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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緣起 - 상

장백산-1 2015. 2. 17.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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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緣起 - 상
아이 손에 들린 바이올린은 악기 아닌 장난감
2015년 01월 06일 (화) 10:58:24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佛敎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緣起’라는 말로 佛法을 요약하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기(緣起), 緣하여 일어남이다. 어떤 條件에 緣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條件에 期待어 存在함이다.

反對로 그 條件이 없으면 存在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중아함경’에 있는 유명한 문구가 그것을 요약해준다.

變하지 않는 實體란 없다  條件 달라지면 本性 달라져

世上이 不變의 眞理 찾을 때  佛敎, 無常함 보는 智慧  提示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生겨나면 저것이 生겨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消滅하면 저것이 消滅한다.”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어찌 보면 當然하고 어찌 보면 特別하다 할 것 없어 보이는 이 緣起 가르침이 얼마나 ‘發本的’이고 重要한가는,

이 無常하고 可變的인 世界에서 不變의 것을 찾아 헤맨 形而上學의 오랜 歷史를 알지 못한다면 充分히 理解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브라만이나 아트만이란 實體를 찾던 석가모니 當時의 印度人은 물론, 西區 古代의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近代의 칸트도, 現代의 훗설도 無常한 것 저편의 確固하고 變함없는 것을

찾고자 했다. 眞理란 이 可變的이고 無常한 덧없는 世界의 저편에 있는 至高한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것에 ‘本性’이 있다면, 그 本性은 온갖 變化 속에서도 變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實體)라고 믿었다.

‘緣起的 思惟’는 이 모든 形而上學的 思惟와 訣別한다. 無常함의 저편을 찾는 게 아니라, 無常함 自體를

보는 것이 智慧임을 說하고, 어떤 條件에도 變하지 않는 本性이나 實體 같은 건 없음을 가르친다. 심지어

하나의 同一한 事物이나 事實조차, 條件이 달라지면 그 本性이 달라짐을. 그렇기에 可變的 世界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無常한 世上에서 幸福하게 살 方法을 찾으라고 말한다. 아주 달라 보이는 것에서도

‘同一한 것’을 찾는 ‘同一性의 思惟’와 反對로, 아주 비슷한 것에서도 ‘差異’를 보는 ‘差異의 思惟’라고 할 것이다.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소설에서, 심지어 동일한 것조차 조건에 따라 아주 다른 것이

됨을 매우 능청스런 익살로 극명하게 보여준 적이 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여러 가지 글을 쓰던 끝에 메나르는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20세기의 프랑스인인 그는 17세기

스페인어를 공부하여 탁월하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대한 연구 끝에

그는 드디어 세르반테스와 똑같이 ‘돈키호테’를 쓰기에 이른다. 그가 쓴 텍스트는 세르반테스가 쓴 것과

“언어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

가령 진리와 역사에 대해 세르반테스가 쓴 문장과 메나르가 쓴 문장은 점이나 쉼표 하나 다른 게 없는

동일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똑같아도, 아니 똑같기에 둘은 다른 글이다. 왜냐하면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모국어로 쓴 것임에 반해, 메나르는 외국어인 스페인어로, 그것도 고어인 17세기의

언어를 공부해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내용도 그렇다. 세르반테스가 진리와 역사에 대해 쓴 글은 당시

스페인의 똑똑한 지식인이라면 대개는 공유하고 있었던 생각이라면, 메나르가 쓴 글은 20세기인이라면

누가 보아도 낯설고 놀라운 생각이다. 두 사람이 緣하여 있는 條件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글이

사실은 아주 다른 문체,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 相異한 글이라는 것이다.

