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적멸성과 허무주의의 정체 불성과 창조주, 법계연기와 대우주, 윤회와 생명의 순환, 유식론과 인식론, 공과 반야와 빅뱅이론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불교의 철학적 사유는 엄청난 깊이와 빈틈없는 논리로 현대인들을 완전히 압도한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는 현대과학의 물질적 측면과 종교의 미신적 측면을 극복하고 인간의 윤리의식에
진리적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종교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불교 속에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완전한 모델과 진리의 궁극적 실체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젊은 시절에는 불교대학원에 들어가 진리의 실체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이상한 것은 그 철학적 완전성과는 달리
그속에는 불자들의 삶을 염세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며
세상을 정체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비현실성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즉, 모든 좋은 일은 하고
모든 나쁜 일은 금하며 그 마음을 정화하여 해탈에 이르라는 보편적 가르침과 함께
세상은 본디 공하며 허무하니 모든 집착과 행위를 버리고 걸림없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현실 부정의 사상도 같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우주의 실상이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정녕 공하고 허망한 것이며
모든 분별과 소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과연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곤 했다.
만약 불교의 주장대로 우주의 실상이 정녕 공하고 허무한 것이라면
어떠한 삶을 살던지 간에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환(그림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을 살 이유가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불교이론가들은 현실적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현실에 참여하되 집착은 갖지 않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현실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실존의 문제로서
놀이삼아 가볍게 대한다면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패배하여 낙오자가 되고 만다.
따라서 지엄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교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해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한다.
만약 불교의 본질이 진실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우리는 불교를 믿어서는 안되며
오늘날 불교가 왜곡된 것이라면 다시 정법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는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이 동양철학의 전부인 줄 알고 있었기에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학문의 발달로 소승불교를 비롯한 초기불교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희귀한 진리의 인연으로 사실과 허구를 밝힐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었기에
세상의 진실과 영원한 진리를 밝히신 부처님 법의 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으니
인연있는 분들은 거짓과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진리와 사실의 세계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럼 먼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힌두적 환경 속에서 무엇을 전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당신이 보신 것은 우주의 실상과 세상을 이루는 완전한 이치였다. 깨달았다는 말은 업에 가려진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처님의 깨달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본 것으로 그 가르침은 사실과 일치하였고 따라서 그 가르침대로 행동하면 세상의 흐름과 조화되어 참되고 방황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라 하고 그분을 정각을 이룬 성자라고 존경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해탈심에 비친 실상과 이치는 이 세상이 하나이고 이를 구성하는 진리도 하나이므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똑 같다. 부처님은 논리로 이치를 만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사실과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치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함경에 여러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한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이 항상 같은 현상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이치가 되풀이 되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래는
참된 말만 하며,
사실만을 말하며,
진실만을 말하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업이 사라진 해탈한 마음으로
육도윤회의 실상과 인간의 삶속에 흐르고 있는 이치를 밝힘으로써
당시 브라만교의 환상과 미신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신의 어둠에서 벗어나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고
삿된 욕망과 무지에서 벗어나 불행과 고통없이 살아가라고 하셨다.
부처님에게 있어 이 세상은 우주의 진리가 나타나 있는 실상의 경전으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그대로 완전한 진리가 되었다.
즉, 자연이야말로 진실이며
세상의 모든 법이 나타나있는 가장 위대한 경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 부처님이 전한 법을 사실에 관한 법이라 하여 유법(有法)이라고 하는데
부처님 법을 연구 전파하기 위해 모인 초기 승단을 유부(설일체유부)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사실에 근거하여 상호간의 인과관계를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리(법, 다르마)를 밝혀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은 있다'고 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로 나누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을 제법분류법이라고 하는데, 소위 5위 75법이라 하여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세계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고
이를 다시 75가지로 나누어 세분하였다.
그들은 이세상의 모든 존재는 유적 요소로서
이들의 다양한 인과관계에 의해 세상이 이루어지므로
연기법으로 모든 것이 해석된다고 본다.
즉 모든 것은 유적 존재로서
부처님의 해탈 또한 인과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유적 존재이며
법(法)도 삼세 어디서나 존재(法體恒有)하는 유적요소라 하여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부처님 사후 600여년이 지나 나타난 대승론자들은
법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 실체를 공이며 환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사실법을 가르쳤을 뿐
근기가 높은 제자들을 위한 참된 법으로는 오직 공한 이치를 남겼다고 하는
기존 교리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즉 부처님은 우주의 근원을 꿰뚫어본 분으로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에 불과한 초기불교의 교훈만 가르치지 않았으며
염화시중의 미소와 같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이치와
정법안장과 같은 비법을 남겼는데(不立文字 敎外別傳)
그 깊은 뜻과 비법은 수제자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지다가
대승불교에 이르러 그 숨은 뜻이 나타나 철학적 종교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후대에 중국에서 발전한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멸후 약 500여년이 지나 점차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인도에서 성행한 여러 불교경전들이 한꺼번에 중국으로 밀려들어오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인도에서의 불교의 변천과정을 잘 모르는 중국의 학승들은
이 모든 경전들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의 알음알이로 그 내용의 철학적 깊이와 전후과정을 나누고
이를 순서대로 분류하여 정리하려 했다.
