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if]--> 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는요, 당분간 幸福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하고도, 아마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궁금점이죠. 행복에 대한 어떤 담론을 좀 이야기할까 하는데. 우리가 절에 다니는 이유도 행복하기 위해서 절에 다니고.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삶이 하루하루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법당에 나오는 이유가 없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법당에 나오게 되면 하루하루가 나날이 행복해지고 점점 더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삶들이 이어져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행복에 대해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if !supportEmptyParas]--> <!--[endif]--> 幸福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두 가지가 있냐하면 우리들이 追求하는 幸福이 있어요. 대部分의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幸福의 方式이 있고, 그러나 부처님 같은 분께서 추구하는 어떤 聖人들이 추구하는 또 幸福의 方式이 있어요. 어떻게 되느냐하면 보통 우리들이 幸福 하려고 하면 무엇을 幸福이라고 生覺하느냐하면 내가 바라는 게 있단 말이에요. 여기 계시는 분들 전부 다 다른 바람들이 있을 겁니다. 願하는 것이 있어요. 그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願하는 게 다 다르단 말이죠. 그런데 重要한 것은 내가 願하는 것을 얻으면 다 幸福합니다. 바라는 것을 이루면 행복해요. 대분의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이루면 행복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한생을 열심히 살아가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돈도 벌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願하는 것을 이룹니다. 그래서 願하는 것을 하나두개 이루었을 때 너무나도 幸福에 겨워지죠. 그런데 막상 願하는 것을 하나를 딱 이루고 나면 또 다른 願하는 게 생기고 또 다른 願하는 게 생기고. 끊임없이 願하는 것이 생겨요. 언제까지 갈까요? 죽을 때까지 갑니다. 그러다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기 直前까지 뭔가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願하기만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幸福은 根源的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未來를 向해 追求하는 것이기 때문에. 幸福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未來에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어떤 假定 下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幸福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 때 가서 난 幸福할 것이다. 이걸 이루고 나면 그땐 나는 幸福하겠지. 지금은 이루지 못했으니까 不幸이 되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瞬間 滿足하지 못하고 自足한 삶을 살지 못하는 理由가 未來를 向해서 幸福을 꿈꾸기만 해서 그런 거죠. 뭔가 이루어야 될 것 얻어야 될 것들이 많은 겁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런 幸福은 未來에 焦点이 가있다. 그럼 지금 이 瞬間을 充分히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重要한 事實은 이것이 根源的이지 못한 幸福인 理由가 뭐냐 하면요, 未來에 언젠가 그것을 이루고 나면 행복하겠다고 生覺하는 瞬間 지금 이 瞬間은 그것을 이루지 못한 狀態가 되어버려요. 不足한 狀態가 되어버립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가 돼 버리죠. 그러니까 지금 이 瞬間은 언제나 不滿足인겁니다. 그러니까 苦라는 것이 不滿足이 苦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는 未來의 幸福을 追求하기 위해서 지금 이 瞬間이라는 가장 核心的인 時間은 不滿足한 삶으로 버리고 있단 말이죠. 이게 아주 重要한 部分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금 이 瞬間을 滿足스럽지 못하게 살게 되면 不滿足스럽게 살게 되면 지금 이 瞬間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느끼는 마음가짐. 이것이 내 삶의 未來를 創造해 냅니다. 그런 얘기 있잖아요. 一切唯心造라 그래서 마음이 世上을 만든다. 마음이 삶을 만든다. 우리 마음은 화엄경에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畵家와도 같아서 화가가 도화지위에 마음먹은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우리 人生을 마음먹은 대로 그려낼 수 있다 그럽니다. 