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④-1삶과 수행(수행의 정법)

장백산-1 2012. 2. 26. 22:20

현재 우리나라에는 깨달음과 명상에 대한 환상이 번져
수많은 젊은이들과 수행자들이 일상의 노력을 통한 착실한 성장보다는
명상으로 한 소식하여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 이유는 현대물질문명의 한계에 직면하여 동양의 철학과 명상법이 대안으로 제시되어
수행을 하면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깨달음과 같이 인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안으로 제시된 각종 전통철학과 명상비법들은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 없으며 그 진리성이 증명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철학이 지니고 있는 방대한 사고와 엄청난 신비 때문에
젊은이들은 그 속에 엄청난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무작정 자신의 인생을 그곳에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관념들의 유행으로 말미암아
젊은 시절 충실한 삶의 기초를 닦아야 할 청소년들이 현실을 멀리하고 평생을 보장할 원인을 짓는데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삶은 자신을 가꿀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며 원인과 결과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엄중한 사실세계이므로
한순간 잘못 판단하여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내면 회복할 기회가 많지 않다.

전력을 다해 경쟁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서
삶을 경시하고 명확하지 않고 검증되지도 않은 것에 인생을 던진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명상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한 후 행동하여 그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즘 명상과 수행을 가르치는 단체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성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들의 가르침은 성자들의 가르침과 반대이며 세상의 진실과도 다르다.

만약 그들의 가르침이 성자들의 가르침과 세상의 진실과 일치한다면
모든 것이 이치에 의해 나타나고 있는 완전한 법계 속에서
그들이 짓는다는 많은 좋은 원인들에 의해 세상이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이 더욱 어둡고 불행스러워지고 있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가르침 속에 이치에 맞거나 사실과 일치하는 좋은 원인들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상에는 태초부터 정해진 사실과 이를 이루는 원리가 있다.
이러한 불변의 사실을 진실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원리를 진리라 한다.

따라서 풍년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때를 맞춰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며 잡초를 뽑아주는 노력이 그것이다.

사람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정해놓은 인간의 길을 지키고 가꾸어야 좋은 자기를 이루고 좋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는 이와 같이  바른 이치가 흐려지고 인간을 농사짓는 길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을 통하여 더 나은 자신을 농사짓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순환을 통해 자신을 되풀이한다.
좋은 삶으로 좋은 열매를 맺은 것은 후생에서도 풍성하고 기름진 열매를 맺으며,
잘못된 삶으로 쭉정이가 된 열매는 후생에서도 메마르고 쪼그라진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니
인간도 좋은 자기를 지어야 세세생생 좋은 자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실을 바로 보고 삶의 본질에 충실하게 자신을 지으면
점차 그 근본이 좋아져 좋은 운명을 지니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더욱 자신을 갈고 닦으면
마침내 인간완성의 열매인 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의 진실과 이치를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모두 사이비이며 거짓된 말법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의 정신을 이끈 각종 종교와 수행단체들은 이러한 인간의 길과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인간농사를 짓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영적 감염과 미신으로 세상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실에 어긋난 거짓과 환상을 퍼뜨린 말법단체들이 세세생생 그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허황된 꿈에 빠져 그러한 말법을 쉽게 받아들인 본인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 속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어리석음과 무지한 습이 있어서
증명되지 않은 불합리한 관념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 속에 내재된 습에 따라 현실에서의 선택을 달리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데
그러므로 어리석고 무지한 습이 있는 사람의 운명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치로 전생에 위기를 극복한 지혜와 용기가 있었던 자는 이 생에서도 위기를 극복하여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의지가 약하고 일하기를 싫어하여 가난하고 천하게 산 이는 후생에서도 거지운명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좋은 운명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것을 배우고 행하여 자신 속에 좋은 근본을 지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말세의 헛된 환상과 비이치에서 벗어나 당연하고 분명한 현실과 이치로 돌아와야 한다.

삶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이 삶 속에 자신을 더 좋게 만드는 길이 있으며
과거와 미래, 그리고 천국이나 지옥 모두 이 현세를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내가 접하고 있는 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나의 우주적 의미이며 존재이유이다.