이러한 흐름을 교판론이라 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인 중국 천태종의 지자대사는
부처님의 일생을 다섯 시기로 나누어 불법의 변천과정을 기술하였다.
첫째는 화엄시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 21일 동안
불교 최고의 진리인 화엄경을 설한 시기로 보았으며
둘째는 아함시로 그후 12년 간 일반중생을 위한 소승교를 설한 기간으로 보았고
셋째는 방등시로 대소승의 법을 함께 설한 8년간의 기간이며
넷째는 반야시로 반야경을 설한 그 다음 22년간의 시기이며
다섯째는 법화열반시로서 생애 마지막에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판론은 서지학의 발달로 전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반야경과 화엄경과 법화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부처님 사후 600-800년 사이에 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남방 상좌 불교인들은 아직도 대승불교가 비불설이며
자신들의 가르침이야 말로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한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정통적 가르침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대승의 주장대로 대승경전의 가르침과 공사상이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넘어서는 더 완전하고 미묘한 법일까?
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상을 꿰뚫어본 삼세의 스승이라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는 한
아무도 해탈의 경지에서 본 부처님 법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아직까지 역사속에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법이 나왔다는 것은
그것이 부처님 법을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왜곡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만약 대승경전을 편찬한 이들이 진정한 정각을 얻어 완전한 진리를 보고 대승경전을 지었다면
내가 깨닫고 보니 실상이 이러하였다고 당당히 자신의 이름으로 대승경전을 지었겠지만
부처님 사후 600여년이 지나 나타난 모든 대승경전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가탁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논리를 펴고 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초기 경전에는 인과의 이치와 실상의 세계 이외에는 없다.
만약 그분이 자연의 경전에서 본 사실적인 모습과 이치 이외에
다른 초월적인 뜻과 이치가 존재하는 것을 보셨다면
반드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며 초기 경전에 그런 내용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났을 때
초기 500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오면서
온갖 견해와 논리로 부처님 법을 샅샅이 해부했던 상좌부에서
대승경전을 단순한 이야기책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고
대승의 공법을 불법을 파괴하기 위해 나타난 악마의 설이라고 전면 부정했던 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초기 경전 속에 그러한 이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불교의 변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변질되고 대승화했는지 그 변천과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각자 자기와 인연있는 지역으로 흩어져
부처님의 법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배움은 제자들의 기억과 이해도에 따라 달랐으며
전하는 과정에서도 인도인들의 정서에 맞게 힌두적 관념을 차용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연스레 법의 변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는 문자문화가 발전되지 못한 시대로서 주로 입에서 입으로 경이 전해졌는데
그런 관계로 최초의 경전은 부처님 사후 약 200여년이 지나도록 편찬되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도 많은 변질이 나타났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도 한 다리만 건너가면 말이 왜곡되는데
당시 글도 없는 상태에서 10여 세대를 지나면서 구전된 법이
온전한 상태로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이처럼 입을 통해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문자화되어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것은 BC 235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때였다.
이때 그동안 각 부파불교에 의해 발전되어온 논리들이 논이라는 형태로 정리되어
기존의 가르침과 계율을 합해 경·율·논 3장의 대장경으로 편찬되었다.
바로 이 경이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남방 소승의 팔리어경전의 기초가 되는데
이때는 상좌부의 분열이 이루어지지 않고 힌두교가 정식으로 나타나기 전이라
비교적 부처님의 원어가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때 이미 법의 변질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고 불멸후 700여년이 지난 AD 125년 경
인도북부의 쿠샨왕조 카니시카왕 때 대대적인 4차 결집이 이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7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그 당시 위정가들에게 차원높은 고급종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통치에 불교를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때는 각 부파의 아비달마 논의가 거의 완성된 상황이라
기존 팔리어 삼장에다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광범위한 주석을
덧붙여 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경은 팔리어로 쓰여진 3차 경전과는 달리
힌두 귀족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데
그만큼 인도 문화와 힌두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 경전들이 북방으로 전해져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역대장경의 원전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초기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역 아함경은
부처님 사후 약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화가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이때는 이미 대승불교가 흥기하기 시작한 때라 힌두교의 영향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 초기불교 속에 나타난 법의 변질을 살펴보자.
부처님 법이 그 진리성으로 말미암아 널리 전해지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여러 부파가 형성되고 각 집단별로 고유한 이론이 전개되었다.
