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 --- 김수환 추기경

장백산-1 2013. 3. 5. 22:50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중에서| 군종교구
실비아메이 | 조회 68 |추천 1 | 2012.07.25. 20:36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중에서

 

 

靈魂의 눈 뜬 20대 신부(神父)의 죽음

 

80년 7월에 김재문 신부라는 젊은이가 신부된 지 1년밖에 안 되는데 죽었습니다. 신부전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김 신부는 합병증으로 죽기 4~5개월 전, 약 한 달 남짓 되는 사이에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는 과정은 肉體的으로나 精神的으로 굉장히 苦痛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김 신부는 나에게 "주교님, 제 나이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데,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라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껴안고 위로의 말을 하고자 했으나, 사실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신부가 실명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병실로 가 보았을 때, 김 신부는 마침 수녀님 한 분과 간병하는 이와 함께 실명된 뒤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갔을 때에는 '말씀의 전례'가 다 끝나고 봉헌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김 신부는 봉헌기도문을 읽을 수 없으니 말로써, "하느님 아버지, 이 祭物을 저보다 더 고통받는 병자들을 위해 바치오니 받아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옆에서 성찬전례를 도우면서 미사를 계속 진행했습니다. '주의기도'를 바치게 되었는데, 김 신부는 '天主의 子女되어 救世主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고 일상 하는 말씀을 외우는 代身,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두 눈의 視力을 잃고 앞 못 보는 소경이 된 이래,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예수님은 참으로 나의 길이시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그분 없이 저는 한 瞬間도 살 수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길이십니다.

우리의 길이신 主께서 가르쳐 주신 主의 祈禱를 바칩시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깊이 감동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그 신부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길임을 確信하게 하였고, 또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傳達할 수 있게 하였습니까? 나는 김 신부가 그 불치병의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깊이 一致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실명으로 말미암아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김신부와 함께 있으며, 그의 마음을 당신의 빛으로 밝히고 있었습니다. 김신부는 '肉身의 눈'은 잃었으나

'靈魂의 눈'을  떠서 主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 김 신부나 많은 병자들, 또는 사형수들이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苦痛을 通해서 우리 마음이 淨化 될 때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으로 主님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

빈 마음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意味를 더 깊이 깨닫고 그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길이요 眞理요 生命임을, 또 빛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 * * *

 

 

"빛 속에서"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대학생이 나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환자촌을 방문하고 A라는 환자 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A라는 환자는 나병으로 말미암아 눈이 파여 失明했을 뿐 아니라 코도 귀도 입도 뭉그러졌고, 손도 다리도 절단되어 있어서, 마치 통나무와 같이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서는 먹을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고,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A의 얼굴은 무언지 모르게 빛으로 가득했고, 옆에 앉은 대학생은 그 어디서도 겪지 못한 平和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빛이 어디서 오는가 하고 대단히 궁금하였는데, 그 疑問은 즉시 풀렸습니다.

그 빛의 原因은 환자 옆에 놓여 있는 '점자 성경' 이었습니다. A라는 환자는 눈으로는 물론이요 손으로도 '점자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나, 혓바닥으로 그 점자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정말 生命의 말씀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먹다시피 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얼굴이 그렇게 밝았습니다.

 

 

 

                                                      * * * * *

 

 人生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세의 부귀영화를 좇아서 돈을 따라서 사는 길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돈이나 權力, 名譽, 快樂이 人生의 目的이요 全部인양 추구하며, 이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합니다. 많은 가난한 이들은 먹고 사는데 바빠서 다른 生覺의 여유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길을 따라 삽니까?

어느 길을 따라서 살고 있든, 우리는 滿足하지도 못하고 마음의 平和를 얻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意味를 찾습니다.

人生에는 왜 苦痛과 苦生이 많은가,

이 고통과 모순 투성이의 인생에 도대체 의미가 있는가,

왜 사랑하는 사람과는 영원히 함께 있지 못하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서로 위하기보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가,

왜 서로 죽이는가, 전쟁은 왜 하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등등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그것이 共産主義든 資本主義든지 간 에 그런 것이 答을 줄 수는 없습니다. 資本主義는 분명히 自由競爭의 市場經濟를 통해 物質的 發展에는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보듯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격차를 낳고, 社會共同體的 一體感을 害치며, 物質主義와 黃金 萬能主義를 낳으므로써 人間을 精神的으로 道德的으로 墮落시키기 쉽습니다. 唯物論的 共産主義가 人間 本性에 反하는 反人間的인 것이라면, 資本主義는 修正되지 않으면, 또 道德的 뒷받침이 없을 때에는 弱肉强食을 낳으므로 反人倫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人間으로 하여금 참으로 人間답게 살게 하지 못하며, 人間이 던지는 根本 問題,

人生의 意味를 묻는 물음에 答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現代의 自然科學은 答을 줄 수 있습니까? 오늘날 自然科學은 發達하여 人工衛星을 띄워 宇宙의 神秘를 벗기기 始作했습니다. 그러나 自然科學은 萬物의 靈長인 人間 宇宙 萬物의 頂點에서 있는 人間의 神秘를 알 수 없고, 人間이 던지는 意味에 對한 물음에 答을 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류가 지니고 있는 모든 知識의 總體를 向하여 '人間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해도,

그 지식의 총체는 答을 하지 못할 만큼 人間이란 참으로 神秘스럽습니다. 宇宙 萬物 中에서 自己 意識을 가지고 生覺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것은 人間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世上을 支配하는 理念도 自然科學도, 그리고 世上 모든 이가 얻기 위해 부지런히 추구하는 돈도 權力도 名譽도 人生의 意味에 對한 물음에 答을 줄 수는 없습니다.

 

人間이 무엇이냐? 그리고 人生의 意味는 무엇이냐?

이 물음에 答을 줄 수 있는 이는 人間을 創造하신 하느님, 人間을 救援하러 오신 그리스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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