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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緣起 - 하

장백산-1 2015. 2. 17.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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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緣起 - 하
本性을 決定하는 것은 內部 아닌 外部의 條件
2015년 01월 13일 (화) 09:34:15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事物이 이렇다면, 사람이라고 다를까? 사람에겐 다른 動物과 다른 特別한 本性이 있다는 式의 生覺은 아주 흔한 것이다. 人間은 ‘生覺하는 動物’이니 ‘言語를 사용하는 動物’이니 ‘놀이하는 동물’이니 하는 얘기는 안 들어본 이를 찾기 힘들다. 그리고 여전히 많이들 그것이 當然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同一한 物質도 環境에 따라  다른 形態의 性質로 나타나
 人間인 黑人이 노예된 것은  끔찍한 白人 만난데서 起因


그러나 동물의 행동을 관찰한 動物行動學의 硏究에 따르면, 사람만이 生覺한다는 건 오래된 錯覺일 뿐이다. 生覺하는 方式의 差異가 있긴 하지만, 大部分의 動物이 ‘生覺’한다. 시튼의 ‘동물기’에 등장하는 ‘늑대왕 로보’는 人間을 조롱할 정도의 탁월한 판단력을 갖고 있으며, 덫에 걸린 여친의 주위를 며칠 간 맴돌다 여친인 레베카가 잡혀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잡혀선 人間이 준 일체의 먹이를 거부하고 함께 죽는다. 이는 나처럼 평범한 인간은 생각하지 못하는 고전적인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숭고한 행동이다. 벌들이 정교한 言語를 구사하며, 돌고래는 固有名詞까지 사용한다. 개나 고양이, 심지어 쥐들도 다양한 종류의 精神病을 앓는데, 이는 그들이 人間만큼이나 ‘精神’을 가진 動物임을 뜻한다.

사람이나 동물에 어떤 不變의 本性이 있다는 生覺 때문에 오랫동안 苦痛을 받았던 것은 黑人들이었다. 白人들이 이른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인디언이 ‘人間’인지를 둘러싸고 대대적인 논쟁이 있었다. 아마존 지역의 인디언 과라니 族에게 實際로 일어났던 事件을 다루는 影畵 ‘미션’이 보여주듯이, ‘人間’이란 判定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奴隸사냥의 對相이 되며, 動物이나 事物처럼 賣買되는 商品이 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논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黑人도 人間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生覺을 했던 휴머니스트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黑人은, 人間과 本性을 달리하는 ‘動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黑人이 奴隸가 되었던 것은 저 끔직한 白人들과의 만남에 起因하는 것이었다. 銃으로 무장한 白人들이 들이닥치기 前이라면, 인디언들이 自由人이었듯이 黑人들 역시 自由人이었다. 白人들이 들이닥친 以後라도, 白人과의 만남을 避할 수 있었다면, 奴隸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비록 여전히 人種差別이 存在하지만, 白人들이 옆에 있다고 해도 奴隸가 되지 않는다. 緣起的 條件이 黑人의 運命을, 그들의 ‘本性’을 決定하는 것이다.

이런 緣起的 思惟와 누구보다 近接한 思考方式을 보여주는 게 맑스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은 뜻밖이라고 生覺할 것이다. 한때 그는 헤겔이나 포이어바흐처럼 人間에겐 固有한 本性이 있는데, 資本主義에 이르러 그것을 喪失한 ‘소외’상태에 빠졌다는 式으로 生覺했지만, 곧 그로부터 벗어나 歷史的 條件에 따라 모든 것의 本性이 달라진다는 生覺에 이르게 된다. 이를 그는 ‘歷史有物論’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때 ‘유물론’은 물질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통상의 ‘유물론’과 無關하다. 이런 발상법을 요약하기 위해 그는 바로 흑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黑人은 黑人이다. 特定한 關係 속에서만 그는 奴隸가 된다.”(‘賃勞動과 資本’)

