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眞如는 우리 自身의 本性이다.

장백산-1 2013. 4. 17. 19:44

 

 

眞如는 우리 自身의 本性이다 |선어록(禪語錄)

유당 | 조회 16 |추천 0 |2013.01.26. 04:08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JZc/242 

 

眞如는 우리 自身의 本性이다  (달마의 血脈論4-眞如)

 

知識을 쌓는다고 해서 無知가 그대의 存在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방안의 어둠을 밝히려면 빛에 對한 知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實際的인 빛이 必要하다. 그대는 自身의 內面의 빛을 發見해야 한다.

自身의 存在와 自身의 本性을 發見해야 한다.

自身의 存在를 發見하는 瞬間 모든 어둠이 사라지기 始作한다.

그대 存在의 中心이 바로 純粹한 빛이기 때문이다.

여여(如如)한 것, 本來 그러한 것.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事物의 本性이 本來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本來 그러한 것' 거기에는 幸福해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어떤 것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營響을 받을 필요가 없다.  생이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의 ‘本來 그러한 것’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方式임을 記憶해야 한다.

 

江은 바다를 向해 흘러간다. 흘러가는 그것이 江의 ‘本來 그러한 것’이다.

불은 뜨겁다,  뜨거운 그것이 불의 ‘本來 그러한 것’이다.

 ‘本來 그러한 것’이 우리의 本性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고타마 붓다에게 辱을 하고 꾸짖었다. 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後에 제자들이 와서 물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그것이 그 사람의 ‘本來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말없이 앉아 있는 것 그것이 나의 ‘本來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하지도 않고, 더 높지도 않다.

단지 우리의 ‘本來 그러한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의 本性이 다를 뿐이다.”

 

『붓다는 사람들이 妄想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行爲를 通해 끝없는 輪回의 江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自身의 本性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들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自身의 無心을 떠나지 않는다.』의 해설

 

깨달은 사람들은 저마다 自己만의 固有性을 갖고 있다. 이것 때문에 많은 誤解가 생겨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行動이 고타마 붓다와 다르고, 마하비라의 行動이 고타마 붓다와 다르고,

크리슈나의 行動이 고타마 붓다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타마 붓다의 제자인 달마 역시 고타마 붓다와 똑같이 行動하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오직 붓다만이 옳다고 生覺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옳지 않다.

이러한 誤解는 모든 부처가 어느 時代에나 恒常  똑같을 것이라고 生覺하는 데서  비롯된다.

存在界에 똑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存在가 自身만의 固有性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 固有性은 더욱 强해진다.

깨달은 者는 고리샹카 봉우리처럼 우뚝 서서 별들에 가 닿는 히말라야 봉우리가 된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다른 봉우리들과 같지 않다. 다른 어떤 山과도 같지 않다.

그것은 다만 그 自身일 뿐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이 아무리 몸가짐이 다르고, 아무리 哲學이 다르고, 아무리 行動이 다르고,

아무리 個性이 다를지라도  여전히 똑같은 맛, 여전히 똑같은 無心을 갖고 있다는 事實이다.

그들의 內面 깊숙한 곳은 똑같다.

그들은 똑같은 빛이다.

초의 貌樣에 따라 判斷하지 말라. 초는 어떤 모양이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양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더라도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똑같다.

重要한 것은 초가 아니라  촛불에서 나오는 불꽃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多樣性을 받아들일 準備가 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생산라인을 거쳐 나온 自動車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부처를 원한다. 그러나 부처는 機械가 아니다. 그리고 부처는 쌍둥이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自己만의 香氣를 갖고 있고, 마하비라는 自己만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붓다 역시 自己만의 빛을 갖고 있다. 表面的으로 보면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獨特하다.

그리고 그런 多樣性은 아름다운 일이다. 만일 모든 부처들이 예수그리스도와 똑같다면,

만일 모두가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世上은 더없이 貧困해졌을 것이다.

이 世上은 장미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모든 種類의 꽃을 다 가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種類의 꽃香氣를 다 가져야 한다. 오직 그 때만이 存在界는 富者가 된다.

 

無心은 깨달은 者의 불꽃이다. 깨달은 者는 自身의 마음이 아니라 自身의 本性에 따라 움직인다.

그대가 自身의 本性과 調和를 이룰 때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確固한 平定을 갖게 된다.

『어떤 動作, 어떤 形態의 것이든 事物을 區分하는 能力은 無心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無心은 어떤 特正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如來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의 깨어 있음 또한 마찬가지다.”

네 가지 料素로 構成된 肉體 (고기 몸)는 問題가 있다. 物質的인 肉體는 삶과 죽음에 따라서 左右된다.

그러나 眞身(法身)은 存在함 없이 存在한다. 如來의 眞身은 결코 變함이 없기 때문이다. 經에 이르기를

“부처의 本性이란 自己가 恒常 갖고 있는 어떤 것임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의 해설

 

그대들 모두 自己 안에 똑같은 空間을, 똑같은 無心을, 그리고 하나의 獨特한 꽃으로 피어날

똑같은 可能城을 갖고 있다. 모든 人間 存在가 그것을 갖고 있다.

 內面의 存在에 關한 限  가난한 者도 없고 부유한 者도 없다. 그대는 恒常 그것을 갖고 있었다.

