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자유와 해탈을 얻으려면 비우고 다만 흘러가라

장백산-1 2012. 2. 24. 13:21

 

 

           자유와 해탈 얻으려면 비우고 다만 흘러가라

            

 
 

 

 

 

 

 『장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중국 고전 번역가로 유명한 웨일리(Arthur Waley)는 장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하고, 禪佛敎를 서양에 소개한 일본인 선사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도

장자가 중국  哲學者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 했다.

그 외에도 20세기 美國의 가장 위대한 思想家 중 하나로 알려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유대인으로 세계적 철학자로 꼽히는 마틴 부버(Martin Buber),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大家

마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하버드 대학교 세계종교 연구소 소장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등

많은 사람들이 장자에 매료되었다고 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장자의 思想은, 불교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중에 中國  당(唐)代에 와서 선불교(禪佛敎)를 꽃피우는데 直接的인 契機가 되었다.

 

특히 9세기 유명한 선승 임제(臨濟)야말로 장자의 참된 계승자라 일컬어질 정도이다.

禪佛敎는 事實 印度 佛敎를 아버지로 하고, 중국 道家思想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후예라 해도 무관할 정도로 道家 思想, 特히 장자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오늘은 장자와 그와 그의 후학들이 남긴 『장자』에 대해 알아본다.

 

장자의 생존연대를 보통 서력기원전 369~286년으로 본다. 이 연대를 받아들인다면 맹자(371-289)와

같은 때 사람이다. 그러나 장자도 맹자를 몰랐던 것 같고, 맹자도 장자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의 책에는 相對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장자는 전국(戰國) 시대 송(宋)나라의 옻나무 밭에서

일했다고 한다.

 

‘장자’는 그가 남긴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원후 4세기 곽상(郭象)이라는 사람이 그때까지 떠돌아다니던 사본을 모아 32편으로 정리했는데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자』라는 책으로서 내편(內篇)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內篇 7편만 장자의 글이고 나머지는 장자의 後學들이 장자의 이름으로

덧붙인 것이라고 본다.

 

 內篇마저도 모두가 장자 자신의 저작인가 하는 것도 모를 일이고, 심지어 그것이

『道德經』보다 미리 기록된 것이 아닌가 보는 설까지 있다.

 그러나 이런 歷史的인 배경과 相關없이 거기 실린 思想이

‘宇宙와 人生의 깊은 뜻’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하는 事實에 더욱 注目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敎訓的인 가르침이 거의 없다.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데 反하여 『장자』는 거의 全部가 이야기로 되어 있어 읽는 이가 거기서 自己 나름대로 自己에게 必要한 깨우침을 얻도록 되어 있다.

事實 장자는 무엇을 가르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常識的이고 通俗的인 固定觀念,

二分法的 思考方式, 거기에 基礎한 因襲的 世界觀이나 宗敎觀의 內的 모순을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스스로 打破하여 自由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 줄 뿐이다.

 

그러나 『장자』에서 一貫되게 흐르는 몇 가지 主題를 잡아보라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道는 『도덕경』에 나오는 道의 槪念과 基本的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道는 宇宙의 超越的인 窮極의 實在이기도 하지만 同時에 萬物 속에 內在하는 存在의 根源이기도 하다.

道는 땅강아지나 개미에게도 있고, 심지어 배설물 속에도 있어 그야말로 “없는 데가 없다”고 했다.

이런 思想을 요즘 말로 고치면

窮極實在의 超越과 內在를 同時에 강조하는  ‘萬有在神論(panentheism)’이라 할 수 있다.

 

‘自由롭게 노닐다’[逍遙遊]라는 제목이 붙은 제1편 첫머리는

북쪽 깊은 바다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가 變해

그 등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붕(鵬)이라는 새가 되고,

그 鵬새가 九萬里나 되는 하늘 길에 올랐다(鵬程)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것은 人間이 生來的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實存의 限界에서 벗어나

自由로운 存在로 超越할 수 있다는 可能性과

그 可能性을 實現한 事例를 말해주는 象徵으로

장자의 全切 思想을 集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장자는 어느 면에서 人間 解放과 거기에 따르는 自由를 선언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장자에게 있어서 幸福은 우리에게 주어진 天性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학의 다리가 길면 거기 맞추어 긴대로 살고,

오리의 다리가 짧으면 거기 맞추어 짧은 대로 사는 것이 幸福이다.

