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한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계(緣起法界)
방 안에 있는 먼지 하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사실 關心조차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면 귀찮은 청소의 대상일 때뿐일 것입니다. 대체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어디에 있을까요. 더 重要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먼지 하나에 있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먼지는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래서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티끌 하나에 대한 이야기보다 우리 自身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고 나서 티끌 하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홍길동의 無常, 無我나 宇宙 全切의 無常, 無我는 같은 本來面目입니다. 그리고 그 本來面目이 홍길동이라는
개별자의 개체화된 제한된 시공에서도 그 자체로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無常, 無我의 삶은 그 自體로 宇宙의 총체상(總切相)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곧 個別者 홍길동은 宇宙의 部分이
아닌 宇駐 그 自體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존재할 수 있고, 홍길동이 없음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自身을 보면 늘 있는 그대로 있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知覺은 늘 同一한 모습을 對相으로 해야만
認識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時空의 制限된 同一 領域을 設定해 놓고 그것에 의해서 事物, 事件을 파악하고 있는 意識을 깊은 修行力으로
넘어설 때, 우리는 홍길동 한 사람의 태어남에서 새로운 宇宙의 태어남을 볼 수 있으며, 홍길동 한 사람의 죽음에서도 한 宇宙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태어남은 죽음과 같이하고 죽음은 태어남과 같이하는 생멸동시(生滅同時)의 變化들이 無限히 겹쳐진 宇宙, 곧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 모습을 나툽니다. 때문에 인연화합(因緣和合)의 場에서 하나라고 보면, 티끌 하나라고 할지라도 그 참性稟은 宇宙의 모든 存在를 감싸고도 남습니다.
티끌은 티끌이며 홍길동은 홍길동으로 個別者로서의 특수한 모습을 잃지 않으니, 그 모습 그대로가 眞如空城인
無常, 無我의 나툼이기 때문입니다.
온 宇宙를 貫通하는 법계신(法界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法身佛의 법음(法音)입니다. 이와 같은
無常, 無我의 超越, 그리고 現象의 同一性과 差別性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世界를 始作도 끝도 없는
[無始無終] 緣起法界라고 합니다. 現象 그대로가 眞如불성(진여佛性)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大小 長短의 어느 것에서나 差別 없는 法界이면서 同時에 大小 長短으로 나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時空의 制限을 넘어선 始作도 없고 끝도 없는 데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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