이를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그 수는 초기의 『설일체유부』를 비롯하여 20개에 달한다.
그들은 부처님이 사람들을 만나 행한 질문과 답변 속에 관련된 사실과 이치를 모두 집어넣어
완벽한 문장과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조금의 흠도 없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여
각각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으며
그 특성에 따라 일정한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관계있는 교설을 숫자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으로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이 순서대로 배열하는 방법과
동일한 주제를 한 곳에 모아 정리하는 방법이 대표적이었다.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없는 단어들로서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정의하고 개념화한 것들이다.
그들은 법(다르마, 진리)이 무엇이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논리적인 체계 속에서 차근차근 틀을 구축해 갔다.
초기 경전의 내용이 복잡하고 관념적이며 나열적인 것은
바로 제자들의 이러한 노력 덕분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불교는
부처님이 일상 속에서 중생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위상에 맞게 가공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니 그 진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유와 논리로
사성제, 팔정도, 무상. 무아라는 개념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린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이 완전한 시각에서 본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지은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그들이 정의내린 주요명제들과 부처님의 말씀간에 나타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철학적 논리를 전개하게 되는데
부파불교간의 치열한 논쟁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쟁점이 무아론이었는데
그들이 생명의 주체를 무아로 결론 내리자
이는 과거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며
다음 생에 분명히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즉 수기를 주었다는 것은
바른 행위와 공덕을 다음 생에 이어가는 윤회의 주체가 있다는 말인데
아의 주체가 없다고 하면 업을 이어가는 윤회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정법과 본래 취지가 많이 훼손되게 된다.
그럼 먼저 삼법인 사성제로 대표되는 불교의 기본명제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에서는 3가지 기본원리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삼법인」을 설정하고 있으며
여기에 열반적정을 넣어 사법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부파의 논사들은 모든 존재는 연기의 원리에 따라 쉴새없이 변화하므로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므로 영원하지 못한 일체는 고통스럽다고 정의 내린다.
그러나 연기론의 본래 뜻은 오늘날 불교인들이 배워왔듯이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여, 독자적인 게 없으므로 실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은 완전하고 조화로운 법계로서
모든 존재는 원인과 결과의 이법에 의해 서로 이어지면서
좋아지고 나빠지는 변화를 계속하고 있으니
변화의 주체인 인간이 좋은 원인을 지으면
밝은 삶과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즉 연기론은 오늘날 불교가 주장하듯이
세상의 무상함과 고의 원인을 밝히려는 이론이 아니라
세상의 기본원리인 인과법의 선언이며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실천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 논사들은 모든 것이 환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염세적인 사고방식에서
우주의 가장 기본적 원리이며 삶의 실천원리를 밝힌 위대한 법칙을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므로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허망하다고 하는 염세론으로 변질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므로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상하고 고통스럽다면
이 세상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완전한 법계라 할 수 없을 것이며
이렇게 고통스럽고 헛된 세상에서 굳이 부처님 법을 배우고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다음 제법무아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날 불교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며
나라는 것도 무상하여 결국 사라지므로 나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의 실체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부처님은 현생에서 지은 것은 인과의 법에 의해
후생의 나에게 어김없이 이어지므로
팔정도로 심신을 닦고 공덕을 쌓으면 마침내
그 선근이 완성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제자들에게 부처가 될 거라는 수기를 주셨던 것이다.
만약 무아론의 논리대로 나의 실체가 없다면 좋은 공덕과 선근을 익혀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수기를 받는 윤회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나쁜 원인을 짓지 말고 모든 좋은 원인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칠불통계(諸惡莫作 衆善奉行)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아설이 오늘날 불교의 기본 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법무아는 불교의 기본원리로 윗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영혼의 실체에 대한 문제는 부처님이 논의를 거부했던 14무기 속에 들어 있는 사항인데
후대 논사들에 의해 제법무아라는 결론으로
오늘날 불교의 윗자리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정의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부처님은 영원히 불변하는 나의 실체는 없지만
윤회를 통하여 경험의 지속성과 통일성을 가지며
변전하는 윤회의 주체는 있다고 말하셨다.
불경에서는 이를 비유로써 모순없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을 생각해보면
비록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 가닥은 없지만,
각 고리가 서로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고리 사이의 연결이 있어 동일체로서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인간의 단일성과 지속성도 같은 것은 아니지만
긴밀한 인과적 연결에 의하여 이어지기에 전체적으로 동일성을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촛불을 생각해보자.
촛불은 단일한 불꽃으로 지속적인 빛을 주며 하나의 촛불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불꽃은 매순간 마다 타오르는 밑부분의 기름이 다른 것이니
현재의 빛과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앞의 불꽃과 곧바로 이어지는 뒷 불꽃 사이에
앞이 없으면 뒤가 존재할 수 없는 긴밀한 인과적 연결이 있기에
불꽃이 하나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영혼도 이와 같다.
