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無明이 佛性이고 빈 몸이 그대로 法身

장백산-1 2014. 10. 14. 01:31

 

 

 

영가현각 『증도가』 ②
無明이 佛性이고 빈 몸이 그대로 法身
2005년 08월 31일 (수) 09:00:00법보신문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배워야 할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져 버린 한가한 道人을.

(그는) 妄想을 없애지도 않고 眞理를 求하는 일도 없다. 無明의 本來 性稟이 그대로 佛性이고

허깨비인 텅~빈 몸이 그대로 法身이다.”

‘증도가’의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구절에 鎔解되어 있다. 修行者를 여기서는 道人으로 표현한다. ‘증도가’는 道人의 깨침에 대한 경계, 공부의 과정, 수행자의 정진에 대해 말하고 있다.

三學의 수행도 이제 끊어지고 해야 할 일도 없어져 버린 이 道人은 ‘自然’으로 돌아 간 것이다. 그는 妄想과 眞理에 대해 이제 關心이 없다. 그 理由는 無明의 本體가 佛性이고,

肉身이 그대로 空身이며 法身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백장광록』에서 ‘부처는 무사인(無事人)이고 무구인(無求人)’이라고 말한 것처럼,

깨쳐서 一切의 티끌(煩惱妄想)이 없어져 버린 모습이기에 ‘天眞佛’이라고 했다.

이러한 境界에서 五蘊은 뜬구름과 같은 것이며 三毒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實相을 證得하면 自我와 對相의 差別이 없으며, 가게 되어 있는 無間地獄도 찰라에

滅覺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짓말로 衆生을 속인다면 永劫토록 拔舌地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한다. 현각은 잘못된 思想과 理念으로써 佛法을 설교하는 禪師들에게 우레와 같은

질타를 한다.

“홀연히 깨침, 이것이 바로 如來禪. 六途卍行도 本來 自身에게 具備되어 있는 것.

꿈속 분명코 육취를 輪廻하고 있었지만 깨친 후, 텅~비어 大千世界도 없음이다.”

如來禪은 如來로부터 傳해진 禪이라는 것인데 마조이후, 이를 달마가 중국에 전한 것으로부터 祖師禪이라고 한다. ‘조사선’은 백장의 제자 위산영우와 그의 제자 향엄과의 선문답에서 처음 나온다. 현각은 ‘돈각’하게 되면, 스스로 六波羅蜜行이 갖추어져 있음을 본다는 것.

 

『임제록』에도 ‘그대는 육도만행을 닦는다고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雜行이라고 할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境界에는 “罪와 福도 없고 損害와 利益도 없으니, 寂滅의 本性가운데서 물어 구하지

않는다. 지금껏 한 번도 때가 낀 거울을 닦은 적도 없었지만 오늘에 이르러 분명 부숴 버렸다.” 煩惱妄想을 除去한다고 하는 것은 功을 들이는 修行法에서나 하는 것, 無一物 世界에서는

거울 自體를 부수는 것이다. 寂滅性稟의 自覺이기 때문이다.

“누가 無念이고 누가 無生인가.” 신회의 남종의 입장을 無念, 無住, 無相에 있다고 한 것을

非板하고 또한 無生은 북종의 대승무생을 가르키는 것이다. 無念은 生覺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無의 念’ 卽, 生覺, 思量이 끊어진 생각(非思量)이다. 이것이 바로 般若의 正念이다.

“實로 남이 없다(無生)면 태어나지 않음(不生)도 없다”. ‘實로 남이 없다’는 것은 ‘태어났다고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父母로부터 태어났는데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理由일까?

태어났을 때부터 生命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本來의 永遠한 生命, 生命의 光明과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實際로 눈, 코, 귀, 입, 등이 있는데 『반야심경』에는 ‘없다(無)’고 한다. 無의 눈, 無의 코, 無의 귀 등으로 사는 것을 般若의 바라밀행이라는 것이다. 無念, 無生을 얻었다고 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修行이라는 것.

“꼭두각시에게 물어보아라. 功을 들인다면 언제 부처를 이루겠는가를.

” 無念無想이 되기 위한 禪이 아니라 非思量의 禪이라야 한다고 주창한다.

‘不生의 佛心’이라는 말이 있다. 卽, ‘깨침’은 ‘自我가 없을 때 모든 것이 自己가 된다’는

體驗이다. 自我가 無一物이었을 때 本來의 自己 卽 ‘無位眞人’인 法(달마)가 드러나는 것이다. 현각은 이 같은 수행자를 ‘절학무위한도인’이라고 했다.


혜 원 스님
동국대 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