그런데 어떤 方式으로 그리느냐하면 지금 이 瞬間 내가 追求하는 게 무엇이냐를 이 宇宙法界가 그려주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宇宙法界가 그려주는 게 아니란 말이죠. 무엇을 그리냐 하면 지금 이 瞬間 이 사람의 마음 狀態를 그대로 삶에 登場시켜버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즉 지금 이 瞬間에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불만족스러운 것을 끌어당기고 있는 거예요. 불만족스러운 일들만 내 인생에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瞬間 내가 演習하고 있는 마음이 불만족이니까. 만족을 演習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瞬間 행복하지 못한데 나중에 이걸 이루고 나면 행복하고 저걸 이루고 나면 행복하다고 여긴다면 그걸 이루지 前에는 不滿足을 演習하고 있거든요. 마음속에. 그러니까 지금 이 瞬間 每 瞬間 우리는 不滿足과 不評과 不滿들을 계속 해서 演習하고 있고, 그러니까 그 願하는 것이 이루어지기가 너무나도 어렵게 되는 거죠. 이룰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이 瞬間 願하는 것은 다른 건데 내가 당당히 演習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演習하고 있으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데 부처님 같은 분들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은 어떤 差異가 있느냐하면 바라는 것 自體를 놓아버리는데서 오는 幸福. 행복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바라는 것을 얻는데서 오는 행복인데 두 번째는 바라는 것이 없는 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기에는 아니 사람이 바라는 것이 없이 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얘기를 하지만,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 되겠죠.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는 것, 誓願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요, 執着 없이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바라는 건 뭐냐 하면 그 바라는 것을 執着하고 있어요. 그것이 目的이 되어서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 인생은 불만족스럽고 아직은 괴롭다는 것을 前提로 하고 있단 말이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純粹하게 바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만이 아니라 금강경의 大義이기도 하고 또 바가바드기타(산스크리트어: भगवद् गीता Bhagavad Gītā)라고 하는 인도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거기에 핵심적인 가르침이기도 하고, 모든 진리의 성경의 말씀에서도 핵심, 모든 眞理의 核心이 뭐냐 하면 불교가 무집착의 종교라고 그래서 ‘아,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거구나.’ 이게 불교가 아닙니다. 願해라 하는 거예요. 해라. 그러나 머무는바 없이 行해라. 應無所住以生起心. 執着하는 바 없이 行해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바라지도 말라는 게 아니라. 바라되 執着하지 마라. 즉 그건 무슨 差異가 있느냐하면요, 執着으로 바라게 됐을 때는 그게 이루어지기 前까지는 나는 不幸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불만족스럽고 완전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執着으로 바라지 않는 사람은 내가 이런 것을 願하고 있지만,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금 이 瞬間 언제나 滿足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나 된다면 그것은 나만를 위해서 願하는 게 아니죠.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誓願, 發願이라고 해서 그것은 나 個人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一切 衆生을 위한 것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發願하는 것이 一切 중생을 위한 것이니까 그것을 하면 좋겠다고 發願은 하지만 願하긴 하지만, 純粹하게 願하죠. 執着이 없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데 하는 執着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것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執着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안 이루어지죠. 거꾸로 이루어집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돈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집착해 있는 사람은 돈이 안 벌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 월급을 받고 있어요. 