그동안 윤회주체와 관련한 논쟁은 초기불교 이래로 수천년간 이어져 왔으며
아직까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철학적 논란 대신에
의식과 윤회와 의식의 주체에 대한 실상을 밝힘으로써
무아의 논의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부처님의 법은 추상적 논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모든 희론을 잠재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기운의 형태 속에 의식이 깃들어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살아있을 때 육체 속에 거주하면서
완전한 인과법에 따라 삶의 모든 경험을 자신 속에 담게 되고
죽어서는 그 사람의 결실로 분리되어 이 법계를 맴돌며 후생의 원인이 된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영혼은
자신이 지은 업과 인연에 따라 후생을 받게 되는데
성경말씀처럼 잘 지은 열매는 풍성한 수확을 낳고 잘못된 쭉정이는 버려지게 된다.
즉 욕망과 잘못된 삶으로 한과 집착 속에 죽은 이는
그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하고 지옥의 환상 속에서 고통을 받다 흩어지거나 소멸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 인간의 근본을 크게 망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인간으로 나며 그보다 더욱 승화한 자는 더 높은 차원인 천상에 나게 되는 것이다.
즉 바른 삶의 길을 알고 좋은 원인을 지은 자는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해져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천상에 오르며
그 좋은 선근으로 말미암아 밝은 지혜와 좋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
마침내 해탈이라는 인간완성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과 재생의 흐름 속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관문이 있다.
즉 한알의 밀알이 완전히 썩지 않고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이나 신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근원의 세계 속에 자신을 묻어야 하는데
이때 통과하는 관문을 반야라 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윤회하게 되는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깊은 잠에 빠지면서 반야로 스며들게 되는데
이곳에서 기존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상인 것이다.
이곳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근원의 자리여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는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 중에서는 모든 업이 사라져
마음이 청정해진 사람만이 이곳에 들 수 있으며
이곳에 든 자는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근원에 닿을 수 있는 맑은 마음이, 모든 것과 통하여(=하나가 되어),
모든 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듦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여 새롭게 태어난 영혼은 깨끗한 상태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관계로 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고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과거의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만
과거 자신이 습득했던 지혜와 성품과 자질 등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콩을 심을 때 그 출생지가 어디인지 몰라도
콩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콩이 어떤 품종이며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도 과거에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보면
과거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윤회의 흐름 속에는 육도를 오고가는 영혼의 이합집산이 있어
전생의 나와 후생의 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윤회의 흐름에서 인간의 영혼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생명의 질서에 의해 규율받는다.
그래서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고 무거운 것은 낮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약하고 희미한 것은 흩어지는 이치에 의해
승화한 영혼은 높이 오르며 타락한 영혼은 무거워 낮은 곳을 헤매다
고통 속에 흩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완성으로 나아가는 영혼은 그 의식이 맑게 정화되어 점점 결정체(해탈심)가 되어가나
유계를 헤매는 영혼들은 인간의 근본도 간직하지 못하고 흩어져
미물의 영체나 풀의 기운이 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마치 고등생물의 경우 종자를 적게 낳으나
하등생물은 많은 종자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인간의 영혼세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영혼도 엄정한 생명의 질서에 의해 흩어져
다른 많은 생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미물의 영체가 승화해 인간의 영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영혼이 후생의 영혼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이 영혼과 아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도 我가 아니고 저것도 아가 아니라고
아에 대한 단정을 피하셨으며(14무기)
나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은 주장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이론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무아론이 정통이 되어 있으니
그 왜곡됨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상이 이렇다고 하자, 기존에 윤회로 인한 동일성을 굳게 믿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존엄성도 없이 인과의 질서에 의해 산술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알지 못한다면
지금의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미래의 나에게 미안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간에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업은 완전한 인과법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좋은 거름을 받아 잘 자란 콩은 반드시 다음번에 더 많은 콩을 맺고
황량한 곳에서 비실거리며 자란 콩은 반드시 쭉정이가 많듯이
앞뒤간에 기억은 이어지지 않아도 과거에 지은 일들은
반드시 후생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니
양심있고 이성있는 자라면 자신이 지은 원인이 가져올
필연적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가 공중에서 펑하고 태어난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적 고리로 이어지는 동일 연속선 상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기적 윤회설이 인간의 양심과 윤리에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후생의 결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책임을 질 때
인간의 양심과 도덕적 기준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고 함부로 악업을 짓는다면
나의 업보는 후생에 악업을 지닌 인간 속에 나타나 세상을 어둡게 할 것이며
나의 가족과 친지와 후손들은 이러한 악업을 지닌 인간들에 의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인심이 동굴이나 정글 속에 살았던 옛 조상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법과 양심을 무시하고 짐승들보다
더 사악한 전쟁을 일삼고 있는 것은
과거 우리 인간들이 역사를 지어오면서
설마 나의 업이 후생에 이어지지 않겠지 하는 근시안적인 무지에서
함부로 저지른 악업의 결과를 지금 이땅에 받고 있는 것이다.