黑人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의 동물적 본성 같은 게 아니라, 총 든 백인들과의 만남을 通해 形成된 特定한 關係, 그런 特定한 條件이다. 그 條件, 그 關係가 달라지면, 黑人은 얼마든지 自由人이 될 수 있다. 덧붙이면, 맑스는 같은 글에서 흑인만이 아니라 紡績機 같은 機械나 事物도 不變의 本性은 없으며, ‘特定한 關係’에 따라 다른 本性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하는 관계를, 그 역사적 조건을 바꿈으로써 다른 세상, 다른 ‘인간’이 출현하리라는 그의 신념은 이런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人間이든 事物이든, 어떤 것도 不變하는 固定된 本性은 없다.  固定不變하는 本性 그게 없기에, 條件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本性’들이 있는 것이다. 本性 아닌 本性들이. 그렇다면 이 수많은 本性들을 本性이 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緣起的 條件이다. 바이올린이 만나는 ‘이웃’, 흑인이 만나는 ‘이웃’이다. 어떤 것의 本性은 그것이 만나는 이웃이, 수학자들이 좋아할 말로 하면, ‘이웃關係’가 결정한다. 칼은 당근의 ‘살’이란 이웃과 만나면 道具가 되지만, 사람의 살이란 이웃과 만나면 흉기가 된다. 똑같은 칼이라도 좋은 本性을 가지려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 緣起的 條件이 그렇듯, ‘이웃’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올린이나 黑人의 本性은 그것의 內部에 있는 게 아니라 ‘外部’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意味에서 緣起的 思惟는 어떤 것의 本性을 그 ‘外部’에 依해 捕捉하는 ‘外部性의 思惟’다.

이런 思考의 方法은 人間이나 事物 以下의 매우 微視的인 水準에서도 有效하게 作動한다. 예컨대 遺傳子를 構成하는 A, G, T, C라는 뉴클레오티드는 세 개씩 짝을 이루어 그에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만드는데, 똑같은 아데닌(A)이 옆에 A와 G를 끼고 AAG로 結合되면 리신이란 아미노산이 되지만, 왼쪽에 A 대신 C(시토신)가 와서 CAG가 되면 글루타민이란 아미노산이 된다. 同一한 아데닌(A)이 이웃關係에 따라 다른 ‘本性’의 아미노산을 構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緣起的 條件의 差異에 따라 다른 아미노산을 만드는 것이다. 이 이웃關係에서 떼어내 아데닌 自體의 本性을 말하는 것은, 앞서 본 예에서처럼 아무 意味가 없다. 遺傳子란 A, G, T C라는 뉴클레오티드가 어떤 이웃關係를 이루며 配列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本性’의 遺傳形質을 만들어낸다. 同一한 遺傳子도 細胞質이나 이웃한 細胞 등의 ‘環境’에 따라 다른 形質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遺傳子의 作用 또한 緣起的 條件에 期待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緣起的 思惟는 同一한 것조차 條件에 따라 그 本性을 달리함을 본다.

 

不變의 實體나 同一性을 찾는 思惟는, 밥에서 쌀을 보고 풀이나 술에서도 쌀만 본다.

反面 緣起的 思惟는 同一한 쌀이 어떤 條件에 處해지는가에 따라 밥이 되기도 하고, 술이 되기도 하며, 풀이 되기도 함을 본다.

 

前者가 多樣한 것들 사이에 있는 共通된 要因을 찾아내는 ‘分析’의 方法을 사용한다면,

後者는 同一한 要因이 다른 條件과 만나 다른 것이 됨을 보는 ‘綜合’의 方法을 사용한다.

 

前者는 現實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逆行的 思考라면,

後者는 저 멀리서부터 現實로 내려오는 順行的 思考다.

 

前者가 다양성을 除去하여 동일한 것에 이르려는 還元的인 思考라면,

後者는 동일한 것이 條件에 따라 달라짐을 보는 多樣性의 思考다.

 

하나가 變함없는 것을 通해 變化 없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암묵적으로 배양한다면,

다른 하나는 無常한 變化의 世界를 肯定하고 그 變化의 線을 타고 갈 것을 가르친다.

 

이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相反되는 思惟의 方向인 것 같다.

어느 思惟 方式을 選擇할 것인지는 各者의 몫일 게다. 그러나

그 選擇이 自身의 思考를 어디로 밀고 가는지는 알고 選擇해야 할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78호 / 2015년 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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