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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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제27칙은 운문(雲門) 스님의 유명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들어보라.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 때면 어떠합니까?”
“가을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 동일한 이름의 사람조차 매순간 세포들의 生滅로 동일한 상태를 찾지 못해 無常, 同一해 보이는 것에서 끊임없이 變하고 달라짐 보는 것
무엇이 완전히 드러났을까? 누구는 잎이 다 져서 나무의 몸(體)이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질문이 겨냥하는 바를 완전히 오인한 것이고, 누구는 번뇌와 같은 잎들이 다 져서 본체(體)가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본체를 잎새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실체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란 점에서 정반대로 본 것이다. 다시 묻자. 무엇이 드러났는가? 본체가. 어떤 본체가 드러났는가?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 드러나는 本體, 그것은 무상(無常)이다. 그것은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잎이 피어날 때 드러나는 본체이기도 하다. 잎 뒤에 숨어 있는 본체가 아니라 잎이 피든 지든 무관하게, 바로 눈앞에서 드러나는 本體다. 金風에 지는 無常이나 春風에 피는 無常이나, 無常이란 점에선 다를 바 없다. 그 다를 바 없는 것, 無常, 그게 바로 本體다.
그런데 왜 묻는 이는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 어떠한가 물었을까? 우리는 보통 잎이 나고 꽃이 피는 春風에는 無常을 묻지 않는다. 아니, 보지 않는다. 無常함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그 變化와 生成이 消滅로 접어들 때다. 무성하던 것이 어느새 衰落하고 좋던 것이 시들해질 때, 문득 無常함을 묻게 된다. 苦痛이나 죽음이 보이지 않으면 삶에 대해 묻지 않는 것도 비슷한 理由에서일 게다. 그렇기에 無常이란 말은 흔히 虛無感과 함께 온다. ‘꽃이 피고 잎이 푸른 이 좋은 時節이 永遠하면 좋으련만, 왜 벌써 잎이 지고 나무는 벌거벗는 것인가!’ 하는 恨嘆 속에서 無常은 눈에 들어온다. 흔히 말하는 “人生無常, 삶의 虛無”라는 짝은 이렇게 出現한다. 永遠한 것을 追求하는 ‘고상한’ 哲學이 無常함 속에 숨어 있는 變치 않는 것을 찾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내가 대면하는 세계의 彼岸에 있는 不變의 實體를 찾아 나선다. 변하는 세상이 덧없어, 變치 않는 彼岸에서 永遠性을 찾는다. 니체는 이처럼 눈앞의 것, 지금 사는 무상한 현세를 부정하고 변치 않는 피안의 것을 찾는 이런 태도를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한다. 不變의 實體를 찾으려는 試圖로 이어진 西洋 形而上學의 歷史를 니힐리즘의 역사라고 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운문에게 묻는 學人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것이 衰落하고 消滅하는 것 같은 때에, 本體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를 물었을 것이다. 운문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게 바로 本體라고, 無常이 바로 本體라고, 가을바람에 지는 落葉이 바로 本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답한다. 變하지 않는 本體가 어디 따로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恒常 進行되는 無常한 變化만이 本體라는 것이다. 믿고 있던 變하지 않는 確古한 本體가 消滅한다는 生覺을 正面에서 뒤집으며, 變化하고 消滅되는 것이 바로 本體라고, 그게 本體를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것이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諸行無常이 바로 本體고, 그것 以外의 本體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世上의 道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無常을 洞察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無常할 뿐임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無常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無常함 속에서 相對하는 것이 世上의 道를 깨치는 것이다
無常이란 무엇인가? 아니, 상(常)이란 무엇인가? 恒常 그대로인 것, 恒常 同一하게 있는 것이다. 條件이 달라져도 그 同一性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常을, 不變의 實體를 追求한다 함은 變化 속에서도 同一性을 유지하는 걸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無常이란, 그런 同一性이 없음이고, 그런 同一性에 反하는 것만이 있음을 뜻한다. 同一性에 反하는 것은 ‘差異’다. 無常을 본다 함은 同一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變化하고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恒常된 것을 찾음이 달라보이는 것마저 ‘同一化’하려 함이라면, 無常을 본다 함은 同一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差異化’되고 있음을 봄이다. 同一性이 없다함은 오직 差異만이, ‘差異化하는 差異’만이 存在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無常의 洞察은 곧바로 ‘差異의 哲學’으로 이어진다.
