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禪과 言語

장백산-1 2013. 3. 6. 09:43

 

 

 

禪과 言語 (3)/ 김태완 

<현대불교신문> 기고글.


 

이제 조사선의 어록에서 언어와 관련한 언급이나 깨달음의 일화를 통하여

禪과 言語의 관계를 보다 具體的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육조단경>에서 혜능이 言語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오조 홍인에게 의발을 부촉받고 남쪽으로 피해 가는 惠能을 뒤쫓아와 법을

설해주기를 간청하는 惠明에게 준 혜능의 가르침은,

 “善도 生覺지 않고 惡도 生覺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에,

무엇이 그대의 本來面目인가?”라는 이었다.

혜명은 이 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혜능의 첫 제자가 된다.

여기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란 곧 모든

思量分別을 쉬어버린 때를 말하며(破邪이다), 모든 思量分別을 쉬어버린 때에

드러나는 것은 오직 如如한 自性뿐인데(顯正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本來面目이다. 이처럼 혜능의 가르침은 言語 곧 思量分別을 쉬어버린 곳에서

自性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思量分別을 쉰다는 것이 무언(無言)의 沈默 속에

잠긴다거나 生覺이 깨끗이 비어버린 虛空 속에 머문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도리어 공(空)에 執着하는 변견(邊見)에 빠지는 것이라고

혜능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문(禪門)에서는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를 내세운다고 <육조단경>에서

말하는데, 이 때 無念이나 無相은 ‘생각(念) 속에서 生覺이 없는 것’이며 ‘相 속에서

相을 벗어나는 것’이지, 生覺과 相을 버리고 허무(虛無)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卽 無念은 生覺 속에서 生覺이 아닌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며,

    無相은 相 속에서 相이 아닌 自性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生覺과 相 속에서 生覺과 相에 머물지 않는 것이 곧 無住이다.

요컨대 상(相) 속에서 성(性)을 發見하라는 것이지, 相을 버리고 性을 찾으라는 말은 아니다.

性은 相이라는 作用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므로,

性만으로는 어떻게도  相으로 드러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지, 말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말을 잊고 고요히 앉아 삼매에 빠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說法과 傾聽 혹은 問答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自性은 言語라는 相을 드러내는 作用을 通하여 自身의 存在를 알리기 때문에,

自性의 파악은 言語 속에서 可能한  것이다.

 

조사선에서 깨달음이 늘 ‘말 아래의 깨달음(言下便悟)’이 되는 理由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은 <육조단경>의 후반부에 혜능이 이른바 10대 제자들에게 종지(宗旨)를

잃지 않게 法을 說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부분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혜능이 가르치는 설법(說法)의 방식이란, 법을 설함에는 반드시 두 개의 相對法

(한 쌍의 모순개념이나 상대개념)을 함께 提示하여 모든 法은 相對的이고 相互依存的으로

成立할 뿐 홀로 存在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두 相對法의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 中道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이리하여 法이란 모두 相對的 思考體係 속에서 緣起的으로 드러나는 觀念的 具成物일 뿐임을 밝히고,

그와 같이 法을 緣起的으로 發生시키는 것이 바로 自性의 作用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自性은 물론 緣起라는 作用으로 드러나지만 어떠한 相對法에도 속하지 않는다.

卽 自性은 다만 緣起하는 作用일 뿐 어떤 法은 아니다.

다시 말해 自性은 지금 이 瞬間의 머무름 없는 作用일 뿐이다.

 

혜능이 說法이나 問答을 通하여 깨우치고자 한 것은 이처럼 言語動作 속에서

自性의 作用을 깨우치려 한 것이었다. 사실 <육조단경>과 그 이후의 조사선에서

기록되어 있는 깨달음의 事件들은 모두 說法을 듣거나 問答 途中에 을 듣고 깨달았다는 것들이며,

조사선을 계승한 후대의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方便으로서 화두(話頭)를 이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따라서 禪에서는 言語를 십분 活用하여 見性을 추구하고 있지,

言語를 버리고 沈默을 지키기를 要求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言語는 見性을 向한 가장 重要한 手段이다.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