이 세상은 과거로부터 쌓여온 원인이 완전한 인과의 법칙에 의해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나의 운명도 그동안 내가 지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선 위에 새로 짓는 원인에 의해 변하고 있으니
모든 길흉화복이 나의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고 있는 동양 철학과 수행법들은 교묘한 논리로 이러한 기본적 이치와 사실을 외면하고
노력과 순리를 뛰어넘어 수행으로 일거에 깨달음을 얻는 비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논리를 내세우는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헛된 것이며
깨달음의 실체를 이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정법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각을 얻었다고 인정하는 부처님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실을 중시하고 이를 이루고 있는 불변의 원리를 가르쳤다.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법(有法)이라고 하는 이유도
사실로 존재하는 일들을 보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밝혔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과 일치하였고, 그 가르침대로 행동하면 세상의 흐름과 조화되고 삶의 보람과 가치를 찾을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올바르게 깨달은 자(정각자)라고 하며 삼세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보고
인간의 길을 밝혀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과 문제를 밝혀 그에 어긋남이 없으면
세상의 흐름과 조화되고 문제가 없는 참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시 브라만교의 환상적인 관념과 미신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고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영원한 법칙을 가르침으로써 무지와 삿된 욕망에서 벗어나 우주의 원리와 일치된 참된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고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따라 좋은 원인을 지으면
좋은 결과를 얻어 지상극락을 이루고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의 정법으로 현실속에서 진실과 진리를 배우고
바른 마음과 지혜를 얻어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업을 짓는 팔정도를 가르쳤으며
이생에서 정법과 선근을 얻으면 후생에는 반드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수기를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이치와 올바르게 살아가는 선업의 유효성이 분명한데
부처님 사후 약 600년이 지나 정법이 흐려지고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가 성립하면서 완전한 법계와 진리 대신에
힌두교의 관념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이 불교와 동양사회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힌두교의 브라만 사상은 이 세상은 본래 맑고 순수하고 전지전능한 브라만(불성,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실체는 변하거나 더러워지지 않은데
우주적인 무지, 환술, 속임수(마야)의 힘 때문에 세상이라는 거짓된 현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은 실제는 존재하지 않은 환상에 불과하므로
여기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을 떠나 명상의 기술로 욕망과 환상을 깨어버리면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영원불변하고 청정무구한 브라만(불성, 진여, 신성)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은 논리적으로는 완벽하여 동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깨달음을 인정받은 각자의 입에서 나온 진리가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반한다.

그들이 이러한 논리를 만들어낸 이유는
완전한 세상과 이치를 만들어낸 불성(조물주, 창조주, 하느님, 신성)은 전지전능하고 청정무구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혼탁한 세상과 무명이 나타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어두운 이세상과 무명이 완전한 불성에서 나타났다고 하면 불성의 완전함과 순수함을 부인해야 하고,
만약 무명이 불성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우주에 불성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어둠의 근원을 상정해야 하는 모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고 청정무구한 불성에서 비롯된 완전한 이 우주 속에는 영원히 추하고 악한 존재가 나타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더러운 세상과 무명은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 뿐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은 환상이라는 관념적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라 그들의 시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고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과 인과법을 중시하는 부처님의 견해를 보더라도
무명과 혼탁한 세상은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실제적인 것임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관념적 논리로 사실을 부정하고 회피함으로써
그 영향을 받은 동양사회는 사실을 정확히 보고 대처하지 못한 채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불성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 속에 오탁악세와 그 원인인 무명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인간은 불성의 분신으로 조물주(창조주, 하느님, 신성, 불성, 진여)와 같이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행하는 자유성과 창조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법계라 표현했듯이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만든 완전한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이치에 의해 순환하면서 완전성을 지향하고 있다.

