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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깨달아 있다고?

장백산-1 2014. 11. 22. 21:00

 

 

 

 

14. 06. 04 - 이미 깨달아 있다고?|불교방송 다시듣기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평일 07:50~08:00)

2014년 06월 04일 방송

'이미 깨달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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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깨달아 있다고?

 

 

보통 우리는 깨달음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 혹은 내가 과연 깨달을 수 있기는 할까

등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없을까의 문제가 아닌 '언제' 깨달을 것인가 하는 時期의 문제에 있다.

 

왜 그럴까? 깨달음이란 누구나 얻을 수밖에 없는 當然한 權利이기 때문이다. 아니 깨달음이라는 말 자체가

觀念化되어 있어서 그렇지, 깨달음이란 事實 이미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별도로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삶 자체가, 이렇게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깨달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별도의 특별한 깨달음을 얻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는 그 眞理를 언제쯤 自覺할지의 문제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오랜 윤회가 필요할 지는 모를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 우린 모두 깨닫게 되어 있다.

아니 이미 진리 그 자체로써 살고 있으니, 그것을 언제쯤 알게 될지의 문제인 것이다.

 

조금 쉽게 말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없을까는 무의미하다. 다만 언제쯤 그 사실을 알게 될까 하는 시간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깨달음의 시기를 조금 앞당기고 싶어서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부처가 다만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빨리 깨달으려고 할 것도 없다.

꿈이야 언젠가 깨게 되어 있는 것인데, 꿈 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으니, 그것이 싫어서 빨리 꿈에서 깨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보니 깨달아야 할 중생도 없었고, 구제해야할 필요의 중생도 없음을 알고

열반에 들려고 했다. 그러나 범천의 권청을 통해 법을 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것은 범천만

자비심이 있고, 부처님은 자비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처의 觀點에서는 衆生의 苦 또한 幻想이지만,

범천에게 그 幻想은 너무나도 事實的이고 實質的인 괴로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범천은 부처님께

어차피 꿈은 깰 것이라도, 될 수 있으면 빨리 苦라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빨리 꿈을 깨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결국 깨달음이란 시간의 문제다. 조금 더 빨리 깨닫거나, 조금 늦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우린 모두 꿈을 깰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바로 그 관건이 되는 '時間'의 實體가 幻想이라는 점이다.

즉 언제 깨닫게 될 것인가 하는 이 절체절명의 문제가 바로 이 지점에서 空해지는 것이다.

 

깨닫고자 애쓸 필요가 없으며, 깨닫고자 하는 모든 인위적 노력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한 시간이 한 순간이고, 지금이 곧 무량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깨닫는 것과 미래의 어느 날 깨닫는 것이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속에 과거와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 깨닫는 것과 미래의 어느 시점에 깨닫는 것이 전혀 차이가 없다. 그 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도대체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 온 것인가! 어디를 향해 그리도 달려가고 있던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빨리 깨달으려고 애쓰고 노력해 온 것일까?

 

이제 어찌하겠는가. 그렇다. 그 모든 깨닫고자 하는 노력을 멈출 때다. 더 이상 달려갈 곳이 없다.

깨닫기 위한 그 모든 노력과, 수행과, 애씀과, 질주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깨닫고자 하는 그 모든 欲望과 虛想을 깨고, 그저 便安히 지금 이 瞬間이라는 거룩한 자리에

힘을 빼고 앉아 있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저 休息하라. 다만 存在하라. 이제 그만 멈추라.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기를 멈추고

지금 이 자리에 存在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doing이라는 行爲의 삶을

being이라는 存在의 삶으로 轉換하는 것이다. 그렇듯 그동안의 모든 有爲的 行과 努力을 멈추고 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저 觀客이 되어 便安히 쉬면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멈추어 서서 바라보는 것(지관,정혜) 말고 무엇을 더 하려는가.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07:50~08:0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