至今 이 瞬間에도 그대들 모두는 부처들이다.

그대가 깨닫는 瞬間 그대는 첫 번째로 自身에 對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따뜻한 茶 한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한바탕 웃음은 恒常 自己 안에 있었던 어떤 것을 찾아 無限한 歲月을 헤맨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茶 한잔은 그대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그대는 數世紀 동안 찾아 헤맸지만 結局 아무 것도 發見하지 못했다.

찾는 者 本人을 그대는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그대가 自身의 本性을 發見하면

그대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그대는 恒常  깨달음의 狀態 속에 있었다.

단지 그대가 그 事實을 自覺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다이아몬드 하나를,

世上에서 가장 큰 코히누르 다이아몬드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도

평생을 거지처럼 동냥하며 다닌 것과 같다. 그대는 自身의 호주머니 속에

世上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는 事實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發見하는 날, 그대는 삶이 그대를 데리고 엄청난 농단을 했음에 놀랄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없이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마하가섭이 문득 微笑를 지었다.

그는 그 瞬間에 문득 自身의 內面을 들여다보았고 自身 역시 부처라는 事實을 발견했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마하가섭도 오직 自身의 本性을 깨달은 것이다.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그대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尊敬할 必要가 없다.』의 해설

 

 

달마는 自然스럽게 일어나는 尊敬心을 否定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럴 '必要'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義務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부처를 尊敬할 義務가 없다. 그러나 그럴 必要가 없다 해도

그대의 全存在가 自然的으로 尊敬心을 느낄지 모른다.

必要에 依해서가 아니라 그대 스스로 깊은 尊敬心과 感謝의 마음을 느낄지 모른다.

부처가 그대의 未來를 나타내 주고  그대에게 그대의 本性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眞實한 尊敬心이다.

그대가 하나의 必要에 따라서 그렇게 할 때 그것은 가짜다.

그러나 그럴 必要가 없다고 말해도

저절로 尊敬心이 그대 안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眞實한 것이고 眞情한 것이다.

그  저절로 일어난 尊敬心은 사랑이고, 感謝이고, 그 自體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이  無心은 텅~비어 있으며 어떤 모습도 담고 있지 않다.

겉모습에 매달리는 者들은 모두 魔鬼들이다.』의 해설

 

佛敎에는 神도 없고 惡魔도 없다. 神과 惡魔는 늘 함께 存在한다. 그들은 銅錢의 兩面과 같다.

신은 악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악마 역시 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둘은 똑같은 事業에 參與한 同業者들이다.

그러나 둘 다 假說的인 存在이다.

여기서 달마가 사용하고 있는 '악마'라는 단어는 單純히 '어둠'을 뜻한다.

그것은 어둠을 擬人化시켜 말한 것이다.

한 人格體로서의 惡魔는 存在하지 않는다.

한 人格體로서의 神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신성(神性)이나 惡함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절과 사원과 교회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온갖 종류의 崇拜는

全的으로 無知의 所産, 어둠의 所産이다.

 

아는 자는 살아가는 삶 自體가 하나의 崇拜이다. 그는 절이나 교회로 가지 않는다.

그가 살아가는 삶은 스물네 時間이 하나의 崇拜이다.

그의 삶은 하나의 充滿된 祈禱 外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慈悲와 사랑과 感謝의 삶을 살아간다.

그의 모든 動作 하나 하나가 그의 깨달음을 드러낸다.

『崇拜하게 되면 그대는 魔鬼의 手下에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指適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自覺하지 못할까 염려해서다.

부처의 本來面目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奇異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이 말을 明心하라.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無心이 本來  純粹하다는 事實을 疑心하지도 말라.

그대의 純粹한 無心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귀신이나 마귀나 신령한 것들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존경하지도 말라.』

의 해설

 

그대의 마음 속에는 오직 幻像만이 있다. 그것들은 幻覺에 불과하다.

부처를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유령을 보는 사람도 있다.

모든 種類의 사람이 모든 種類의 幻像을 본다. 그것들은 全部 그대 마음이 만들어 낸 가짜들이다.

그것들을 尊敬하거나 두려워할 必要가 없다.

『그대의 無心은  本來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겉모습들은 幻像일 뿐이다.

  겉모습에  執着하지 말라.』의 해설

 

오직 이 한가지를 記憶하라.

그대의 本來 本性은 絶對的인 沈默이다. 平穩함이고 平和로움이다.

本來 本性은 거의 에 가깝다.

그것이 그대의 佛性이다.

그대의 本性이 활짝 깨어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을 自覺하는 것이야말로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經驗이다.

그것은 삶과 탄생과 죽음으로부터 解脫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탄생과 죽음, 煩惱와 苦痛을 낳는 바퀴로부터 그대를 解放시켜 준다.

그것은 그대를 歡喜의 世界로, 永遠한 기쁨의 世界로 引導한다.

 

달마의 이 禪語錄은 그대의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라.

깨달음이란 外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단지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數百萬 번의 生을 그대는 잠든 채 살아왔다.

얼마나  더 잠들어 있기를 願하는가? 

이제는 깨어날 時間이다.

事實 그대는 너무 많이 잤다.

이제 自己 自身에게 친절을 베푸는 意味에서라도 잠에서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