즉 물질계에서 생명계가 나타나고 최종적으로 그 정화인 의식계가 나타나게 되는데
생명계의 최상위 존재인 인간의 경우 불성의 씨앗인 의식을 지니고
수많은 생을 거쳐 자신을 갈고 닦아 최종적으로 인간완성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다시 불성에 이르는 거대한 순환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성에 이르기까지는 인간은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하는 많은 행위가 사실과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하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갖게 되는데
이를 일러 무명(밝지 못함)으로 인해 업을 짓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잘못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술수를 쓰면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악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사람은 처음부터 나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알지 못하고 일하는 가운데 잘못을 범하게 되고 이를 수습하려고 얕은 꾀를  쓰는 과정에서
더 큰 거짓말과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수동적 미성숙성을 벗어나 능동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불행을 자초하는 어둠을 무명이라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은 양심을 지니고 있어서
이와 같이 무명으로 인해 이치에 벗어난 순간
어둠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깨달아
더욱 완전한 자율성과 창조성을 습득해 가는데
이처럼 행동과 반성이라는 자율적 성장과정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과 이치를 모르는 힌두사상가와 대승론자들은 혼탁한 이 세상과 어둠이 인간이 지어내는 결과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모두 것을 불성(조물주, 신성, 하늘)의 뜻이며 그 피조물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세상을 환상이라고 오도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의 논리는 현실 속에서 무명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달리
현실을 부정하고 행동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와 동양의 철학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환이고 고이며
아무리 선업을 지어 천상에 난다 하더라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모든 구별과 집착을 버리고 삶 속에서의 지혜와 선행마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모두 고해라 하여 염세적으로 보는 시각과
부처님이 세상을 고해라고 표현한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처님은 본래 이 세상을 완전한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로 보았다.

그런데 무지한 중생들이 무명에 의해 잘못된 원인을 함부로 지어 오탁악세를 만들었기에
나쁜 과보를 받고 있는 불행한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한 것이지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을 고해라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완전한 진리가 작용하고 있는 법계로서
인간의 길을 바로 알고 바른 이치에 따라 공덕을 쌓으면 인간열매인 해탈을 이룰 수 있는 복밭인 것이다.

즉 길을 모르고 헤매는 중생들에게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이지만
길을 알고 자신을 농사짓는 이들에게 이 세상은 완성에 이르는 축복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천상의 아라한도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에 태어나 자신을 단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도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선악의 구별과 지혜와 선행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의 실상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 세상 모두를 환이며 거짓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윤회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미덕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돌고 있는 윤회는 그들의 말대로 저주스런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인 존재양식으로 윤회를 부정하면 어떠한 존재도 대를 잇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삶을 통해 자신을 농사짓고
다음 생에 그 열매를 근거로 끝없이 자신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실체를 살펴보자.

인간이 윤회하는 모습은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윤회를 돌아 자신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는 현상과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여 소멸하는 현상, 그리고 매우 드물게 자신을 완성하여 그 열매를 맺는 현상이 있다.

첫째, 자신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며 윤회하는 현상인데
이는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근본을 유지하며 순환하듯이 인간이 자신의 근본과 형체를 유지하면서 계속 인간의 길을 순환하는 현상으로
이것이 유지되는 한 인간의 자격과 형태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둘째는 생명체로서 자기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은 채 욕망에 위해 이치를 어기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감으로써
불행과 원한과 집착에 의해 유계의 지옥도에 떨어지는 경우로서 인간의 근본을 간직하지 못하고 소멸하게 된다.

이때 그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그 영혼이 메마르고 갈라져 인간의 영혼도 간직하지 못하고 일반 기운으로 흩어지거나 미물로 태어나게 된다.

세 번째는 완성에 이르는 길로서 타고난 근본을 키워 그 열매를 맺는 현상인데
사실을 바로 보고 이치에 따라 공덕을 지으면 생을 거듭할수록 더 맑고 강한 선근을 지니게 되고
최종적으로 인간완성의 열매인 해탈을 얻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 것은 삶을 통해 타고난 자신의 근본을 키워 열매를 맺는 원리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과를 사과라 하는 이유는 뜨거운 태양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나무를 심고 거름을 주어 사과 열매를 맺기 때문이며
밤을 밤이라 하는 이유도 어려운 노고를 이겨내고 자신의 근본을 키워 밤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처럼 삶 속에서 자신을 키우고 있는데
해탈이라는 인간완성의 열매가 이러한 세상의 공통된 흐름과 달리
삶을 통해 자기를 짓지 않고 버리는 것으로 이루는 것이라 하면
이는 실상과 이치에 어긋나며 결코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 인간완성의 열매가 참된 삶의 노고를 거쳐 맺는 것이 아니라
명상이라는 기술로 버려서 얻는 것이라면 그러한 깨달음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며 인간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이 해탈하게 되면 모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모든 욕망과 집착과 소유를 버릴 뿐만 아니라 현실과 분별과 지혜와 공덕마저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해탈하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지어낸 말이며 부처가 한 말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무기라 하여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해탈하게 되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과법으로 볼 때도 당연한 이치이다.

