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④-2 삶과 수행(수행의 정법)

장백산-1 2012. 2. 26. 22:19

이제 거짓된 관념과 논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어찌 큰 울음을 터뜨리며 귀하게 태어난 이 삶을 거짓이라고 부정하며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고 거부할 것인가?

이제 그대는 이 세상과 소중한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

만약 그대의 마음속에 사실적 시각과 바른 이치가 있다면 현실과 실천하는 삶을 택할 것이며
그 마음속에 환상과 도박을 좋아하고 사실과 실천을 싫어하는 업이 있다면 현실을 멀리하고 짓지 않고 얻는 명상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깨달음의 길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이루는 길이니 가만히 앉아서 지우고 버리면서 닦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와 같이 사실을 바로 알고 참된 이치를 배운 후 지속적인 실천과 자각을 통해 의식을 정화하고 단련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명상가들은 참선의 견성이나 단전호흡의 대주천, 요가의 사하스하라 차크라의 개화를 통하여
우주의 신성한 기운과 이어져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 속의 일로서 사실이 아니며 진정한 완성의 길이 아니다.
명상을 통해서는 수행자의 의식이 정화되지 않으며 근원적인 업과 번뇌는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업은 숙생의 삶을 통해서 자신 속에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듯이 삶을 통해 쌓인 업은 삶을 통해 정화해야 하는 것이 원리인 것이다.

더구나 정기신이라는 말이 있듯이 의식은 정이나 기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니
종이 주인을 바꿀 수 없듯이 거친 기로서 미세한 고차원적인 의식을 정화할 수 없다.

부처님이 끝없는 요가행을 거쳐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렀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부다가야의 보리수로 내려온 것도 이러한 실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은 요가행의 최고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에 이를 때까지 안개가 끼고 온몸이 열리며 천둥이 치고 빛이 비치는 요가의 모든 경지를 체험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버린다는 의식마저 버리는 최고의 단계에 이르렀지만
들려오는 고향 소식에 흔들리는 마음을 느끼고 그곳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하여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시골처녀에게서 우유 한잔을 얻어 마시고 자연스러운 인과의 결과로 자신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수많은 생을 거쳐 중생들의 고통을 내몸처럼 아파한 자비심으로
모든 업이 타버린 맑고 고요한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어 마침내 정각을 얻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의 깨달음은 고행이나 명상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공덕이 비로소 이생에서 열매를 맺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니 팔정도로 공덕을 쌓으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처럼 기와 명상은 마음을 농사지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요체가 아니며 마음을 찾아보는 기법에 불과하다.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생생한 현실에 부딪혀 직접 눈물을 흘리고 진심으로 뉘우쳐 아상과 탐심을 극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욕망을 이겨야 욕망을 벗어나고 유혹에서 이겨나야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마음의 성장원리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유명한 지족선사가 높은 도로 이름이 높았지만 평생 닦은 경지를 한순간 황진이의 치마폭에 빠뜨리고 만 것은
그의 깨달음이 생각 속에 있었지 현실 속에서 극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딪혀서 이겨내지 못하는 탐심은 극복한 것이 아니며 곧 자신 속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명상을 통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이미 이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대명제이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이 이를 외면하고 쉽게 도를 얻으려고 명상에 집착하는 것은
세상이 말세라 말법이 성행하고 수행자들의 마음속에 습이 두텁기 때문이다.

모든 접촉을 끊고 고요히 명상에 들어가게 되면 욕망과 집착이 가라앉은 맑은 마음이 나타나고 그 위에 세상의 이치가 비치게 된다.
이것은 마치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위에는 맑은 물이 괴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고인 물에 세상이 비치듯 세상이치가 잠시 비치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를 견성했다, 한소식 했다고 하여 크게 인정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반야심이 아니니 세상의 인연이 다시 흔들어 버리면 그 거울은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선사가 선정을 하다가 한소식한 후 조금만 닦으면 될 듯하여  폐관칩거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이 아무 공덕도 짓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 것은
실천행을 통해 업을 지우려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생각만으로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은 이제 기존 관념과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모든 열매는 익기까지 수많은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과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인간도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실천과 각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니
인간정신의 열매를 얻는 깨달음 또한 이러한 생명의 공통된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매일 실천하는 일상의 삶이 소중한 것이며
그 속에서 자신이 지니고 나온 근본을 조금씩 키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 일을 생각하며 식사를 하고 낮에는 주어진 일을 살펴 이치에 맞게 문제를 푸는데 최선을 다하며
저녁에는 지친 몸을 사랑과 오락으로 풀고 다음날 아침 생기를 충전하여 다시 새 일에 도전하는 것이 평범하지만 가장 좋은 인간의 삶인 것이다.