사성제(고집멸도)에서도 이러한 왜곡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
먼저 고성제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날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환이며
생노병사는 삶에 따른 필연적 운명이기에
삶은 고이며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순환을 통해 끝없이 이어지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죽고 다시 나는 것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우주의 기본질서이니
이러한 장엄한 질서를 무의미하다거나 고통이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무의미한 윤회의 쳇바퀴를 끝없이 돌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합이 백합을 낳고 수선화가 수선화를 낳듯이
불성이 자신의 씨앗을 뿌려 해탈이라는 완성의 열매를 맺으려는
자기 순환의 원리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성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나게한 이유는
모든 것이 움직임과 순환을 통해 자신을 존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움직임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성도 고요히 적멸에 머물지 않고 불성을 내여 활동과 순환을 일으키고
해탈이라는 완성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완전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탄생은 완전한 불성의 자기 표현이며
우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축복스럽고 귀한 인연을
현 불교에서는 삶 자체를 무명의 소산이며 환으로 보기 때문에
고통과 무상으로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무명의 소산이라고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고통에 빠지는 원인을 무명이라 했으며
진실과 바른 이치를 잘못 봄으로써 생겨나는 어둠을 무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올바른 이치와 실상을 모르는 중생들의 삶인 것이며
진실을 알고 진리의 길을 가는 선근있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인간완성에 이르는 축복의 장인 것이다.
멸성제(滅聖諦)
오늘날 불교는 세상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환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집착과 분별을 버리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마저 버리면 해탈이 온다고 한다.
즉 선과 악에 대한 구별과 깨달음을 향한 노력도 업의 일종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본래부터 여여한 진여(불성)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힌두사상의 영향에 의해 불교로 들어온 관념들이다.
힌두사상에서 이 세상은 절대자 브라마(梵天)가 심심풀이 유희(리라)를 위해
환력(幻力;마야)으로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본질은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오직 브라만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현상의 실체가 공임을 깨닫고
모든 분별과 집착과 존재를 벗어버리면 곧 바로 해탈이 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법과 힌두사상의 반대되는 차이점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과법에 의해 한치의 오차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바른 원인을 지으면 점점 그 선근이 커져
마침내 좋은 세상과 인간완성을 얻게 된다는 인과에 의한 유적 완성을 말씀하셨는데
힌두즘의 마야사상은 이 세상이 모두 환상이고 고해이니
세상이 한바탕 꿈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어떠한 구별과 노력이 없이도 곧 바로 진여에 도달하게 된다는
무법론과 무위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선과 악,
친해야 할 것과 친하지 않아야 할 것,
정법(正法)과 사법(邪法),
연기법(緣起法)과 외도의 법(非緣起法)등을
옳고,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것을 바른 견해(正見)라고 했으며
이를 실천하는 것을 정업(正業)이라고 했다.(아함경)
즉 부처님은 사실을 바로 알고 바른 이치를 실천함으로써
좋은 자신을 만들고 공덕을 지으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대승과 브라만 사상은
선악을 구분하는 것을 분별이라 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하며
선업도 업의 일종이니 모두 버리라고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사실을 무시하고 정법을 부정하는 말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버리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해 태어난다.
이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순환법칙이다.
모든 씨앗이 피어나서 그 열매를 맺을 때 자신을 완성하듯이
불성도 인간을 내어 그 불성을 키워 해탈이라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과 힌두사상은 현실을 부정하고 인과에 의한 실천을 거부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있으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인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타고난 근본을 완성시켜 열매를 이루는 것은
근본과 합일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피어나기 전의 어린 씨앗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열심히 가꾸어 열매를 맺는 것은, 타고난 근본을 완성시켜
순환의 법칙을 완성시키는 것이니
후자가 생명의 본질에 충실한 삶인 것이다.
이것이 도성제의 진정한 뜻이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선근의 길과 수기의 가르침과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이론은 힌두즘의 마야사상과 이어져
모든 것을 공과 허무로 돌리고 선악의 구별과 삶의 실천마저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불교를 믿는 나라에는 밝은 이치와 실천적인 삶이 사라지고
무지와 환상, 무기력과 체념, 어둠과 불행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불교 속에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힌두적 감염은 부처님 사후 600년이 지나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성립>
사실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데는 기존 소승불교의 잘못도 크다.
