 이것이 꿈인 줄 알면서도, 이것들이 나의 전부이므로, 이것 외엔 세상이 없기에, 이 꿈을 마치 참 인 냥 소중히 여기며 아름답게 가꾸면서 살 뿐이다. 고통이 오면 고통을 받고, 또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그것들이 모두 꿈인 줄 알기에 조금도 피할 생각이 없으니, 바로 이것이 自由다.

           

               4. 불성, 여래장, 브라만의 差異

               

요즘 항간에 많은 사람에 회자되고 있는 문제 중에 如來藏 思想이 있다. 일부에선 이것이 ‘비불설’ 이라하며 원수 대하듯 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짚어보자.

불성, 여래장, 브라만은 어떤 차이가 있는 지 한번 살펴보자,

 

우선 힌두교의 브라만사상을 규명해 보면 그 차이가 쉽게 드러나리라 생각된다. 아트만이라는 自我가 있다. 이 自我 속에는 純粹意識이 있어, 수행자가 모든 妄念을 除去하고 나면, 비로소 그 순수의식을 發見하게 된다. 이때 이 순수의식이 바로 바깥에 있는 宇宙意識과 同一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卽是 아트만 속에 內在되어 있는 純粹意識과 바깥에 있는 宇宙意識과의 合一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면 이것은 불교의 “여래장사상”과 동일하다. 불교에선 중생 속에 여래가 내장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불교에선 힌두교와 같은 설명방법을 사용 했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비록 불교교리발달 과정에서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힌두교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어떤 한 사상이 오랜 세월동안 계속 전해 내려오다 보면 외부의 수많은 사상과 교류를 하면서 교리가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전해지는 동안에 수많은 사상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불교 고유의 핵심이 변경 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여기의 아트만과 브라만사상도 그와 같다.

 

그러면 다시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자. 불교의 불성과 브라만은 어떻게 다른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처음 마주친 思想이 四禪八定 이라는 인도고유의 수행체계다. 석가모니는 이 수행에서 제7선정과 제8선정을 다 습득하고도 그 수행체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선정에 들어 아트만 속에 있는 순수의식과 브라만이라는 우주의식이 합일되어 하나가 되어 영원불변하는 우주의식인 브라만을 체험했지만, 그것은 계속 유지되지 않는 결점이 있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서 육년 고행을 했던 것이다. 즉 브라만의 핵심은 영원불변하는 의식을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個體的 自我인 아트만 속에 영원불변하는 순수의식을 체험하고 그것을 깨달아 신인합일(범아일여)이 되어 자아가 죽어 끊어질지라도 그 속에 있는 영원한 순수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宇宙意識이 되어, 繼續 成. 住. 壞. 空을 거치더라도 維持된다는 것이다. 성, 주, 괴, 공을 거치면서도 유지되고 또 육도윤회를 거치면서도 그 순수의식은 남아 다시 다음 생을 받을 때는, 이 우주의식에서 또다시 인연을 만나면 다시 태어나고, 또 죽으면 다시 이 우주의식 속으로 돌아가서 영원함 속에 잠겨 있다가, 다시 인연을 만나면 다른 생을 사는 .....이렇게 끝없이 생사를 드나들면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불변하는 우주의식(유일신, 절대자, 창조자)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여기에서 正面으로 反對意見을 내셨던 것이다. 卽 永遠不變하는 아트만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장사상은 힌두교식 이니까 틀렸지 않는가하는 문제인데 그러나 불교에서 여래장사상을 도입 했지만 아트만식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 아니다. 비록 불교에서 똑같은 형식을 취했을지언정 그 쓰임은 전혀 다르다. 단 한 치도 불교의 사상에서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게 불교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永遠不變하는 純粹意識 일지라도 그것 또한 너의 觀念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觀念조차도 내려놓아라! 그러면 열반이 올 것이다.” 라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涅般이란 自由를 뜻하는 것이므로 무엇에 대한 自由냐 하면 自身이 만든 觀念의 묶임으로부터의 解脫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관념 이냐하면 자아 속에 있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 남는 순수의식 이라는-- 이것도 결국은 너의 觀念이 만든 虛想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것이 虛想인가 하는 문제다. 純粹意識 이니까 그대로 眞理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盲点이 있다, 그 盲点이란 注視하는 注視者가 있다는 것이다. 그 純粹意識을 바라보는 즉 알아차리는 主體가 있는 것이다. 自己를 認識 할 수 없어야 옳은 것인데, 自己를 認識하는 놈이 있는 것이다. 비록 제5선정인 空無邊處定에서 제8선까지, 그곳에선 내 몸도 사라지고 대상도 사라졌지만 그 事實을 알고 있는 “認識하는 놈이 있다”는 점이다. 그 영원함의 순수의식을 인식하는 인식자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것도 ‘네 가 만든 너의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놓아버려라 그러면 자유가 올 것이다...’ 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觀念조차도 놓아버리면 더 깊은 순수의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疑心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설혹 더 깊은 순수의식에 들어간다 해도, 그것 또한 自身의 觀念에 불과 하다고 본 것이다. 즉 “唯識”에서 見分 뒤에 그것을 증명하는 自證分이 있고, 또 그것을 증명하는 증자증분이 있고, 또 그것을 증명하는  그 뒤의 증증자증분이 있는, 끝없는 연결 고리를 이어 간다고 하더라도 結局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더 깊이 추구하여 들어간다 해도 결국은 그것도 스스로가 만든 自身의 觀念이라고 것이다. 그래서 그 觀念도 놓아 버렸을 때 자기가 묶어놓은 觀念으로 부터의 解脫이 오는 것이다. 즉 그 해탈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自己가 自己를 認識 할 수 없는 자리’ 바로 이것이 佛性이다. 알 수 없는  자리며 곧 自己라는 固有의 自性이 없는 자리다. 固有의 自己性品이 없는 것. 自己라고 固執할 그 무엇도 없는 자리가 바로 佛性이다.

