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世上의 實相, 그것은 無常이다. 差異만이 存在하건만, 왜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으려 할까? 동일성과 짝된 차이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철저하게 無常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대단히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가령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無常을 깊이 통찰했다면, 출석을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난주에 온 사람과 오늘 온 사람의 동일성을 멋대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진경’이라는 같은 이름을 써서 기고하고 연재하는데, 이 또한 어느새 어떤 동일성에 사로잡힌 것을 뜻한다.
日常서 同一함을 찾는 건 實相 있다는 無知서 비롯 無知하지만 이마저도 몰라 實相 본다는 錯覺에 빠져 無常의 洞察을 철저하게 貫徹하기로 맘먹었다면, 우리는 산사 앞에서 본 동물이 무엇이었는지 答할 수 없을 것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答할 수 없을 것이며, 직업이 뭐냐거나 어디 가느냐는 말에 答하지 못할 것이다. 눈앞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 또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無常’이란 말의 發音조차 事實 每瞬間 다른 周波數를 갖는, 다른 소리로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人間에게 限定된 게 아니다. 저기서 다가오는 動物이, 얼마 前에 自身의 친구를 잡아먹은 넘과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넘임을 알지 못한다면, 저 토끼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긴가 민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일단 비슷하게 생긴 넘이면 ‘같다’고 生覺하고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差異를 正確히 보려고 머뭇거리다간 어느새 다음 生의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이것이 動物들이 ‘分別’에 연연해하는 一次的인 理由다. 그런 記憶들은 身體에 새겨지며, 細胞나 細胞 以下의 層위에 침전된다. 遺傳子에 記憶된 먹이와 敵에 對한 記憶이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이유 때문에 同一化하려는 의지가 생겨나고, 同一性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생겨나게 된 것일 게다. 同一性 없는 차이란 카오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同一性은 無常을 보려는 입장에선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必須的인 有用性을 갖는 必要이고 누구도 避하기 힘든 ‘必然’인 것이다. 그래서 每瞬間 달라져 가는 것에서 共通性이나 類似性을 찾아 連結하며 同一性을 만들어내려는 意志가 作動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음번에 어디선가 유사한 것을 보면 ‘같다’고 知覺하고 判斷하게 하는 ‘씨’(種子)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좀 더 確實하게 이름이라도 붙여 놓으면, 심지어 그 對相이 눈앞에 없어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알려주고 명령할 수 있게 된다. 이름 붙은 것들, 言語로 말해지는 것들은 그런 점에서 便宜를 위해 無常을 지우는 同一性의 힘과 意志를 稼動시킨다. 言語로 말하는 것이 언제나 ‘實相’을 놓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問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言語를 쓰지 않고선, 名言種子를 稼動시키지 않고선 無常의 가르침도, 世上의 存在論的 眞實로 알려줄 수 없다는 事實이다. 석가모니가 自身이 깨달은 것이 말로 傳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 말고는 傳할 길이 없기에 망설이다 世間으로 내려가는 것도, 禪師들이 道를 말로 傳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道를 傳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지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성 때문에 무상의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런 조건에서 기인한다. 근본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이 무지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뱀을 뱀이라고 보는데 포함된 오인이다. 눈앞의 대상이 전에 본 뱀과 ‘동일한’ 대상이라고 보는데서 오는 오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使用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귀로 分別하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빛(明)이 없어서’ 無常의 實相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눈이 必要로 하는 빛에 의해 無相의 實相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런 無知를 ‘根本的 無知’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알려고 하는 욕구와 함께 온다. 이게 오류라면, 말을 잘못해서 야기되는 오류가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오류고, 생각을 하지 않거나 생각을 잘못해서 오는 오류가 아니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면할 수 없는 오류다. 지식이 없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다. 그때그때 발생하는 우연적인 오류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인 필연적 오류다. (칸트의 용어를 확장해서 사용한다면 ‘先驗的 假想’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험적 가상이란 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해야 하기에 피할 수 없는 가상을 뜻한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와 편의를 위해 치러야 하는 필연적 대가다. 一切有爲法이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如夢幻泡影露電)”<金剛經>할 때 ‘幻’이란 個人의 主觀的 錯覺이 아니라 모두의 이 必然的 錯覺을 뜻한다고 해야 한다. 根本的인 無知란 同一性을 찾는 빛 속에서 世上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無知는 自身이 世上의 實相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反對로 그것은 世上을 잘 보고 있다는, 實相을 잘 알고 있다는 誤認을 同伴하는 것이란 점에서 二重의 無知다. 이것이 ‘전도망상(顚倒妄想)’을 야기하는 理由고, 그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共有되고 있는 理由다. 그래서 이 無知는 벗어나기 힘들다. 자신이 無知한 줄 알면 無知를 벗어나려 애쓰겠지만, 모르기에, 아니 世上을 잘 알고 있다고 믿기에 無知를 벗어날 生覺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바로 옆에 있어도 부처인 줄 모르고, 부처가 노파심을 갖고 설법을 해도 귀 기울일 줄 모른다. 떨어지는 잎새를 가리키며 實相을 보라고 하면, 그 지는 잎새에서 實相을 보는 게 아니라, 잎새 뒤에 있는,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도 그대로, 同一하게 남아 있는 나무를 보고, 그것이 바로 本體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反問할 수 있을 것이다. 變化하는 것에서 變하지 않는 것을 찾고, 差異들의 바다 속에서 同一性이란 고기를 잡는 것이 그처럼 世上을 살아가는데 必要하고 不可避하다면, 그것을 굳이 ‘필연적’이란 말까지 붙여서 ‘무지’라고 비난할 건 없지 않은가? 반대로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무상한 카오스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인간의 지혜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無常함과 差異가 一次的이라고 해서 그것을 보는 것만이 智慧라고 하는 것은, 카오스가 일차적이라고 해서 카오스를 지혜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럴 수도 있다. 事實 ‘코스모스’나 ‘秩序’, ‘調和’란 槪念은 그런 意味로 사용된다. 그러나 화려한 成孔과 榮華의 瞬間이 좋다고 그것을 同一하게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게 實相이 아니기에 지나가 버리는 것에 ‘虛無’와 苦痛을 느끼는 것 아닌가?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과의 사랑이 동일하다고, 아니 영원히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에, 그 사람이 變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이 식어가는 것에 苦痛스러워하지 않는가? 뉴스나 영화에서 종종 보듯이, 그 사람이 永遠히 떠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랑이 永遠히 變치 않도록 하기 위해 變心의 조짐을 보이는 戀人을 스토킹하며 脅迫하거나 심지어 죽여버리는 것도 無常의 實相 代身 同一性을 유지하려는 愛着과 執着 때문 아닌가? 사랑하는 이가 내 生覺과 다르게 行動하는 것에서 苦痛을 느끼고, 내 뜻대로 行動하게 하기 위해 苦痛을 加하는 일은,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 아닌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