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執着하고 있는가,마음을 살펴라.
오늘은 생사(生死), 즉 태어남과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또 이렇게 한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불교를 믿고 일생동안 불교 신행 생활을 한 불자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90% 이상입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나를 바로 알고 바로 살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人生은 前生에 내가 스스로 일으켰던 生覺의 그림자이고 그 生覺을 마음속으로 決定해서 行動으로 옮겨 實踐한 業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일으킨 生覺은 이번 生의 씨앗이 됩니다. 내가 生覺하고 實踐한 옛 業緣이 오늘의 내 人生입니다. 오늘날 내 人生의 創造主가 바로 ‘나’인 것입니다.
生命 있는 衆生들을 유정(有情)이라고 합니다. 有情衆生, 情으로 만들어져 情이 있기 때문에 有情입니다. 그런데 이 肉體를 낳아준 아버지, 어머니가 運命과 人生까지 낳아줄 수는 없습니다.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 농사’라고 하지요. 그건 어째서 그런가요? 自息의 肉體는 내가 낳았어도 人生은 자기가 지어놓은 業에 따라 富貴榮華와 喜怒哀樂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내 人生은 내가 만들어 온 것처럼, 自息의 人生 創造主도 바로 自息이기 때문입니다.
生死의 根本은 한 生覺으로부터 始作됩니다. 한 生覺 일어나는 바탕인 마음이 生死의 根本이요, 輪回의 原因입니다. 또 是非의 始作입니다. 어째서 그러할까요? 선(善)도, 악(惡)도, 智慧도, 法도 누가 만들어 놓거나 設定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善惡의 原因은 우리들이 일으키는 한 生覺입니다. 착한 生覺은 善의 原因이요, 惡한 한 生覺은 罪의 原因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어 놓은 業을 어떻게 돌려받을까요? 善業, 즉 좋은 일은 좋은 結果를 낳을 수 있는 힘과 能力을 지닙니다. 나쁜 결과를 불러 올 수는 없습니다. 또 惡業, 惡報 등 나쁜 일은 나쁜 結果를 불러올 수 있는 힘과 能力은 있지만은
좋은 結果를 불러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一生 동안 하는 일이 限量이 없겠지만 뭉쳐놓고 要約해보면 세 가지 뿐입니다. 善業, 惡業, 無記業이 그것입니다. 善業은 선보(善報), 惡業은 악보(惡報)를 받는데 無記業은 善惡間의 果報가 뚜렷하지 않고 힘없는 業이기에 이것을 無記業이라고 합니다.
自身이 지은 業은 삼 段階를 거쳐 가면서 받습니다. 今生에 지어 今生에 業을 받기도 하고, 前生이나 그 앞 生에 지어놓은 業의 果報가 來生에 나타나 來生 운명을 左右하기도 합니다. 今生에 지은 業이 저 後生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問題는 이 生에 태어난 우리는 果報를 받으면서 또 業을 짓습니다. 業을 지었기 때문에 果報를 받기 위해 來生이 必要하고 또 存在하는 것입니다. 또 다음 生에 가서 今生에 지은 業을 받으면서 또 짓기 때문에 來生이 필요하고 그런 過程을 始作 없는 그 옛날 옛적부터 계속해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불연을 맺었습니다. 불법을 만났으니 오늘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임을, 그 理致를 正確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救濟하고 濟道해야지 나 아닌 어느 누구도 나 代身 내 人生을 救濟할 수 없다는 意味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믿고 實踐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 靈魂을 救濟하고 濟道할 수 있을까요? 法文을 들어 배우고, 배운 것을 믿고 믿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그것을 行動으로 옮겨 實踐할 수 있습니다. 내가 實踐하는 것이 生死의 根本이 되고 輪回의 原因이 됩니다. 輪回 고(苦)를 벗어나려면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이 마음을 닦아 나의 本來 自性을 直觀해 證得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物質的인 肉體만을 알지 이 肉體를 끌고 다니는
'참, 나'인 主人公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못 보느냐, 한 生覺 일어나면 煩惱고 한 生覺 일어나면 妄想인데 이것이 내 生覺인 줄 알고 煩惱의 앞잡이가 되어 生活하다 보니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本來面目, 이 마음자리는 눈으로는 안 보입니다. 왜냐, 우리가 내 눈이라고 믿고 있는 눈도 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有形色身에 속해 있는 物質的인 肉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虛空과 같아 모양이 없고, 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바로 보려면 마음의 눈을 떠 마음으로서 마음을 直觀해야 합니다.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스님들께서 공부하다가 도를 깨달은 것을 견성했다고 합니다. 견성을 하고 나니 나의 性品을 볼 수 있고 그런 연후에 나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까 바로 깨달아 衆生을 濟道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5분이라도 나의 마음 變化를, 내가 무엇에 執着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習慣을 가져야 합니다. 冥想을 하면서 말이지요. 불교는 남의 신(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바르게 관(觀)하고 내 性品을 觀하는 것입니다. 나의 性品 자리를 恒常 지켜봅시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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