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의 새해 발심
보통 工夫를 많이 한 사람들은 내가 많은 것을 안다, 지식이 많다 고 生覺합니다. 그러나 佛敎工夫를 많이 한
사람들도 이처럼 ‘내가 佛敎를 좀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佛敎의 理論과 方便에 대해서 좀 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嚴密히 말하면 佛法 그 自體는 안다거나 모른다라고 할 수 있는 對相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이 佛法, 眞理는 알음알이로 헤아려 理解하는 對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分別 比較 解釋해서 알음알이로 헤아려 아는 것들을 佛敎에서는 ‘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識이라고 하는 마음이 對相을 알려고 하면 일단 對相과 마음이 둘로 나뉘어져 있어야 分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佛法, 眞理는 우리의 마음과 전혀 分離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眞理는 헤아림
分別의 對相도 안다 모른다의 對相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崇山스님께서는 이 法에 대해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禪佛敎의 祖師禪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동안 우리는 이 意識, 分別心이라는 識을 通해서만 對相을 認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認識 方法 그것이 오래도록 習慣化되어 오다 보니 法, 眞理도 알음알이로 헤아리고 分別해서 알려고
하는 習慣에 빠져서 眞理를 理解하려고 머리를 굴립니다.
그러나 眞理는 알음알이 머리를 굴려서 알 수 있는 어떤 對相이 아닙니다. 그저 그동안 해 오던 알음알이로
알 수 없다보니 알긴 알아야 하겠고, 도저히 머리로는 알 수 없다 보니까, 온통 꽉 막히고, 머리를 쓸 수 없으니
오도 가도 못하는 막막한 狀況이 되는 것이지요. 그저 疑問만 있지 헤어날 수 있는 方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답답하고 갑갑하고 온통 모를 뿐인 疑問만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禪에서의 話頭입니다.
對相을 分別하고 머리를 굴리면 둘로 나누는 분별하는 마음이기에 中道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혜능은
둘로 나누는 二法은 佛法이 아니며 오직 不二法만이 佛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不可思議한 不二中道,
卽, 不二法을 보는 것이 곧, 見性’이라고 말했습니다.
事實 法 곧 眞理는 이미 완전하게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眞理 法은 이미 完全히 드러나 있어서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말하고 밥 먹고 세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그 모든 瞬間이 眞理가 하고 있고, 眞理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眞理를 確認하지 못하는 理由는 바로 알음알이/識, 分別心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眞理가 完全히 드러나 있고, 내가 바로 부처(佛)라는 말은 곧 眞理 부처 나 사이에는 그 어떤 틈새나 分別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眞理와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곳으로 가는 方法이 있을텐데, 어디서나 바로
지금 이 자리에 明白하게 드러나 있고,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따로 가는 방법이 있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래서 이 마음工夫를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다고도 하고,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격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머리를 굴려도 안 되고, 특별한 방법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저 眞理를 알고야 말겠다고 하는 간절한 發心 뿐입니다. 佛法을 確認해 보고야 말겠다는 굳은
發心이야말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있는 이 眞理인 法을 唯一하게 確認할 수 있는 길 없는 길입니다.
금생에 꼭 깨닫겠다 라고 마음 속에서 發心을 하게 된다면, 그 發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 宇宙法界에서
스승이든, 도반이든, 기연이든 이 法과 契合하게 해 줄 그 모든 것들을 저절로 自然스럽게 만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2015년 새해 벽두에 우리 모두 금생에 부처가 되겠다는 大願力의 發心을 모두 함께 세워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