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 |
現狀에 오롯이 깨어 있으면 고요히 당황하거나 노심초사하지 않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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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과 깨어있음, 이 두 단어는 새의 양 날개처럼 선 수행의 중요한 두 가지 要素를 이루고 있다. 날개 하나만 잃어도 새가 날지 못하듯 禪에서도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결핍되면 제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고 깨어 있는 가운데 고요해야 우리는 수행자의 삶 속에서 밝고 平和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렇게 고요함과 깨어 있음이 함께 均衡을 이루어 展開되는 것을 ‘성적등지(惺寂等持)’라 일컫는다. 여러 선어록에서는 이 말을 달리 표현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 혹은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했다.
마음이 고요하기만 하면 흐릿하고 혼침에 빠진다
寂寂이란 고요하고 고요해 어떤 煩惱도 일지 않는 平和로운 狀態를 말한다. 물결이 자고 잠잠해진 고요한 호수를 生覺해 보라. 고요한 호수는 平和로움이다. 시끄럽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마음 역시 고요하고 고요해지면 煩惱 妄想은 물론 어떤 雜念의 물결도 일지 않는다. 妄想과 雜念의 물결이 자니 平和롭고 고요하다. 고요 속에는 여유와 부드러움이 번진다.
그러나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지 못하면 그 고요는 寂幕이나 어둠 속으로 빠진다. 호수가 고요하기만 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내 흐름이 斷切되어 썩은 물이 되거나 生命이 살아있지 못하게 된다. 마음도 고요하기만 하면 흐릿하고 캄캄한 昏沈에 빠진다. 아무 生覺도 없는 무기(無記)에 잠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狀態가 성성(惺惺)이다. 惺惺이란 반짝이는 별의 모습처럼 玲瓏하고 또렷하게 마음에 와 박히는 것이다. 고요한 호수에 맑고 淸明하고 淸凉한 生命이 숨 쉬는 狀態가 寂寂惺惺이다. 그렇게 맑고 고요한 호수에는 新鮮한 生命이 숨 쉰다. 그런 호수에는 하늘을 흐르는 흰 구름, 주변의 나무들이 고스란히 와서 잠긴다. 고요하고 맑은 가운데 청정하고 시원스러운 바람 또한 분다. 우리 마음 역시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으면 밝고 또렷해져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透映되어 온다. 고요하고 밝으며 활달하게 살아 있는 生命力이 눈앞에서 展開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다면 무지몽매한 것
하여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713) 선사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옳지만 성성망상(惺惺妄想)은 그르고, 적적성성(寂寂惺惺)은 옳지만 적적무기(寂寂無記)는 그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망상과 잡념에 성성하게 깨어 있으면 온통 시끄러울 뿐이요, 寂寂한 反面 아무 生覺도 없다면 無知夢寐한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화두를 듣든 염불을 하든, 어떤 對相에 집중을 하든 그 對相에 대해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으면서 集中하게 되면 分別妄想이 사라지고 雜念이 그친다. 雜念이 그치는 것을 사마타(Samatha)라고 하여 지(止)라 번역한다. 雜念이 쉬니 고요하고 고요하다. 선정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선정의 상태에 들면 마음이 절대로 이리저리 날뛰지 않는다. 그러나 眞情한 禪定의 狀態는 고요하다고 해서 아무런 生覺도 없는 것이 아니다. 오롯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화두에 성성하게 깨어 있어 착 붙들려 있어야
화두를 들 때 화두가 마음의 中心에 걸려 화두에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것을 화두가 성성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것을 달리 말해서 성성착(惺惺着)이라고도 한다. 화두에 성성하게 깨어 있어 화두에 착 붙들려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화두에 깨어 있으면 話頭 以外에는 어떤 妄想이나 雜念도 일지 않는다. 화두 의심 하나만 순일해지고 깊어지니 마음은 그저 고요하고 고요할 수밖에 없다.
화두에 깨어 있지 못하고 그냥 고요하다면 無記에 빠져 木石처럼 된다. 정말 아무 生覺 없이 無事太平하게 지내는 것이다. 또는 컴컴한 귀신굴에 빠져 신기한 현상에 붙들린 결과, 거기에 집착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설 우려가 크다. 화두를 들다가 화두 삼매까지 간 것은 좋은데, 그만 그 상태에서 화두를 놓친 결과 意識의 빈틈으로 神秘한 現狀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幻聽이 들리거나 神奇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奇特하여 그 마(魔)의 장난에 빠진 結果 거기에 붙들리면 非定常的인 길로 들어서기 마련이다. 하여 그 瞬間 다시 화두를 잡아 챙겨야 한다. 그렇게 화두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念佛 역시 마찬가지다. 염불에 오롯하게 깨어 있어 염불이 순일하게 展開되어야 고요한 삼매의 상태에 이르며 그렇게 될 때 아미타 부처님을 親見하거나 부처님의 本性에 契合하게 되는 것이다. 염불뿐이겠는가? 瞬間瞬間 일어나는 現狀에 오롯하게 깨어 있으면 고요한 가운데 당황하거나 노심초사하지 않을 것이요, 그러면 現在를 살아가는 活達한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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