差異의 哲學은 差異의 存在論的 一次性에서 始作한다. 差異가 存在論的으로 一次的이라는 말이다. 이는 두 가지 意味를 갖는다. 狀態로서의 差異와 過程으로서의 差異. 먼저, 差異만이 存在한다 함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인용하며 자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世上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世上에 똑같은 얼굴의 두 사람은 없다”는 말로 바꾸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事實은 똑같지 않다는 건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가을바람 불면 精神을 잃을 정도로 화사하게 빛나는 은행잎 단풍잎이 나무마다 가득하지만, ‘은행잎’이니 ‘단풍잎’이니 하는 말들은 대충 비슷한 걸 뭉뚱그려 하나로 묶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細心하게 調査해보면, 같은 나무에 매달린 것 중에도 똑같은 두 장의 은행잎은 없다. 크기와 모양, 색깔이 다 다르다. 다른 것만이 存在하며, 差異만이 存在한다. 이런 意味에서의 差異는, 狀態로서의 差異를 지칭하지만, 同一性 出現 以田의 差異, 同一性과 짝이 되는 區別의 범주로서의 差異가 아니라, 그 球別 以前의 差異다. 言語 以前의 差異다. 말없는 差異다. 좀 더 根本的인 것은 過情으로서의 差異다. 이는 差異化만이 存在함을 뜻한다. 하나의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나라는 존재 조차도 똑같은 두 개의 상태를 갖지 않는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주민증에 붙어 있는 寫眞을 보고 낯설어하지 않기 어렵다. 동일한 신체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每日每日 몸의 細胞들은 生滅하며 바뀌어가고 있으며, 지금 이 瞬間에 있는 細胞들 사이에선 分子的인 것들이 쉴 새 없이 移動하며 物質과 情報를 주고받으며 代謝하고 變化한다. 나뭇잎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感覺이 둔하여 그 變化를 보지 못할 뿐이다. 동영상으로 찍어 빨리 돌리면, 꽃이 피고 지는 것뿐 아니라 나뭇잎의 색과 모양이 變하는 것을 明確히 確認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스스로도 끊임없이 달라지는 無常한 ‘差異化’ 過程 속에 있다. 無常이란 差異化하는 差異를 뜻한다.
同一性은 이 差異들을 無視하고 비슷해 보이는 걸 하나로 묶을 때 오는 것이다. 비슷한 형상의 얼굴이 반복하여 나타날 때, 비슷한 나뭇잎이 반복하여 감지될 때, 우리는 그것이 같다고 看做하고, 그것에 하나의 이름을 附與한다. 그렇게 이름이 부여되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生覺이 거기에 따라붙는다. ‘名言種子’라고 부르는 것이 同一性의 ‘씨(種子)’, 지속되는 同一性이란 幻想의 새로운 씨(종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無常한 것을 球別하며 同一한 것을 捕捉하려는 性向(業)의 作用이다. 그런 性向이 同一化를 야기하는 ‘種子’인 것이다.
그렇게 하여 同一性을 갖는 것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그 同一性을 갖는 것들을 比較하며 ‘이것은 저것과 다르네’라며 同一性과 差別性를 말한다. 分類學的 差異가 이런 差異에 속한다. 동일성과 짝을 이루는 이러한 差異는, 비슷한 걸 하나로 묶어 다루려는 마음, 구별하고 분별하려는 의지 안에서 작동하는 差異고, 동일성의 짝이 되어 동일성을 보충해주는 差異다. 동일화의 의지 안에 있는 差異다.
따라서 흔히 ‘차이’란 말을 ‘동일성’과 짝을 이루는 對雙槪念이라고 보아, “差異 없는 同一性이란 있을 수 없고 同一性 없는 差異도 있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이는 同一性과 差異란 말에, 雙을 이루어 作動하는 그 名言種子에 달라붙어 있는 幻想의 生覺일 뿐이다. 同一性 以前에 差異가 있다. 아니, 存在하는 것은 오직 差異 뿐이다. 이것이 ‘差異의 存在論적 一次性’이다. 差異의 存在論的 一次性을 보는 것은 每旬間, 比較 以前의 狀態에 오직 差異만이 存在함을 보는 것이고, 差異化하는 差異만이 存在함을 보는 것이다. 無常을 洞察한다 함은 이런 差異의 存在論的 一次性을 보는 것이다. 差異의 哲學이란 無常을 洞察하는 눈이 빚어낸 槪念的 思惟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1호 / 2015년 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