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천지창조의 새로운 버젼

장백산-1 2015. 2. 18. 04:08

 

 

천지창조

        

   글쓴이 : 김기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성경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世上 萬物과 人間이 하나님에 依해 創造되었음을 ‘선포’하면서,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전체 66권 1,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포’와 함께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天地와 萬物과 人間을 創造하셨는지를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첫째 날에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둘째 날에는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셨으며,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와 땅 위의 모든 식물들을 창조하셨고,

넷째 날에는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들어 땅에 비취게 하셨으며,

다섯째 날에는 하늘에 나는 새와 물 속의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셨고,

여섯째 날에는 땅 위의 모든 짐승과 육축과 기는 것을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또 하나님의 形象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南子와 女子를 창조하셨으며, 이 모든 창조를 다 마치고 난 후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安息하셨다는 이야기가 창세기 2장3절까지 계속된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天地創造 이야기를 단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이야기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우리 內面의 이야기’로 돌려 읽어보면 어떨까? 말하자면, 聖經을 보는

觀点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려서 ‘우리 마음의 이야기’로 한번 읽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聖經은 단지 天地創造로부터 始作된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이스라엘의 歷史를 中心으로

쓰여진 經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瞬間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自身과 우리 마음에 관한 經典이 된다.

聖經의 中心이 우리 自身에게로 옮겨오는 것이다. 동시에 우주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우리 內面의 이야기’로 돌려 읽게 되면,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속에서의 太初는 아득한 옛날의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瞬間’이 되고,

 

天地 우리 ‘內面의 天地’ 곧 우리 마음 안에서 每日 每日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온갖 다양한 모양의 感情, 느낌, 生覺, 分別, 妄想들이 된다. 단지 觀点 하나를‘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기만 하면 天地創造를 비롯한 聖經의 모든 이야기가 아득히 먼 옛날의 歷史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瞬間의 우리 自身과 우리의 마음에 관한 말씀이 되는 것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는

예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 곧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영혼의 목마름이 끝이 나고

 

永圓한 自由와 眞理와 幸福이 充滿한 ‘그 나라’는 바로 지금 이 瞬間의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밖’이 아니라 ‘안’으로 눈을 돌려서 聖經을 읽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聖經은 문득 지금 이 瞬間의 우리 自身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맑디맑은 거울이 되어,

그 앞에 오롯이 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던 우리 自身에

관한 새로운 眞實들을 分明하게 보게 될 것이며, 그와 同時에 우리의 온갖 다양한 經驗과 知識과

努力이 가져다주지 못하던 참다운 智慧와 眞理를 우리 안에서 發見하게 되어, 마침내 眞正한

自由와 平和 幸福을 맛보게 될 것이다. 聖經은 온갖 비유와 이야기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 속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놀랍도록 正確하게 가리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聖經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읽는, 그래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복음 11:12)는 말씀처럼, 聖經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지금 이 瞬間의 우리 自身 속으로 들어가 우리 안에 있는 寶物들을 마음껏 캐내어 갖는 새롭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그랬을 때, 創世記 1章에 나오는 이 天地創造 이야기는

어떻게 읽혀질까?

 

 

 

太初에 하나님이 天地를 創造하시니라. 땅이 混沌하고 空虛하며 黑暗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稱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稱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稱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稱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晝夜)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福을 주어 가라사대 生育하고 繁盛하여 여러 바다 물에 充滿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福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生育하고 繁盛하여 땅에 充滿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天地와 萬物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安息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福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일곱째  날에 安息하셨음이더라.(창세기 1:1~2:3)
 

  

우리는 聖經을 읽어 나감에 있어 ‘밖’이 아니라 ‘안’ 곧, 우리 內面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와 聖經을 읽으면 이 天地創造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이 太初에 天地와 萬物을 創造하시되 6일 동안 매일 새로운 것들을 다양하게 創造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로 따로 계셔서 天地와 萬物을 각기 그 種類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 안에서 每日 每瞬間 새롭게 일어나는 온갖 다양한 모양의 感情, 느낌, 生覺, 分別, 妄想들이

創造됨을 가리킨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오늘’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고 다양한 感情, 느낌, 生覺, 分別, 妄想들의 創造가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런 것들 중에는

밝은 마음도 있고 어두운 生覺들도 있고, 하늘처럼 맑고 따뜻한 마음도 있는 反面에 물처럼 차가운 感情도 있다. 바다 속처럼 고요하고 안온할 때도 있지만 회오리바람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릴 것 같은 격정적인 瞬間의 마음도 經驗한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눈을 떴을 때 살포시 窓門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에,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어떤 날에는 이유 없이 무겁고 우울한 마음에 일어나기조차 싫을 때도 있다.