이렇게 살면 점차 사실에 밝아지고 자연과 조화를 찾게 되며 그 영혼이 더욱 맑고 건실하게 영그는 것이니
시간이 흘러 그 근본이 무르익으면 저절로 반야로 젖어들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삶과 유리된 명상에 얽매이지 말 것이며
현실 속에서 좋은 자기를 짓고 세상을 구하는 공덕행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누가 얼마나 해탈에 가까워졌는지,
누가 그러한 운명을 띠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인간의 삶이 불성의 씨앗으로 태어나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날이 올 때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사실을 바로 보고 바른 이치를 배우며 현실을 충실히 사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인간의 길에 충실하다 보면
세상은 이치대로 돌아가 밝아지고 사람들은 태어난 보람과 가치를 찾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중에는 전생의 공덕이 무르익어 마침내 해탈에 이르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그날이 올 때까지 모든 사람은 삶 속에서 하나씩 깨달아 나가는 것이 정도인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이 쌓이고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이니 뜸을 들이지 않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는 없다.

인간 농사도 때가 되어 공덕이 무르익으면 저절로 마음의 꽃이 피어 해탈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인위적으로 구해서는 안된다.

인간완성의 열매인 해탈은 인간이란 존재의 완성뿐만 아니라 우주의 결정체로서
우주의 근본 성품인 불성이 싹을 피워 다시 완성을 이루는 희귀한 현상으로
수천 년에 한두번 밖에 나타나지 않는 드문 현상이다.

따라서 수많은 생을 거쳐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를 얻어 타고난 모든 업과 장애를 극복할 수 있고
세상을 모두 담는 큰 사랑이 있어 자신을 모두 바칠 수 있는 자만이 이에 이르게 되니
자신 속에 세상에서 제일 큰 용기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면 해탈을 얻겠다고 욕심은 부려서는 안된다.

더구나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 세상의 욕망과 사심에 끄달리는 속인들은 굳이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자리는 세상과 하나되는 자리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자리로서
깨달기 이전이나 깨닫고 나서나 여전히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무욕의 자리이며 무지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리이니
욕심많은 중생이 굳이 힘들여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목적지로 삼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며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더 나은 자신과 행복을 얻게 되니
이를 기쁨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참되고 바른 삶인 것이다.

이처럼 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며 인생이 곧 수행이며 살아가는 이치가 곧 도이다.

이러한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무언가 진기하고 기막힌 비결이 있는가 해서 진리를 찾다가
현실을 중시하고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이치를 보고 너무 평범하다고 실망해 떠나고 만다.

그러나 진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실들이 진실이며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이치들이 진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실과 진리는 눈앞에 있어도 눈이 어두운 중생들이 보기 어려우며 실천하기는 더 더욱 어렵다.