무슨 소린가 싶을 분들을 위해 우리의 경우에 상상할 수 있는 비슷한 예를 들어보자. 가령 漢字라는

탁월한 언어를 두고 平民들을 위한 글자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世宗 시대의 문인이 쓴 글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 시대에 누군가 한자의 탁월한 조어능력이나 시적인 능력 등에 감탄하여

열심히 한문을 배워 15세기 조선 양반처럼 한문에 능란해진 누군가가 한글의 평범하고 산문적인

감각이 불편해져서 그런 生覺을 글로 썼다고 해보자. 그리고 두 사람이 쓴 글이 세르반테스와

메나르처럼 놀랍게도 일치하였다고 해보자.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글이겠지만, 그것은 아주

다른 글이다. 한 사람은 自己 時代의 흔한 文體로 쓴 거라면, 다른 한 사람은 17세기 漢文의

스타일로 쓴 것이니, 고풍스런 문체를 구사한 글이다. 하나는 당시 지식인의 상식에 충실한

글이라면, 다른 하나는 20세기의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나 놀랄 어이없는 글이 될 것이다.

 

時代와 條件이 다르면, 똑같은 글도 전혀 다른 意味를 갖게 된다. 글이 處한 條件에 따라, 글의 의미나

성격이 아주 달라지는 것이다. 緣起的 條件이 얼마나 決定的인가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긴 쉽지 않을

것이다. ‘意味’만 條件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묻고 시작하자. ‘바이올린’이라고 불리는 物件의

本性은 무엇인가? 그렇다, 다들 認定하듯이, 樂器다. 音樂을 演奏하는 道具다. 그러나 그것이 내 어깨 위에서

내 손으로 연주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주 듣기 힘든 소리를 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바이올린을 演奏할

줄 모르니까. 이 경우에도 바이올린은 樂器라는 本性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악기로 만들어

졌으니까 여전히 악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악기를 만들 目的으로 내가 나무

각을 이어 붙여 비슷한 걸 만들었을 때에도 그걸 樂器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만들었어도

그게 樂器가 될 거라곤 믿기 어렵다. 누군가 音樂家를 만나면 음악적 소리를 낼 테니 樂器라고 한다면,

백남준처럼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이의 손에 들어가 끈에 묶여 아스팔트 위를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을

想像해보자. 그때에도 그것은 樂器일까?

그래도 여전히 바이올린은 樂器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누군가 바이올린演奏者를 만나 演奏되는 場面을

想像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뜻하는 것은, 바이올린奏者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라도 樂器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좋은 演奏資라는 條件과 만날 때에만 좋은 樂器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特定한 條件 속에서만 그것은 樂器가 된다.”

特定한 條件에서만 本性이 되는 것도 本性일까? 앞서 ‘형이상학적 사유’라고 명명했던, 不變의 本質을

찾는 立場에서 本性이란 어떤 條件에서도 變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좋은 演奏者라는 條件과 만나지

못하는 限 實現되지 못하는 本性이란, 이미 그 定義上 本性이 아니다. 그런 意味에서 바이올린에게는

不變의 本性 같은 것은 없다.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緣起的 思惟가 自性 없음을 說하는 ‘공(空)’이란 槪念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이올린이 演奏者를 만나면 樂器가 되지만, 나 같은 이를 만나면 고통스런 소리를 내는 ‘고문기계’가 된다.

겨울밤 불 꺼진 禪房에 앉아 추위에 떨던 단하(丹霞) 스님 같은 이를 만났다면, 보기 좋게 장작이 되었을

것이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特定한 條件 속에서만 그것은 장작이 된다.” 모여서 精神없이 노는

아이들 손과 만났다면, 장난감이 되었을 것이고, 카페 벽에 분위기 내는 걸 걸고 싶었던 이와 만났다면,

裝飾品이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해야 할 것이다. “特定한 條件 속에서만 그것은 장난감이 된다,

장식품이 된다….” 이 모두는 特定한 條件과 만났을 때 樂器가 되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바이올린의 本性이 樂器라고 한다면, 그런 만큼 그것의 本性은 장작이기도 하고, 장난감이기도 하며

장식품이기도 하다.  그 모두가 ‘本性’인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77호 / 2015년 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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