 

길을 걷는 발걸음이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처럼 가볍고 경쾌할 때도 있고, 젖은 솜 마냥

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들 만큼 무거운 날도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한 마음일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엔 바늘 하나 꼿을 곳이 없을 만큼 날카롭고 메마른

좁디 좁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便安하고 當當한 自身을 經驗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주눅 들고 눈치 보며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목격하기도 한다. 또 개운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오늘’을

사는 날도 있지만,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채 겨우겨우 버티듯 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꿈도 꾸지 않고 죽은 듯 깊고 달콤한 잠을 잘 때도 있고, 바람 부는 겨울밤 밤새 떠는 문풍지처럼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아 스산히 뒤척이는 날도 있다. 슬프다가도 기쁘고, 우울하다가도 밝아지고,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며, 미움과 질투와 분노에 범벅이 되어 괴로워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순간도 경험한다.

 

아, 얼마나 많고 다양한 창조들이 매일 매일 새롭게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마치

 땅에 있는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들처럼(창세기 1:12),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무수한 별들처럼(창세기 1:16),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과

날개 있는 모든 새들처럼(창세기 1:21), 그리고 땅에 있는 온갖 종류의 육축과 기는 것과 모든 짐승들처럼(창세기 1:25), 우리 ‘內面의 天地’에서는 每日 每日 얼마나 많고 다양한 感情, 느낌, 生覺, 分別, 妄想들이

創造되고 있는가.

 

 

 

그런데 이 天地創造 이야기에서 꼭 注目해 보고 싶은 句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만 무려 일곱 번이나 거듭 나오는데,① 첫째 날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고, 둘째 날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며, 셋째 날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이렇게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여섯 번이나 거듭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고서도, 그것도 모자라 창세기 1장 맨 마지막 31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 번 더 强調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聖經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해주고 싶어서 이렇게도 같은 말을 일곱 번이나 거듭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完全 數’를 가리킨다. 곧 ‘完成된, 完全한, 穩全한, 더 이상은 없는’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일곱 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모두가 좋은 것들밖에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 ‘內面의 天地’즉, 마음에서 每日 每瞬間 새롭게 創造되고 있는 온갖 種類의 感情, 느낌, 生覺, 分別,

妄想들은 하나님 卽, 眞理의 자리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좋은 것뿐이라는 眞實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② 다시 말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로 시작되는 天地創造 이야기를 通해서 聖經은 바로 지금 이 瞬間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다양한 모양의 느낌 感情 生覺의

創造들이 事實은 모두가 하나님에 依해서 이루어진 일이며, 따라서 그 모든 느낌 感情 生覺 妄想 分別들은 眞實로 다 좋은 것이기에, 우리의 生覺과 分別을 따라 어떤 것은 選擇하고 어떤 것은 차버리려고 하지 말고 다만 內面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受容하고, 있는 그대로 經驗하며, 있는 그대로 存在할 때, 우리는 眞正으로 自由롭고 幸福할 수 있다는 眞實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창세기 1:26) 人間의 참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煩惱 그대로가 보리(菩提) (煩惱卽菩提)’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성경은 일곱 번을 거듭 말하고 있건만, 우리는 虛妄한 生覺과 分別 妄想을 따라서 우리의 ‘內面의 天地’를 좋은 것과 나쁜 것 둘로 나누어놓고는, 좋다고 여겨지는 것은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고 싫다고 生覺되는 것은 끊임없이 내버리려고 애씀으로써 스스로 괴로움과 苦痛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과 慈悲와 誠實, 기쁨, 즐거움, 便安함, 自信感, 當當함, 智慧, 겸손 等은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서 끊임없이 얻으려고 努力하고 또 그런 것들로써 우리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고 싶어 하는 反面에 미움, 분노, 게으름, 슬픔, 외로움, 무기력, 불안, 우울, 교만, 무지, 강박, 대인공포 等은 나쁜 것, 부끄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으로 生覺하며 어떻게든 내버리려고 努力하고 또 그런 것들은 단 하나도 우리

마음 속에 남겨두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그리고 그런 쉼 없는 努力과 애씀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眞正한 마음의 平和와 自由와 幸福을 꿈을 꾼다. 그런데 내버리고 싶은 것들은 얼른 버려지지 않아서 괴롭고, 더 많이 갖고 싶은 것들은 얼른 우리 마음 안에 온전히 들어와 주지 않아서 苦痛스러우니, 그 괴로움과 苦痛과 靈魂의 목마름의 에너지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聖經은 이 天地創造 이야기를 通하여, 眞理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分明하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眞理가 너희를 自由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씀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의 靈魂이 眞實로 自由할 수 있는지 그 길을 分明하게 가리켜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은 바로 天地創造 이야기 속에서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고 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속에 있다. 이 말씀이 거듭거듭 밝히고 있듯이,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그리고 꿈 속에서까지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 ‘內面의 天地’에서 每日 每 瞬間 새롭게 創造되고 있는 모든 感情, 느낌, 生覺, 妄想, 分別들은 眞實로 다 좋은 것들뿐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生覺과 分別 妄想을 따라서 어떤 것은 選擇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고 하는 모든 마음짓을