예를 들어 월에 100만원 200만원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월급을 받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게 얼마가 되었든 300만원을 월급을 받는다고 쳤을 때 300만원 월급 받는 사람이 부자 되게 해주세요하고 계속 기도하는 것은 마음속에 事實은 뭐를 演習하는 거겠어요? 나는 300만원으로는 不足합니다. 나는 아직은 한참 부족하다. 이거로 만족 못한다. 나는 더 돈을 벌어야 된다. 이거를 演習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執着하면서 富者가 되려고 祈禱를 하면 그것은 마음속에 缺乏感을 演習시켜요. 不足을 演習시켜요. 그래서 마음속에 演習되는 것은 不足과 결핍감이 演習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부자가 될 수가 없는 거죠. 지금 이 순간 부자가 정말 되려고 한다면 지금 이 瞬間 完全히 滿足해야 됩니다. 完全히 感謝할 줄 알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돈으로 인해서 감사한 사람은 돈도 더 많이 벌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돈이 풍요롭다는 걸 마음속에 연습하고 있잖아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 더 많은 豊饒를 끌어당기고 있는 겁니다. 왜? 내가 풍요로운 마음狀態에 있으니까. 宇宙法界는 그 사람의 狀態를 그대로 反映하는 거예요. 풍요로움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점점 더 많은 풍요가 가게 되어있어요. 유유상종의 법칙.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서. 모든 것은 비슷한 것끼리 끌어당기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풍요로운 상태로 波動치고 넘치고 있으면 이 宇宙에 수없이 많은 물질들이 풍요로움들이 나에게 들어찰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꺼꾸로 결핍감을 演習해 왔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자는 지금 이 瞬間 이 자리에서 完全히 滿足하기 때문에 執着하면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執着하면서 바라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언제나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未來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瞬間에 무엇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때 幸福하겠다고 生覺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瞬間 이 자리에서 언제나 完全한 滿足, 完全한 幸福, 完全한 平和로움 속에 存在하는 거죠. 그래서 요즘에 보면 所有냐 存在냐 이런 얘기가 있잖아요. 그 말은 어쩌면 더 많이 所有해야지 幸福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 이 瞬間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通해서 充分히 存在할 것이냐? 충분히 내가 나에게 있는 것을 누리고 느끼고 만끽할 것이냐? 어떤 보살님께서 감사하게도 우리 법당 앞에 수선화죠. 아주 아름다운 꽃을 주셔서 어제였나 그제만 해도 이게 확 피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어제 하루 따뜻했었지 않습니까? 어제 날씨가 너무 따뜻했는데 그 따뜻한 날에 따라서 오늘 아침에 그냥 아주 이렇게 화창하게 아름답게 화들짝 피워버렸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런 작은 아름다움을 每瞬間 감사하고 느끼고. 보니까 저 꽃을 심어주신 보살님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늘 절 얘기를 해요. 절 처음에 왔을 때 저한테 하는 얘기가, 절 산책하면 참 예뻐요. 여긴 어디가면 예뻐요. 어디가면 뭔 나무가 예쁘고. 그런 것들. 그러니까 그 눈에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요, 지금 이 瞬間에 未來를 追求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瞬間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느끼는 겁니다. 充分히 그 存在感을 느끼는 거예요. 숨을 쉬는 것을 느껴보고 하루하루 空氣를 느껴보고 바람 불 때 바람의 接觸을 感觸을 느껴보고. 내가 밥을 한 끼 먹을 때 우리가 뷔페에 가서, 아주 비싼 뷔페에 가서, 아주 어마어마한 음식을 어마어마하게 막 뱃속에 막 집어넣으면서 배를 혹사시킬 때 그때 음식으로 인해서 진짜 행복할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때는 음식으로 인해서 사실은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힘들죠. 화가 나죠. 나중엔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데 정말 배고플 때, 정말 배고플 때, 고구마 하나 감자 하나가 되었든, 아주 작은 음식이 되었든, 그 맨밥 있지 않습니까? 맨밥. 