하늘은 진리로 세상을 만들어 놓았지만 오직 눈을 뜬 자만이 진리를 볼 수 있게 해놓았기에
오늘날 중생들은 진리와 인간의 길이 사라진 25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성자가 나타난 이후 수많은 구도자들이 나타났지만 그 이후 수천년간 깨달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중생 스스로 진리에 눈을 떠 공덕을 쌓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리와 인연이 닿았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곳은 수천년 만에 진리의 빛이 나타난 곳이니 생사의 이치와 삶의 길이 명확히 나타나 있으며
현실과 과학과 정치와 경제와 도덕과 수행이 모두 하나로 이어져 나타나고 있다.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현실의 참 모습과 이상을 이루는 모든 길이 열려있는데
이를 보고도 기존 관념에 사로잡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숙생의 삶 속에 진리의 인연이 없었으며 진실한 선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진리의 인연과 진실한 선근이 있어야 한다.
진리의 인연이 없는 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어둠 속을 헤맬 수밖에 없으며
마음 속에 진실이 없는 자는 진실을 보아도 그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불경에서도 진리의 인연을 만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바늘이 겨자씨에 꽂히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으며
인연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진리의 인연이 있어 부처님 재세 시에 그 곁에서 시봉한 제자들은
깨달은 부처님이 보신 시각과 하시는 언행대로 그대로 보고 행하니
마음이 밝아지고 공덕이 쌓여 다음 생에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받았지만

진리와 인연이 멀어진 상법시대 이후로 수천년간 많은 수행자들이 뜻을 세우고 진리를 찾아 헤맸지만
마음 속에 아무런 깨달음의 빛을 얻지 못한 채 안타까움과 회한을 안고 황야에서 스러져 갔던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장님의 인도를 받으면 평생 같이 헤매게 되나
빛이 있는 곳에서는 앞을 보는 사람을 따르면 가야할 길과 목적지가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문명을 이끌고 있는 현대 학문의 문제는
진리와 세상을 보지 못하는 학자들이 전해오는 글들을 보고 그럴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전개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곳에 빠지게 되면 결국 학자들과 똑같은 시각과 생각에 잠겨 뿌연 세상과 부분적 논리에 갖히게 된다.

따라서 현대 지식을 배워 세상 일을 하게 되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만리장성을 짓다 시간만 하릴없이 보내고 마는 것이다.

세상에는 짓는 대로 받는 것 이외에 다른 도가 없으며 평범한 일상생활 이외에는 다른 세상이 없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모든 환상과 탐심이 사라지고 양심과 성실을 회복하게 된다.

따라서 이곳을 찾아오는 수행자들에게 그들이 집착하고 있는 명상법이 삶의 정법이 아니며 기술에 불과하니
모든 관념과 집착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일상의 삶 속으로 돌아오라고 하면
그들은 매우 당황해하며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동안 자신이 배워온 모든 화려한 환상과 일확천금의 비결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그들이 세상을 위해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라면
진리의 빛 앞에 언제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일하기를 싫어하고 공리공담을 좋아하며
일확천금의 사행심과 명예욕이 큰 자들이기 때문에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자기를 낮추고 진리를 찾을 자가 많지 않은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너무나 평범하고 어김없는 인과의 법을 깨닫고 나서
눈앞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지은대로 받아야 하는 법칙 이외에 더 이상의 다른 환상이나 비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내 모든 것을 바쳐 얻었던 모든 기와 선과 명상의 경지를 버려야 했을 때 참으로 아쉽고 갈등이 많았다.

그러나 너무나 엄연한 진리의 법칙 앞에 나의 모든 소유와 집착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제야 비로소 바른 세상을 보고 바른 원인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동안 겪었던 나의 모든 수행과 헤맴은
짓는 대로 받게 된다는 당연한 인과의 이치와 눈에 보이는 평범한 일상 이외에는 다른 세상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럼 진리의 인연이 닿지 않은 자가 깨달음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살펴보자.
이는 모든 수행자에게 공통된 문제이니 깊이 새겨야 한다.

전해져 내려오기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어떤 것이 공덕인지 어떻게 해야 공덕을 지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만약 그대가 공덕이 무엇인지 안다면 한번 말해 보라. 아마 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통해 공덕을 지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팔정도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그 내용이 없다.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행동하라고 하는데
어두운 습을 가진 중생이 어떻게 해야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행동하는지 길이 없는 것이다.

사실 부처님은 자신을 닦는 가르침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방법들을 시시 때때로 말했을 뿐 팔정도란 개념을 말한 적이 없다.
팔정도는 후대의 부파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 중요한 수행법 8가지를 정리하여 만든 말이다.

