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分析的 因果性은 두 變數 間 關係를 ‘정확히’ 하기 위해, 즉 최대한 예측가능하게 하기 위해, 관여된 변수를 최대한 줄여 둘로 만든다. 變數가 셋을 넘어가면, 그리고 그 變數들이 서로 影響을 미치기 시작하면, 結果를 전혀 豫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적은 태양과 지구라는 두 항만을 고려하면 계산될 수 있지만 거기에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까지 함께 계산하려 하면 계산할 수 없는 사태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데 달의 영향이 없다고 혹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한다. 이렇게 구성된 인과성을 ‘선형적(직선적) 인과성’이라고 한다.
필연성 있어도 조건 따라 달라져 우연성이 필연성 못지않게 중요
여우노인의 ‘不落因果’ 分明한 誤謬 緣起的으론 因果에서 못 벗어난 것 五百生 동안 여우 몸 받은 것도 그 때문
그러나 實際 일어나는 自然現象 가운데 이런 線形的 關係는 찾기 어렵다. 大部分의 現象은 實際로는 非線形的이며, 그래서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고 동일하게 반복하지 않는다. 反面 緣起的 因果性은 緣起的 條件이 두 變數 間의 關係에 언제나 더해져야 할 또 다른 變數임을 본다. 나아가 그 緣起的 條件에 影響을 미치는 또 다른 要因을 考慮하면 어떤 하나의 事件도 事實은 수많은 變數들의 연쇄임을 본다.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風速과 氣溫과 氣壓은 물론 海水溫度, 習度 등 수많은 變數를 함께 다루어야 하는 氣象豫測에서 緣起的 因果性 槪念이 두드러지게 出現했던 것은 遇然이 아니라고 하겠다.
날씨만이 아니다. 예전에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동독의 기업이나 공장들은 서독에 비해 반밖에 안 되는 낮은 生産性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統一된 後 생산성을 높인다며 가령 200명이 일하는 공장의 노동자를 100명으로 줄였다. 생산량이 그대로라고 하면 노동생산성은 2배가 된 것이다. 投入量과 産出量이란 變數의 關係만 본다면 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이를 ‘分析的 合理性’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해고된 100명의 勞動者는 그대로 길거리에 나 앉았다. 공장의 생산성을 따지는 경우 이들은 고려할 변수가 아니기에 고민거리가 아니다. 西獨은 資本主義 國家였으니 이들은 各者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는 분석적 합리성의 뒷면이다. 자본주의에서 ‘합리적 고용’은 이런 방식으로 정의된다. 이는 자본주의라는 연기적 조건 위에서의 합리성이다.
그러나 解雇된 이들을 죽거나 구걸을 하게 할 수 없다면 사회가 실업기금이든 생활보조금이든 다른 비용을 들여 먹여 살려야 한다. 그렇다면 비용을 줄인다고 이들을 해고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100%의 생산성 향상은 일종의 허구다. 차이는 이들이 일을 하여 먹고 살게 한 것과 일하지 못하게 해고한 채 먹여 살린 것이 다를 뿐이다(물론 먹고살 돈을 충분히 주진 않았을 테니 비용이 약간 줄긴 했겠지만). 이게 분석적 인과성, 분석적 합리성이 놓치는 것이다. 해고된 이들 역시 먹고 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게 생산성을 계산하는 분석적 인과관계에선 변수가 아니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변수인 것이다.
10여년 전에 북경에 갔을 때 사람들과 만나 빨리 식사를 해결해야 해서 패스트푸드점에 갔던 적이 있다. 다 먹고 쟁반과 쓰레기를 치우려하자 중국통인 후배가 말린다. 그러면 안 된다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왜냐고 물으니 손님이 다 치우면 여기 직원이 할 일이 없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직원들이 해고된다고 한다. 해고되면 그래도 명색이 사회주의 정부인지라 사회가 따로 먹여 살려야 하니 더 손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선 어디서도 셀프로 치우지 않는다고 한다. 資本主義化 하긴 했지만 生存問題를 각자에게 맡겨선 안 된다는 과거의 원칙이 아직은 남아있었던 것일까? 어쨌건 투입된 비용과 얻은 이득이란 변수만 따지는 분석적 합리성과는 다른 종류의 합리성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간단한 사례는 될 것 같다.
分析的 因果性과 緣起的 因果性이 다른 점을 하나 더 지적하자. 분석적 인과성에서는 두 변수 간의 인과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한다. 반면 연기적 인과성은 필연성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연기적 조건이 있다고 항상 특정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다. 북경의 나비가 날개짓을 한다고 언제나 캘리포니아에 폭풍이 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인들이 물고 물려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폭풍의 연기적 조건을 이루는 것 몇몇이 있다고 항상 폭풍이 부는 건 아니다. 생명의 진화과정을 비디오테이프처럼 역으로 감아 다시 돌린다면 역사가 똑같이 진행되어 결국 ‘인간’이란 생물이 출현하는 그런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고생물학자 스티븐 굴드의 말은 이런 의미다.
연기적 인과성이란 필연성을 가진 법칙마저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로 귀착됨을 말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緣起的 因果性 안에는 遇然性이 必然性 못지않은 重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게 여우가 된 앞의 저 노인이 학인의 질문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이유 아닐까? 학인의 질문을 받는 걸 보면 나름 스승의 위치에 있었을 수행자였을 텐데 그런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을 리 없다. 그가 생각한 인과가 연기적 인과였다면 어떤 조건이 있다고 반드시 같은 결과에 도달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을 법하지 않은가? 그러나 연기적 사유 안에서 그것은 인과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인과에 따라가는 것이니,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분명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덕분에 동물의 몸을 받아 윤회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우’의 몸을 받은 건 빈머리 헛소리만은 아니었음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 백장 스님이 ‘不落因果’를 ‘不昧因果’라고 고쳐주자 이내 깨달았던 것도 그렇다.
백장의 여우 얘기엔 그 다음 얘기가 이어져 있다. 여우 몸을 찾아 다비를 해주고 와서 백장은 제자인 황벽에게 이 얘기를 해준다. 황벽이 묻는다. “옛사람이 한마디 잘못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 몸을 받았다고 하시는데 제대로 답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백장은 “알려줄 테니 가까이 오라” 한다. 하지만 백장에게 다가가자마자 황벽은 백장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긴다. 그러자 백장은 “달마의 수염이 붉다고들 하지만 붉은 수염의 달마가 여기 있구나” 하면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자, 말해보라. 왜 황벽은 느닷없이 스승의 뺨을 후려갈긴 것인지. 뺨을 친 제자를 보고 백장은 왜 손뼉 치며 좋아했는지. 손뼉 치는 웃음 속에서 ‘因果不昧’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0호 / 2015년 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