부파불교의 진행으로 교리의 이론화와 힌두적 관념화가 진행되면서
초기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은 진리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갔고
기존 승려집단은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고급종교가 되어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아래 중생들과 유리된 엘리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사변만 일삼으며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만 추구하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을 구원하는 참된 불교가 되자고
대승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존 승려들의 이기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을 '소승'이라 공격하고
스스로를 모든 것을 담는 ‘대승’'이라 칭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키고 대승경전을 편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의도는 좋았지만 그들에게는 진리의 빛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수단을
당시 중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힌두 신앙과 철학으로부터 차용했던 것이다.
그들은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부파불교를 오염시켰던 브라만 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AD 1세기경에는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대승경전이 출현하자 기존 불교교단에서는
이야기책에 불과하다고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역사와 법통을 가진 거대한 기존 교단에서 대승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대승의 교리가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면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승의 이론적 기반인 공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공사상은 3세기 경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는 여러 저술들을 통하여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기존 힌두교의 주장들을 모두 비판 배척하게 된다.
용수는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므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의 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며 모든 실체는 공하다고 한다.
자성이란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상호의지하는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자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본질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최고의 진리(Param rtha, 眞諦, 勝義諦)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서
인간의 사고 내지 인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말한다.
이에 비해 덮힌 진리(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간의 시각과 사유에서 본 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의미한다.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깨달음도 모두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으로
환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마음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고통스럽던 꿈은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을
왜곡된 연기설로 이론적으로 논증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위상을 정립하였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불교를 사실에 관한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업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었지만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반야는
철학적 사유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공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은 범부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온을 필두로 하는 제법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있는 환상(덮힘)에서 벗어나면
본래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지도 않은
제법의 본래 모습인 진여를 보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브라만의 마야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꿈이나 환과 같으며
제법은 본래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차별관념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용수는 부처님을 넘어서는 정각을 얻지 못하였으면서도
관념과 논리로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을 부정하고
사실과 이치에 입각한 초기 가르침의 근본 사상인 삼세실유론 마저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논리가 불교의 차원높은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말법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본질이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차이가 거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이슬람권의 침입으로 인도사회가 흔들렸을 때
힌두교는 살아남았지만 불교가 사라진 것은
불교의 진리로서의 생명력과 특이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힌두교만 믿어도 불교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식파>
중관파와 더불어 대승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상은 유식파이다.
이들을 요가짜라라고 하는데 그 말은 '요가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요가선정의 체험에서 오는 마음의 작용을 중시하여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공 대신에 마음을 이 우주의 실체로 본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도 명상수행의 전통에 따라 오랜 동안 선정을 닦은 수행자들은
요가선정의 과정에서 의식의 근원으로 느껴지는 텅빈 마음의 세계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공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근원인 마음이 깨달음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도 하여
업과 깨달음과 불성의 관계를 밝히는 여래장연기설과
인식의 근원을 밝히는 유식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들은 기존에 계속 되어오던
불교의 근본적 모순인 무아설과 부처님의 수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정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근본을 말라식과 아뢰야식으로 나누어 논리를 전개했다.
즉 기존 불교에서 인간의 감각을 6식(안이비설신의)으로 나눈 것에 더하여
그들은 2식(나의 주체인 말나식과 우주의 주체인 아뢰야식)을 추가하여
8식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즉 인간의 자아의식의 바탕에 깔려있는 불변의 의식체를 우주의 근본으로 인식하고
자아의식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우주의 근원인 불성과 이어질 수 있다고 하여
자아의식인 말나식과 우주의식인 아뢰야식의 상호관계와 깨달음의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그들은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vij na)을 세세생생 윤회하는 주체로 보았는데
이것이 요즘 말하는 자아의식에 해당된다.
그들은 우주와 자아의 근원적 바탕인 아뢰야식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아애(我愛) 등 근본번뇌가 일어나고
이들이 업의 흔적(업종자)을 남기게 되는데
제7 말나식이 이것을 '나와 내것’이라고 착각함으로써
번뇌의 근본인 탐(貪)·진(瞋)·치(癡)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선정을 통하여 이러한 업종자가 환임을 깨닫기만 하면
말나식은 저절로 사라지고 아뢰야식은 불성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업종자가 환임을 깨닫는 것은
세속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요가 수행을 해야 하는데
오직 선정에 의해서만 업이 소멸되고 아뢰야식으로 돌아가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말라식(칠식)과 아뢰야식(팔식, 근본식)의 관계를 파도와 물에 비유한다.