문제는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행동하라는 좋은 꽃노래가 아니라
무엇이 바른 법인지 깨닫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덕을 쌓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고린도 전서 13장 말씀을 근거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무례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며 불의를 좋아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 속에는 좋은 말이란 다 들어있는데 구체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좋은 일을 한다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의 불우한 이웃을 돕고
신자들은 교회나 절에 평생 모은 돈을 기금으로 쾌척하며
국가는 하층 대중의 복지를 위해 거금의 국가재정을 투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할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일을 올바로 행하여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상대를 태어난 가치있게 참되게 살 수 있도록 바른 이치로 진리로 축복해 주는 것이다.
즉 무조건 돕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제 구실을 하도록 하여 태어난 보람과 가치있게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

사람이 땅에 거름을 주는 것은 땅이 풍성한 수확을 거두도록 축복해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 스스로 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고 바른 이치를 가르쳐
태어난 가치와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올바른 축복이기에 공덕을 짓는 것이 된다.
즉 사랑은 곧 공덕행과 같은 말인 같은 것이다.

팔정도에서 좋은 공덕(정업)을 짓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 같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아원이나 양로원, 장애시설 등의 불우아동이나 장애인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것은 큰 사랑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 그것은 그들의 생물적 생존을 유지하는데 불과할 뿐
세상을 좋게 하거나 상대방을 태어난 가치와 보람있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러한 부조는 그들의 독립성을 말살하고 의존성만 증가시키게 되는데
그 사람의 인생에서 보면 그 정신을 약화시킴으로써 태어난 의미와 가치를 망치게 되고
사회적으로 보면 문제는 영원히 남아 사회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진리를 가르치지 않은 종교단체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것은
미신적인 말법을 퍼뜨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환상적이고 편파적인 종교인을 양산하여
사회의 건강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위안을 위한 과시로서 공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업장만 더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이러한 행위는 자기의 마음 속에 남아 다음 생에 태어나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다시 똑같은 어리석은 행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지국가를 만든다고 국가재정의 일부를 무조건 빈민계층에게 지원하는 것은
그들의 거지근성과 게으름을 자극해 그들이 영원히 빈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많은 세금을 징수당한 사람들은 점차 일할 의욕을 잃게 되어 결국 국가 전체를 부실하게 만들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일을 할 때 그 이치를 알고 행해야 한다.
이치를 알고 일을 해야 세상을 더욱 바로 보고 그 정신이 더 밝게 되며
다음에는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더 좋은 자기와 더 좋은 세상을 약속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보다 무지한 말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맑은 지혜와 바른 마음으로 상대를 진정 축복해주는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나 열대우림의 원시부족에게서 깨달음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미신과 무지로 가득 찬 삶으로 인해 이치를 깨달을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며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더 나은 자기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니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는 자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국가는 스스로 자존하려고 하는 자를 지원하는 정책운영의 묘를 알아야 한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구성하고 있는 국민들이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일할 의욕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지원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들이 자립하여 국가의 부담을 덜고
그들을 재원으로 국가가 발전하며 낙오자들을 도울 여력이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복지정책은 삶을 영위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최소한으로 그쳐야 하며 그 이외에는 모두 스스로 자존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돕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책 운영의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주의 정화이며 인간의 열매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인간에게 있어야 할 소중한 근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삶을 통하여 자신이 타고난 근본을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인간도 타고난 근본을 키워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타고난 고귀한 근본에는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양심과 세상을 축복하는 사랑과 이를 실천하는 용기가 있다.

그러면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이란 말 그대로 좋은 마음을 말한다. 그러면 좋은 마음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답을 하면 또 다시 그 설명한 것에 대한 질문이 끝없이 꼬리를 문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되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 사정경에 정과 사의 차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삿됨과 바름이 있으니 삿된 길은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탐욕, 성냄이며
바른 길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과 거짓말과 탐욕과 성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진리를 설명하는 경전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으니
십계명 중 7가지 계명도 모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쁜 것이 아닌 좋은 것이며 나쁜 마음이 아닌 것이 좋은 마음이며 진리가 아닌 것을 버리면 진리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면 양심이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맑고 좋은 마음이니
거짓이 없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부지런히 일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바른 이치에 따라 생활하고, 약속을 지키며, 잘못된 일을 바로 잡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마음 등이다.