하얀 쌀밥도 좋고 현미밥도 좋고 맨밥. 그 맨밥 이렇게 한 번씩 드셔보셔요. 그러시겠지만, 맨밥만. 맨밥만 가만히 먹었을 때 아~ 밥맛이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이렇게 맛있는 거였구나. 참 맛없는 반찬이 있을 때 해치우는 방법이 배를 고프게 한 다음에 그 맛없는 반찬 하나만 딱 놓고 밥과 그것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는 겁니다. 충분히 느끼면서 먹을 때는 그것이 훨씬 더 맛있고. 동일한 음식인데 존재하면서 먹게 됐을 때요. 그 먹는 순간 존재하게 됐을 때, 그러니까 우린 대부분 먹는 순간 빨리 먹고 나서 딴 일 해야지. 빨리 먹고 배 채워야지. 뭐 빨리 먹고 다른 거 더 맛있는 거 또 먹어야지.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금 이 반찬 먹고 있는 순간에도 더 맛있는 반찬에 빨리 손이 가야지. 온갖 미래를 향한 마음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언제 한번 혼자 계실 때가 된다면 한번 혼자 온전히 밥 먹는 명상을 한번 해 볼 수 있어요. 밥 한 술 입에 넣고 오랫동안 씹으면서 그 밥에 맛을 가만히 음미해 보는 것. 그게 바로 存在입니다. 그 瞬間 存在하는 거에요. 그랬을 때 밥한 숟가락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거든요. 밥 한 숟가락이 나한테 冥想의 道具가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길을 걸을 때도 그냥 운동해야 되니까 휙~ 걷는 것도 좋지만, 뛰더라도 뛰는 내 호흡을 느껴보고, 마음을 느껴보고, 하늘도 한번 바라보고, 풀도 한번 바라보고, 꽃도 한번 바라보고 그랬을 때, 걷는 瞬間, 뛰는 瞬間 그 모든 것이 冥想이 됩니다. 그 瞬間에 存在할 수 있으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그렇지 않고 좀 운동을 해야 몸이 좋아지니까 오늘 숙제 한번 채워야 되겠다 해서 30분 1시간 휙 뛰어와야 되니까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전혀 보지를 못하고 살죠. 제가 旅行에 많이 비유를 드리는 이유는 旅行을 가면요, 모든 것이 정말 詩처럼 느껴집니다. 旅行地에 가면 모든 것이 이렇게 정말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그냥 차 한 잔 집에서 이렇게 마실 때하고 旅行地에 갔을 때 어디에서 차나 한 잔 놔두고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차 한 잔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同一한 경치인데 우리가 지금 매일 보는 경치는 아름답게 안 느껴지거든요. 그러나 旅行地에 가서는 그것이 느껴지거든요. 제가 고성에 속초에 있을 때 정말 그 경치는요, 정말 히말라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성의 겨울을 보내보니까요. 히말라야 산맥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설산이 펼쳐져 있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한편 이쪽 편으론 바다가 파랗게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그 중간에 法堂이 있었어요. 그러고 산책을 하면 주변이 논밭으로 되어있었는데 논밭 중간에 약간 높아서 거기 서있으면 왼쪽은 설악산 산맥이 쫙 그냥 설산 히말라야 설산처럼 펼쳐져있고, 오른쪽으로는 파란 그냥 바다가 펼쳐져있고,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하얀 눈 속을 걷고 있거든요. 너무나도 아름답고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운데, 고성에 있는 사람들, 속초에 사는 사람들, 바닷가에 1년 돼야 바닷가 구경을 안 합니다. 만날 보는 거니까. 정말 1년 동안 한번을 가서 구경을 안 합니다. 그냥 휙 보는 것이지 제가 말하는 구경이라는 것은 가서 자리 잡고 앉아서 오래도록 注視하는 거죠. 오래도록 注視를 안 합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注視하면서 感想에 빠져있는 사람은 全部다 旅行 온 사람들이에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그것을 고성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東南亞나 美國이나 유럽이나 수없이 많은 외국 사람들은 강남스타일을 본다고 한국 서울에 여행 오잖아요. 서울에 여행 와서 하나하나 보는 것마다 새롭고 경이로움을 느낄 때, 그때 바로 그 瞬間 존재감을 느끼는 거거든요. 그래서 旅行地로 떠나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接하면 우리는 存在感을 存在하게 됩니다. 왜그러냐하면 이미 보던 것도 事實은 날마다 새로운 건데 우리는 만날 보던 걸 보게 되면, 아 그건 나 다 아는 거야. 하는 生覺으로 보니까 眞情으로 볼 수가 없어요. 안다는 마음이 있으니까. 이미 난 經驗한거야. 그건 다 아는 거니까. 그건 굳이 느낄 필요 없어. 우린 밥 먹으면서 밥맛을 새롭게 난생 처음 먹어보는 밥맛처럼 새롭게 느끼지 않지 않습니까? 밥맛 다 아는 거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안다는 生覺을 놓아버리고 오직 모를 뿐. 모른다는 生覺으로 텅~ 빈 마음으로 그 밥을 60, 70 평생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새롭게 먹어볼 수도 있단 말이죠. 그렇게 됐을 때 그 밥맛은 단순한 밥맛이 아니라 冥想으로 들어가는 入口가 됩니다. 