다만 기존과 같이 희노애락에 헤매는 인간의 윤회를 끝내고
모든 존재와 의식을 낳은 불성과 같은 존재가 되어 우주의 근원으로서 새로운 순환을 하게 되는 것이니
완성된 차원으로 새롭게 돌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탈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기존관념에 젖은 사람들은 반발하겠지만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과 열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이는 오이를 돌기에 오이라 하며 참외는 참외를 돌기에 참외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불성도 완전한 세상과 이치를 낳고
다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 의식을 열매맺어 불성과 같은 존재를 이룸으로써
불성이 완전하고 존재하게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움직임이 없는 존재는 인식할 수 없으며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초에도 불성이 청정무구하게 고요히 머물지 않고 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며
불성과 동일한 열매를 맺어 해탈한 이도 불성과 합일하여 다시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는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과 자신을 완성시키는 길 모두 윤회에서 벗어나는 현상이지만
하나는 자신이 타고난 근본을 망쳐 인간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하나는 타고난 근본을 완성시켜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 것이니
이 모두를 같은 현상으로 보아 의식을 버리고 무기력하게 사는 것이 깨달음의 길인양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명상 수행의 또 하나의 문제는 우주의 실상에는 아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를 버려야 본래부터 오롯한 진여가 나타나 무한한 우주와 합일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현대 인도명상법들의 공통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우주의식과 합일한다는 말은 매우 고차원적이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생명의 세계를 망치는 매우 위험한 음모가 들어있다.

왜냐면 나를 버리라는 말은 곧 다른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사라지면 그 무언가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데
나를 놓아 버린 주인없는 몸뚱아리에는 유혼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기 쉬운 것이다.

기독교나 힌두교에서는 나를 버리면 그몸에 하나님이나 브라만이 자리잡는다고 하나
전지전능하고 청정무구하며 초월적인 신이 있을 곳이 없어 죄많고 더러운 인간의 몸 속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인도의 명상 속에 자리잡은 것은 오늘날 힌두교에 자리잡은 무수한 신적 존재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도의 명상계가 영적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의 신령들은 몸을 잃어버린 결과체로서 떠도는 운명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현실 속에 있는 인간의 몸을 매우 갈망하게 된다.
그래서 어둠의 세계는 인간의 몸을 얻고 자신들의 세력을 퍼뜨리기 위해 명상하는 사람들의 몸을 차지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나를 버리는 것이 깨달음의 비법인 것처럼 교묘한 함정을 파
명상가들이 수행 도중 그 정신을 놓도록 함으로써 그 몸을 지배하는 술수를 부린 것이다.

이처럼 인도 수행법의 대부분은 영들의 계시에 의해 나타난 것이니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기있는 수행법들 중 몇몇 인기있는 수행법들도 바로 이와 같이 소위 ‘하늘의 계시’를 받은 명상법인 것이다.

그 결과 인도명상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는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삶을 건강하게 살게 하는 정각자는 나타나지 않고
영적 힘으로 기이한 신통을 부리는 영능력자가 많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던 것이다.

자기와 실천의 소중함은 예수님이 잘 말씀하신바 있다.
즉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의 참 뜻은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진리가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여 자기 속에 쌓지 않는 자는
자연이 정해놓은 법칙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땅에 거름을 주어 비옥해지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 하더라도 가꾸지 않은 황량한 땅이 좋은 열매를 맺는 일은 없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가꾸지 않고 당신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면
그는 성자 일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진리를 실천하여 그 마음이 기름지지 않은 자는 결코 좋은 결실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아무리 성자라고 하더라도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이다.(④-2로)



출처:진실의 근원

출처 :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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