거짓이 없으면 마음에 어둠이 없고 세상에 믿음이 넘치며, 부지런하면 부족함이 없고 세상이 풍성해지며, 세상을 바로 보고 이치대로 산다면 사실과 어긋남이 없는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지키고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면 세상이 밝아지고 은혜를 갚을 줄 알면 세상이 윤택해지며 신뢰가 넘치는 사회가 된다.

이렇게 맑고 좋은 마음이 곧 하늘의 뜻이며 불성이니
마음에 어둠이 없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산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없으며 그것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사랑은 모든 것을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거름을 주는 것은 땅을 축복하여 많은 결실을 만들어내며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그 능력과 근기를 기르도록 하여 좋은 인생을 만들게 해준다.

이처럼 축복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태어난 보람있게 잘 살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아니니 땅을 축복하면 그 결실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세상과 인간은 불성이란 한 뿌리에서 난 동일체이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 짓는 것은 나에게 돌아오며
나에게 짓는 것은 세상에게 돌아가는 상호교류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통하여 사랑을 행하면 세상이 좋아지고 좋아진 세상은 좋은 결과를 인간에게 돌려줘 그 마음이 열매맺게 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를 축복해줌으로써 공덕이 되는 것이다.
즉 공덕행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축복하는 것은 조물주(창조주, 불성, 신성)의 속성이며 생명의 본질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동력이다.

그래서 조물주는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생명과 진리로 인간을 축복하여 완성에 이르게 하셨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어서 잘못된 사람을 보면 그 잘못에서 구해주고
바른 이치와 길을 가르쳐 참되고 보람있게  살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있으니 이것이 사랑의 불이다.

사람은 남을 사랑해 축복해주는 과정에서 이를 이룰 수 없는 여러 가지 한계와 장애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때 그 마음이 애가 타서 사랑의 불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랑의 불이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삿된 것을 태워버리게 되는데
진리와 사랑으로 타오르는 찬란한 불은 자신 속에 내재된 모든 사심과 습과 애욕을 모두 태워 오직 맑고 완전한 마음만을 남게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업이 사라진 반야심인 것이니
업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지워져 버린 것이므로 다시는 일어나 거울을 흐리지 않으며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여일하에 삼매에 들어 세상을 비추고 법을 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을 통한 참된 수행이며 모든 수행의 으뜸인 공덕행인 것이니
이 법이 사라지자 깨달음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탈이란 모든 업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세상 일로 애태우는 것은 오히려 집착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애욕과 집착으로 자신을 애를 끓이는 것은 자신의 업장을 더욱 무겁게 하지만
진정 상대를 축복하는 사랑으로 애태우는 것은 자신의 업장을 태워 가볍게 하는 비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애욕과 집착으로 자신을 불태울 땐 가슴이 맺혀 미어터질 듯 아프지만
진정 사랑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애가 탈 땐 업장이 타버려
재가 스러지듯 마음이 아련해지며 맑고 고요하게 비워지게 된다.

이처럼 사랑은 인간의 생명과 삶속에 깃든 희귀한 보물이니
인간은 사랑으로 인해 더욱 인간다워지고 사랑의 불로 인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럼 용기는 왜 필요한가?

아무리 사랑과 양심이 있어도 용기가 없어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공덕을 쌓을 수 없고 업을 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란 실천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이므로
용기가 있어 자신의 업을 극복하는 실천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업을 극복한 것이 된다.

따라서 자신 속에 하늘도 꺽을 수 없는 용기가 있어
장애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끝없이 자신을 불사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인간완성과 해탈지경이 찾아오는 것이다.

즉 진리가 눈앞에 있을 때 항상 발가벗을 수 있고 생명을 내던질 수 있다면
진리와 사랑을 내것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깨달음과 일체화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깨달음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수행자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인간세상의 가장 귀한 보물인 것이다.
출처:진실의 근원

출처 :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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