쉬어라.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우리 內面의 天地에서 創造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진실로 다 좋은

것 뿐이니, 다만 內面의 모든 衆生들인 느낌 感情 生覺 煩惱 妄想 分別 等을 절대 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하라.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우리가 속되다 하지 말라.우리의 努力과 수고를 通하여 지금이 아닌 未來의 어느 瞬間에 自由와 平和 幸福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 眞正한 自由 平和 幸福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生覺은 너희 生覺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과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生覺은 너희 生覺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生覺을 접어 버리고 우리의 길을 돌이켜 여호와의 길 곧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계신다. 每瞬間 있는 그대로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③ 이 말씀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11장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욥바성(城)에서 祈禱할 때 非夢似夢 間에 幻想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注目해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主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物件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사도행전 11:5~10)

 

 

 

우리는 지금 이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世上에 왔나니, 곧 眞理에 대하여 證據하려 함이로라.”(요한복음 18:37)라고 말씀하신 예수가 十字架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사흘 前에 예루살렘 城 안에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땅에 있는 者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者시니라.”(마태복음 23:9)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정녕 眞理를 證據하셨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完全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더하고 얼마만큼을 더 좋게 하려고 그렇게 自身의 마음, 內面의 天地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選擇하고 다른 하나는 내버리려고 애써 몸부림치면서 스스로 수고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가. 이미 完全한 者가 다시 무슨 方法과 努力으로써 完全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그만 애쓰는 짓을 중지하라. 우리가 眞理를 찾기 위해, 眞實로 自由롭고 平和롭고 幸福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무언가를 함으로써 完全해지려는 그 虛妄한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每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하라. 每 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함 그것이 바로 完全한 自由의 길이요 解放의

길이며 사랑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지금' 속에 이미 온전히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일곱 번을 거듭 하고 있는 이 간곡한 眞理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단 한 瞬間만이라도 揀擇하는 마음을 버리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自己 自身으로 存在해 보라. 그러면 즉시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져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時節을 쫒아 果實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시편 1:3) 마침내 우리 靈魂의 모든 목마름과 메마름이 永遠히 끝이 나고 江 같은 平和와 사랑이 가득히 흐르게 될 것이다. 聖經은 1,800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이야기의 맨 첫 장에서부터 이토록 完全한 眞理의 길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 한 길만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다.

 

 

그 길을 聖經이 分明하게 가리켜 보여주고 있고, 지금 이 瞬間 우리 마음 안에 온전히 드러나 있는 그 길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 完全한 眞理와 自由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펼쳐 보여주고 싶다. 그리하여 이 冊을 읽어나가는 동안 自身 안에 本來 갖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權能을 會復하여 진정 自由롭고 幸福하게, 恒常 感謝와 사랑이 넘실대는 삶을 살고 누리며 나누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宇宙와 그 가운데 있는 萬有를 지으신 神께서는……우리 各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起動하며 있느니라.”(사도행전 17:24~28) 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그 길은 정녕 멀리 있지 않다.

 

이제, 그 길을 보다 또렷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두 번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善惡果)’라는 이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고 智慧 가득한 이야기 속으로……!④

 

그렇게 善惡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창세기 1장 27~28절의 말씀―“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福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生育하고 繁成하여

땅에 充滿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에 대한 誤解이다.

 

이 말씀 또한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읽어야 한다. 그랬을 때 ‘땅’은 곧 우리 마음이 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每 瞬間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感情, 느낌, 分別, 妄想, 生覺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진실로 다스리고 온전히

항복받게 되면 거기에서는 ‘나’와 ‘너’의 境界가 사라진 사랑이 나온다. 그 사랑으로 人類는

自然과 함께 幸福하게 상생(相生)했을 것이다.

 

그러나 人類는 이 말씀을 ‘밖’으로 먼저 읽었기에 人間과 自然을 分離시켜 그토록 가혹하게 自然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데에만 몰두해 왔던 것이다. 그렇듯 聖經의 모든 말씀은 먼저 '안'으로 읽어야 한다. '안'과 '밖'은 結局 하나이긴 하지만, '안'에서 먼저 밝아질 때 '밖' 또한 함께 그 眞理의 빛 안에서 幸福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