이와 같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고 만끽하면서 存在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어떤 秘訣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첫 번째는 願하는 것 바라는 것을 얻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願하는 것을 얻었을 때 오는 행복이고. 두 번째는 願하는 것이 없을 때 오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전부다 우리에게는 필요하겠죠. 불교는 원하는 것이 없을 때 오는 완전한 자족에서의 행복이 최고라고해서 그것만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까 무조건 무소유해라. 벌지도 말고, 자식 대학 좋은 데 보내려고 애쓰지도 말고, 공부하지도 말고, 그게 아닙니다. 그게 불교의 전부가 아니에요. 부처님 당시에 보면 수없이 많은 정말 장자들, 임금, 평민 할 것 없이 모든 분들이 정말 평등한 마음으로 다 와서 함께 공부를 하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그 關聯된 法門을 하셨단 말이죠. 부처님께서 경전에 가난하게 살도록 노력해라. 돈 벌지 말고 최대한 가난하게 살아라. 이렇게 법문한 적이 없다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願하는 것을 얻을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願하는 것을 眞情으로 얻는 사람은요, 眞情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은 冥想과 맞닿아 있어요.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맞닿아 있단 말이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제가 지금부터 이제 이번 주 부터해서 그 첫 번째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행복감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을 이생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지. 거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이렇게 펼쳐져 있잖아요. 이 세상이 펼쳐져 있는 이유는 뭐겠습니까? 全部다 空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냥 멍하게 살아라.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생에 온 목적은 저마다 性格이 다르고, 個性이 다르고, 職業이 다르고, 잘하는 게 다르고, 主特技가 달라요. 그건 理由가 있습니다. 저마다 自身의 人生에서의 目的이 있어요. 그 目的에 正確히 附合되는 性格, 외모. 특히 自器의 삶에 어떤 位置, 經濟力, 父母님, 친구. 이런 모든 것들이 正確히 맞게 주어졌단 말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가 諸法實相이라고 했는데 諸法 卽,모든 存在는 實相_그것 自體로 眞理의 貌樣으로 태어나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거 自體가 眞理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이 모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目的은 부처님처럼 劃一的으로 불교법당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劃一的으로 부처님을 닮아가서 부처님처럼 사는 게 目的이 아닙니다. 똑같이 부처님처럼만 살려고 할 必要가 없다. 부처님은 누가 부처님이냐 하면, 어떤 特定한 性格을 가진 분이 부처님이 아닙니다. 내성적인 사람이 부처님인가? 외향적인 사람이 부처님인가? 그렇지 않죠. 어디에도 부처님은 있는 거죠. 다시 말해서 저마다 자기 안에 부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目的은 어떤 特定한 틀을 定해서 부처님이라는 틀을 定해놓고 그것과 똑같이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存在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뭐가 되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는 지금 중생이고, 부처는 언젠가 未來에 내가 쟁취해야 될 目的이 되니까 지금은 부처가 안 되놓으니까 滿足스럽지 못합니다. 지금 이 瞬間에 存在를 못하게 되요. 우리의 目的은 自己답게 사는 것. 自己의 빛깔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이 目的입니다. 즉,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베풀고 남에게 이익을 줄 수도 있겠죠. 말로 베푸는 사람은 말로서 이익을 주고 베풀 수도 있겠죠. 화창하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 웃는 모습 하나만 보고도 많은 사람이 감동받고 행복해질 수가 있겠죠. 저마다 自己의 特技대로, 自己의 特性대로 自身의 어떤 그 삶의 方式대로 모든 사람을 利롭게 하고, 이 世上을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을 보고 저렇게 되고 싶은데 하고 부러워하는 것. 그럴 必要가 없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더 自己 自身에게 集中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안에 主特技는 무엇일까? 