학의 다리를 짧게 하려 하거나 오리의 다리를 길게 하려고 無理하게 일을 하면

不行이 따른다는 것이다.

 

바다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새를 宗廟 안으로 데리고 와 그 새를 위해

술과 음악과 소고기 등으로 待接했지만 그 새는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새는 새 나름대로의 天性을 따를 때만  幸福해 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모든 政治 制度나 法律, 道德 같은 것도 基本的으로 모두 人爲的이기 때문에

人間에게 幸福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배격했다.

 

장자는 우리가 어느 면에서 모두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實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歪曲되게 認識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른 表現으로 하면 ‘원숭이’ 같다는 것이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다가  至今부터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화를 내었다. 이른바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것이다.

事物을 兩쪽으로 볼 수 있는 ‘양행’(兩行)의 길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結局 우리 人間들도 마찬가지다.

事物의 兩面, 事物을 여러 가지 視角으로, 혹은 全切的으로 보지 못하고 因習的 視角에서 一面만을 보고 그것을 絶對化하므로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喜悲하거나 거기에 목숨을 건다고 하는 것이다.

 

‘나비의 꿈’이라는 장자의 이야기에서처럼

世上은 나비와 장자 사이에 거침이 없이 넘나드는 流動的 變化의 場이라는 것이다. 多角的 視角에서

봄으로 가늠할 수 있는 事物의 眞實을 더욱 깊이 볼 때 그만큼 더욱 自由스러워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事物을 더욱 깊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結局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常識的이고 因習的인 二分法的  의식(意識)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意識을 바꾸는 方法의 한 가지 예가 바로 ‘술(術)’이 아니라 ‘도(道)’로 소(牛)의 角을 뜨기에

눈을 감고 ‘神이 나는 대로’ 해도 完璧하게 할 수 있는 境地에 이른 포정(?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런 意識의 變化가 생기면

 ‘아침 햇살 같은 밝음’(朝撤)을 얻어 ‘하나를 보는’(見獨) 體驗이 可能하다는 것이다.

장자가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마음 굶김’(心齋), ‘나를 여읨’(吾喪我), ‘앉아서 잊어버림’(坐忘) 등은 이렇게 우리의 日常的인 二分法的 意識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重要한가를 지적하는 이야기들인 셈이다.

이 점에서 장자와 선(禪)佛敎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意識의 變化’가 있게 되면 죽음과 삶마저도 超越하게 된다.

장자 스스로 自己 부인이 죽었을 때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 것과 같다.

이를 보고 놀라는 친구에게 自己도 물론 슬펐지만 곰곰이 生覺해본 結果

죽음은 四季節의 바뀜과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봐야 空然한 일,

事物의 實在를 直觀함으로써 죽음과 삶이 두 가지 個別的인 것이 아니라

同一한 하나의 事物의 두 얼굴일 뿐임을 알게 됐기에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죽음을 극복한 셈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의 態度로,

哲學者 니체가 말하는 ‘amor fati’(宿命을 사랑함)를 聯想하게 한다.

 

장자가 사회나 정치에 상관없이 살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無條件  社會를 등지라는 것이 아니라

‘意識의 變化’가 있기 前에는  社會를 위해 일한다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공자의 제자 안회가 위나라 백성들이 독재자의 폭정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에게 거기 가서 그들을 도울 마음이 있으니 그곳에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자는 안 된다고 했다. 學識과 禮義와 勇氣 등 모든 것을 갖춘 안회지만

아직 準備가 덜 되었다는 것이다.

안회는 도대체 무엇을 더 갖추어야 하는가 물었는데 공자는 ‘마음을 굶겨야 한다’고 일러준다.

마음을 굶기는 것은  ‘自身이 더 이상 存在하지 않는 狀態’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소아(小我)가 사라지고 대아(大我)가 등장하는 것이다.

옛날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갖추어진 사람이야말로

社會를 위해 일을 하더라도 眞情으로 效果的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가부좌 명상도량/자비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