 

다시 말해, --天然自然的인 그 자리(佛性)는 나의 人爲的인 입김이 介入되는 瞬間 그 卽是 變質되어 내가 만든 나의 個體的 世上으로 바뀌게 되므로 당연히 ‘나’ 라는 個體의 始發인 自己가 自己를 認識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理解하는 瞬間 섬광처럼 열리는 자리가 바로 佛性자리다. 즉 理解가 완벽해지면 그 理解가 열어놓은 門을 따라, 바로 體驗이 뒤따라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때는 理解한다고 해서 열리진 않는다. 그러나 어떤 契機가 되면 思考의 轉換이 이루어지면서 보통 땐 전혀 生覺 할 수 없는, -視角을 180도 轉換해서- 볼 수 있는 瞬間이 온다,

 

그러면 平所에는 自尊心, 名譽心 등에 목숨 걸고 살았던 思考方式과는 正反對의 觀点으로 轉換할 수 있는 機會가 올 때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瞬間, 自己가 가지고 있는 價値觀을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佛性이다.’

 

그러므로 佛性과 브라만은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브라만이란 것은, 自身이 그 宇宙意識을 直接 體驗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와 달리 佛性은 그 ‘體驗하는 그 놈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 브라만이란 자아가 넓어져 거대한 우주적 나로 擴張되어 우주와 하나된 것이지만, 佛性은 그와 달리 (그것을 체험하여 우주와 하나된 것이 아니라) 그 체험하는 내가 사라져 나의 知識이 만든 觀念의 굴레로 부터 풀려나 自由롭게 된 이 自由(解脫)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연히 區別되는 것이므로 絶對 같을 수 없다.

               

                               

                          <결론>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수행자상은 선정이나 삼매에 치우친 은둔자가 아니라 智慧를 啓發한 實踐家이다. 산중에 은둔하여 오직 참선공부에 전 일생을 걸 것이 아니라 빨리 지혜를 깨우쳐 남을 위해 봉사하고 실천하는 보살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오늘 날 우리가 해야 할 使命이라 生覺한다. 意識轉換으로 世上을 바꿔볼 수 있는 眼目을 가지고, 實踐을 통해서 自身의 習氣를 하나하나 닦아 완전한 부처로 태어나야 하고, 그러한 실천자체가 나의 수행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 이웃과 자신의 가족을 安心하게 하는 大乘보살의 사명 속에서 사는 자가 돼야한다.

 

“깨치고 닦아야 한다.” 깨치고 닦는다고 하니까 아직 더 얻어야 할 것이 있어서 닦는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제 더 얻을 것은 없다. 더 얻을 것이 없음을 깨치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히 깨쳤지만 習慣 이라는 것은 慣性처럼 그 餘運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智慧로서 하는 것이 아니다. 實踐으로 直接 부닥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그 理致를 깨쳤다고 해서 그 卽是 오랜 習慣이 저절로 길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마음이 空 한줄 確信하고 믿었지만 오랫동안 내 몸에 익혀왔던 自尊心, 憤怒, 挫折(좌절) 등의 錯覺들이 저절로 고개 숙이고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깨친 이 理致를 바탕으로 삼아 끝없이 도망 갈려는 習慣들을 이것에 맞게 順從하도록 길들여 가는 過程인 것이다. 그러므로 닦는 다는 이 말뜻은 더 얻을 것이 없음을 깨치고서 남아 있는 習氣를 보살의 行으로 實踐하는 것이다. 實踐하여 이 世上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것이 바로 나의 습기를 닦아내는 것이 된다. 이것은 평생 동안 보살이 실천해야 할 사명이고 덕목이다.

 

 보살이 닦는 것이 바로 중생을 위한 자비이므로 닦으면 닦을수록 세상은 밝아지고 동시에 보살의 마음은 점차 부처를 닮아가는 것이다. 수행이란 산중에 앉아서 닦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진정 ‘깨치고 닦는’ 이것이 수행이며 보살이다. 내 몸과 내 마음이 全部 虛想이요 꿈인 줄 철저히 깨치고, 그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음에도 걸리지 말고 삶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自由自在로 이 世上을 위해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佛國土 이리라.

                 

         

 

                          - 끝 -

 

                         

                          [요약문]

                         

깨달음이 일어날 때 생기는 현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냐 하면  경전과 많은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이 됐지만 그러나 미혹한 현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대충설명 됐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부분을 現代에 맞게 再整理를 해 본다는 차원에서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見城의 狀態를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그것은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견성도 결국 자신이 직접 체험한 체험물 이므로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옛 조사님들도 이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손에 직접 잡힐 듯이 설명 했지만 接近하는 사람의 수준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다 보니까 그 표현을 올바로 읽어 내리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이지, 결코 선사들이 표현을 못했거나 또는 표현 불가의 금기구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方面에서 설명을 하여 좁히다 보면 그 限界가 分明해지리라 生覺하여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禪定의 病廢에 대해 쓰고자 했다. 선정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수행자가 그곳에 묶여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선정이 무엇이고 신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4선8정에 입각해서 설명했다. 禪定은 결코 煩惱의 뿌리를 잘라 낼 수 없다. 단지 그것을 덮어둘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障碍를 극복하고 나서 빨리 見性을 하여 그 純粹한 熱情을 가지고 現實世界에 나아가서 이 社會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 온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육조단경  ......신수대사와의 필답                  

2) 도서(종밀선사)..마니보주 편      

3) 벽암록 ...  주금강(덕산스님)             .

4) 섭대승론 ...  뱀과 새끼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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