파도가 물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말라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파도가 잠잠해지면 파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맑은 물만 남듯이
파도가 환임을 깨달을 때 모든 번뇌와 자아(말나식)가 사라지고
아뢰야식(불성)만 남아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유식학파의 핵은 바로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즉 선정으로 홀연 모든 분별과 인식이 환임을 깨닫으면
아뢰야식에 얼룩진 업종자가 저절로 사라져 중생심이 불성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의식을 한번 크게 돌려 우주의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한 순간에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 유식론의 요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을 부정하고 법을 왜곡하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그들은 부처님이 가르친 삶을 통한 실천과 인과법에 의한 공덕보다는
일체를 마음의 장난으로 보고 선정으로,
모든 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관념적인 방법을 택함으로서
자신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인을 하나도 짓지 않고
오직 마음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완전한 우주의 법칙인 인과법을 어기고
괭이를 대지 않고 땅에 있는 보물을 캘려고 했으며
산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했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성행한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선정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정각을 이룬 자가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살아 숨쉬는 이세상은 환상이 아니며
우리 속에 내재되어 삶에 영향을 주는 업 또한 환상이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에 의해 수많은 생 동안 지어놓은 원인들이니
가만히 앉아 무명과 환임을 깨닫는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치열한 삶을 통해 뉘우치고 반성해 큰 자각을 얻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그토록 사실을 중시하고 팔정도의 실천을 강조하신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께서 명확하게 밝히신 바 있다.
부처님이 선정의 최고단계인 비상비비상처에까지 오르셨으나
마음의 어둠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해탈을 얻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인과의 실천을 통해 업을 지우려 하지 않고
기존의 전통에 얽매여 선정으로 모든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나의 깨달음은 선정과 고행으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통해 쌓은 공덕이 세상을 덮을 정도가 되어
그 선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땅에 와서 해탈을 얻은 것이니
모든 제자들은 부지런히 법을 배우고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업과 인과의 이치를 사실로 보고 삶의 실천지침으로 삼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며 그림자로 보아 벗어 던지느냐에 따라
부처님 법과 힌두 및 대승사상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중심인
선불교도 바로 이러한 유식론적 수행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선가에서는 선수행은 염화시중의 미소로서 마하가섭에게 직접 전해진 법으로서
부처님은 하근기를 위해서는 염불과 기도를, 중근기를 위해서는
팔정도에 의한 연기적 수행을,
상근기를 위해서는 홀연 깨닫는 선수행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말이며
초기불교의 가르침 속에는 그런 구절이 전혀 없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요가행과 고행을 모두 경험하시고
‘나의 깨달음은 고행이나 명상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고
그당시 유행하던 수행법의 헛됨과 실체를 명확히 밝혔건만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그 주변에 있던 마음이 어둡고 게으른 자들은
자신들의 밑천을 버리기 아까워 환상을 좋아하는 후인들에게 명상술을 가르치면서
불교의 정법인 인과의 실천법이 사라지고
가만히 앉아 단 한번에 요행을 노리는 명상법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소중하고 진지한 것이어서 잠시라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인간은 실천을 통하여 자신을 닦아야지
현실과 유리된 명상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을 닦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활동을 통하여 변화하며
자기가 짓는 원인에 따라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서 하는 명상이나 호흡같은 것은 원인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을 좋게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땅으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명상기법을 수행하게 되면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인을 짓지 못하여 결국 쭉정이 인생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의심이 든다면
열심히 명상을 하고 호흡을 한 후 세상에 나가 현실문제를 해결해 보라!
바른 이치와 맑은 마음을 버리고, 공을 받아들였으니
머리는 텅비고 눈은 흐려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인연에서 멀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이며, 세상이 흘러가는 사실적인 이치이니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면 삶이 허황하게 되며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를 어기면 삶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요즘 젊은 시절에 잘못된 관념이나
이상한 단체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이 아닌 환상에 빠져 이치에 맞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한치도 어김없는 인과의 법칙이 주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선물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허황된 환상과 거짓에 빠져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잘못된 관념에 빠진 사람들은 삶도 수행이며 명상도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명상은 인생을 닦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마음을 보는 기술에 불과하다.
사람은 삶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욕망과 습을 버리며,
맑고 강한 정신을 얻을 때, 진정한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지
명상을 한다거나,
소리나 빛에 집중하거나,
기를 돌려서는 결코 자신의 정신을 닦을 수가 없다.