내안에 있는 어떤 정말 나다운 빛깔은 무엇일까를 봐서 나다운 빛깔대로 世上을 이롭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혹시 제 이야기를 들을 때는요, 그 최대한 바르고 올바른 자세를 갖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便安하게 다리 쭉 뻗고. 제발 좀 다리 좀 뻗고 들어주세요. 제가 예전에 골반, 어릴 때 태권도를 많이 하다보니까 한쪽 발을 많이 써서 골반이 틀어져 있었어요. 한동안. 절을 많이 하면서 좋아졌는데, 그때 정말 절에서 스님법문 듣는 게 제일 싫었습니다. 골반이 틀어져 있다 보니까 앉을 때 않아있는 자세가 너무 힘든 거였어요. 그래가지고 그 당시는 정말 너무너무 죽을 거 같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최대한 다리를 쫙 펴시고 부처님 전으로만 딱 안 펴시면 되니까. 옆으로 삭 펴시고 便安한 마음으로 이렇게. 누워서 들어도 사실은 괜찮아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우리가 누워서 들으면 안 된다는, 부처님 전에 와서는 이러면 안 된다는 固定觀念에서 사로잡혀 있으니까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룩해야 되고 부처님 전에서는, 뭔가 이렇게. 이것도 우리들의 어떤 偏見입니다. 부처님은 거룩함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벼움 속에도 있고, 모든 속에 다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다움 빛깔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것이 어떤 우리들의 삶의 目的이고 그러려면 우리는 언제나 지금 이 瞬間 이 자리에서 自己다워야죠. 그런데 마음속에 生覺이 나다우면 안 좋은 거 같은 거예요. 저 사람 참 좋아보이니까. 저 사람다웠으면 좋겠는데. 저 사람같이 좀 했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나는 좀 不足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自器답게 온전하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위해서 내가 나답게 사는 方向으로 가면서 願하는 것이 있어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학자는 내가 학자로서 어떻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하는 願하는 게 있고, 군인은 군인다운,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자식은 자식다운 모두가 願하는 것이 있단 말이죠. 自己다운 方式으로 사는 삶에서 願하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執着 없이 願할 때 이룬다고 그랬는데, 그 願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方法이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方法을 모르다 보니까 거꾸로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이 가르침을 工夫해보면 정말 놀랍게, ‘아, 지금까지 내가 정말 거꾸로 보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몇 시간 정도는 제가 願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幸福을 여러분에게 그 方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願하는 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내가 바라는 것을 어떻게 이생에서 이룰 수가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다음 연이어서는 두 번째 願하는 것이 없을 때 오는 幸福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願하는 것을 놓아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은 더욱 더 박진감 넘치고 에너지 넘치게.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願하는 것을 얻을 때와 없을 때, 이 두 가지를 딱 工夫를 하고 보면, ‘아, 정말 내 人生의 幸福이라는 것은 내가 공연하게 찾아만 다녔구나.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뚜렷하게 있는 것을 몰랐었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또 願하는 것을 남들보다 더 강력하게 얻을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願하는 것을 分明히 얻을 수 있는. 그런데 더 偉大한 것은 願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빨리 獲得할 수 있는 方法을 얻게 되는데 더 偉大한 것은 설사 못 얻었다 할지라도 하나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는 自己中心을 얻게 되요. 그래서 이 幸福에 對한 이야기들을 앞으로 제가 좀 더 하도록 그렇게 하겠고. 오늘은 여기까지. 서론으로 마감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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