조용히 명상에 들어 모든 자극을 끊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욕망의 흐름이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마음이 고여 우주의 모습과 법이 비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수행자들은 이러한 마음의 고요 속에 비치는 신비를 보고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이 생각하여 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갖고 있는 작은 신비를 일시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해탈심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고요히 앉아 있음으로
업이 활동력을 잃고 잠시 가라앉은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세상 인연을 만다면 업이 활성화되어 마음이 온통 흙탕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정각을 얻은 자의 해탈지심은 업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쌓여있는 모든 업의 뿌리를 뽑아내어,
다시 헝크러질 먼지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려도 더 이상 흐려질 것이 없으며,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진여가 빛나
세상 모든 일이 그 위에 비쳐, 모든 법을 보고 지혜를 밝히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선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보림행을 하거나 면벽 구년을 하였으면서도
결국 세상에 아무 빛도 전하지 못하고 말없이 스러진 것은
그들이 흙탕물이 가라앉은 마음의 고요만 보고
모든 흙먼지가 사라진 밝게 빛나는 진정한 반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를 빚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법칙인 인과법에 어긋난 수행으로
수많은 생을 통해 실질적으로 쌓아온 사실적인 업을 무시하고
조용히 앉아 아무런 원인도 짓지 않고 생각만으로 이를 지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따라서 수많은 각자가 나타났다는 동양사회에 아직도 환상과 어둠이 넘치고
사람들의 삶이 무지와 고통 속에 헤매는 것은
아직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과 같은 정각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요즘 많은 수행단체에서는 유식론의 기본 관념과 논리를 이어받아
모든 것이 공하고 마음 조차도 환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으로
더 이상 구할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대자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허공을 보고 마음의 희열을 얻은 들
혜해탈을 얻어 실상을 보는 눈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깨달음은 법과 지혜로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나 혼자만의 기쁨이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 중생을 축복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밝히는 지혜가 없는 해탈은 정각이 아니라는 지적에 대해
세상은 무명의 소산으로 모두 환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 세속에 얽매지 않는다고 하며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불성이고, 모든 중생이 다 깨달은 존재이므로
더 이상 구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처절하게 아파하는 수많은 이웃을 두고
모든 것이 부처이고, 불성이며, 환이라고 오도하며, 혼자 열락에 머무는 것은
비양심적이며, 사실을 무시하는 착각이다.
부처님이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렀으면서도 보리수 아래서 목숨을 건 수행을 한 것은
중생들의 아픔을 곁에 두고 혼자서 열락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며
나의 경우에도 백회가 열리는 황홀감 속에 걸리지 않는 안락을 누렸지만
그곳에 머물 수 없었던 이유는 이웃의 아픔을 두고 혼자만 희희낙낙하는 것은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 유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동양에서는 수천년동안 이러한 논리와 관념에 의해
많은 수행자들이 세상을 버리고 혼자만의 기쁨에 머물렀기에
그들은 삶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자기 인생을 쭉정이로 만드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관념적인 말법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상이 공이며 환이라고 자신마저 던져버리면
이때 주인이 사라져 버린 텅빈 의식 속에 떠돌던 공한 영들이 들어와 지배하게 되니
이를 공귀라 한다.
공귀의 노예가 되면 세상 모든 것이 공하고 무상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실의 세계를 부정하고 영의 세계와 통하여 혼자 열락에 빠져 환상 속에 살게 된다.
이때 그는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영의 특성을 이용하여 한 곳에 앉아서도 다른 곳을 보거나 남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도가 높은 사람으로 착각하지만
이는 자아상실에 의한 영적 현상으로,
자아상실과 자아완성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며 그 차이는 천상과 지옥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요즘 이러한 잘못된 관념과, 공귀의 영향으로, 수많은 구도자들이
자아와, 양심과, 이치를 버리고, 미치광이처럼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와 같이 자아를 상실하면, 눈앞의 일을 보고서도 알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이처럼 불교는 정법 이후 수천년이 흐르면서
기본교리에서부터 수행법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불교를 통해 참된 진리와 생명의 빛을 얻고 해탈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변질된 법은 거짓된 법보다 위험하다.
거짓된 법은 사람들이 미리 알아 경계하지만
변질된 법은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기 쉬운 까닭이다.
변질된 법은 상한 음식과 같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먹고 나면 생명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듯이
변질된 법도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그 내용 하나 하나가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오도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을 병들이고 삶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육체가 병드는 것은 한몸이 소멸하는 것에 그치지만
정신이 병들게 되면, 병든 생각과 습이, 세세생생 그 영혼을 갉아 먹어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와 가치를 망치고,
윤회의 종자마저 소멸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세상의 실상과 이치를 밝힌 부처님의 정법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부처님 법 중에 사실과 이치에 근거한 가르침을 찾아
이를 근본종지로 삼아야 한다.
부처님 법은 환상과 무지와 거짓을 깨고, 실상과 이치를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라는 것,
완전한 자연법인 인과의 법칙이 한치의 오차없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윤회하고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완성의 경지인 해탈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체로서 모든 것이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의 변화 속에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나가 있다는 것,
악한 일에는 반드시 나쁜 원인이 있고 좋은 결과에는 반드시 좋은 원인이 있다는 것,
진리를 배우고 행하면 반드시 인간완성이 온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진실이며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도 선과 악을 밝혀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열심히 행하며 마음을 정화하여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라고 공통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불교에서 이러한 실상에 입각한 사실과 자연의 흐름에 따른 진리를 모은다면
다시 한번 부처님의 정법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보람있고 참된 삶을 이루며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글쓴이 : 진리의 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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