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beopbo.com/news/photo/201501/85295_6884_342.jpg) | |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백장(百丈) 스님이 法門을 하면 언제나 듣고 있던 老人이 있었다. 어느 날 법문이 끝나 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그 노인은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백장이 물었다. “그대는 뉘신가?” 노인의 대답은 믿을 수 없지만,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저는 과거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 주석하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學人이 ‘위대한 수행자도 因果에 떨어집니까?’라고 묻기에 ‘因果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답했다가 그 果報로 五百生을 여우 몸을 받아 이리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處地를 바꿀 수 있도록 한 말씀 해주소서.” 그러면서 학인이 自身에게 던져졌던 물음을 다시 던졌다. “위대한 수행자도 因果에 떨어집니까?” 百丈 스님이 대답했다. “因果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노인은 이 말에 크게 깨쳤고 百丈은 노인의 부탁대로 그가 벗은 여우 몸을 찾아 다비해주었다고 한다.
反復된 結果를 規則化하는 近代哲學의 分析적 因果와 緣起的 條件을 重要視하는 佛敎的 因果는 서로 달라
‘백장의 여우’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公案은 믿을 수 없지만 아주 재미있는 얘기여서 잘 알려져 있다. ‘不落因果’와 ‘不昧因果’, 落과 昧 한 글자의 差異인데 그 작은 差異로 인해 노인은 五百生을 여우가 되어 떠돌다가 깨달음을 얻어 解脫을 했으니, 정말 ‘털끝만큼의 차이가 天地 差異로 벌어진다’는 옛말 그대로이다. ‘락(落)’과 ‘매(昧)’라는 한 字 差異가 이토록 天地差異로 벌어진 것은 그 글자 自體 때문이 아니라, 그 말에 이어진 ‘因果’ 때문이다. 대체 ‘因果’가 뭐기에 그 노인은 오백년을 여우가 되어 살아야 했고, ‘因果에 어둡지 않다’가 무엇이기에 단박에 輪廻를 벗어나 解脫의 境地에 오를 수 있었을까?
因果를 말하는 것은 佛敎만이 아니다. 아니 因果에 누구보다 强한 愛着을 가진 것은 西區의 近代科學이고, 그와 나란히 發展한 西區의 近代 哲學이다. 哲學에서 말하는 ‘因果律’이란 ‘모든 結果는 必然的으로 그 原因을 갖는다’는 法則이다. 近代科學은 因果律에 대한 强한 믿음 위에 구축되어 있다. 聯關된 두 現象 가운데 論理的 내지 時間的으로 先行하는 것을 獨立變數(X), 뒤에 나오는 것을 從屬變數(Y)라고 하고, 이 두 變數 間의 關係를 可能하면 數學的으로 서술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Y를 야기하는 요인들 가운데 X가 아닌 요인들로부터 X의 효과를 ‘分離’하여 포착하고 서술하려는 방법을 ‘分析’이라고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얻어지는 X와 Y의 因果的 關係를 ‘分析的 因果性’이라고 명명하자.
가령 찻잔을 들고 있다가 놓으면 ‘필연적으로’ 떨어진다. 이런 것이 ‘因果’다. 뉴턴은 落下라는 結果의 理由를 ‘重力’이라는 原因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그런 原因보다는 낙하하는 거리나 속도를 무엇이 결정하는가에 關心이 있었다. 그건 찻잔의 質量이 아니라 낙하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허나 낙하하는 찻잔이 갖는 힘이 얼마나 큰지는 찻잔의 質量과 關係가 있다. 낙하거리는 시간을 ‘원인’(독립변수)으로 하지만, 낙하하는 물체가 갖는 힘의 크기는 질량을 원인(독립변수)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兩者 間의 關係는 수학적 공식으로 ‘정확하게’ 표시된다. 이는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되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된다. 科學이란 이런 普遍的인 因果法則을 찾는 것이다.
위대한 수행자라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찻잔을 놓으면 그건 落下할 것이고, 물에 熱을 가하면 溫度가 100°C가 될 때 끓을 것이다. 위대한 수행자의 가르침이 불교라면, 불교 또한 이런 因果的 必然性을 볼 것을 가르친다 할 것이다. 因果에서 벗어나는 方法이 아니라 因果를 正確히 알도록 가르칠 일이다. 그러나 佛敎에서 말하는 因果의 槪念은 이런 分析的 因果性과는 다르다. 불교적 사유의 요체를 이루는 ‘연기’라는 개념이 이 변수간의 因果性 사이에 파고들어가 그것을 비틀어놓기 때문이다. 이를 ‘分析的 因果性’과 對比하여 ‘緣起的 因果性’이라고 명명하자.
알다시피 緣起的 思惟란 緣起的 條件에 따라 모든 것의 本性이나 作用이 달라짐을 보는 것이다. 因果法則 또한 緣起的 條件에 따라 달라진다. 이때 ‘緣起的 條件’이란 科學에서 使用하는 ‘初期條件’이란 말로 바꿔 쓰면, 分析的 因果性과의 差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分析的 因果性이 초기조건의 차이란 부차적이라고 보아 그것을 ‘동일한 조건이라면’이라는 말로 추상하여, 그런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보편적인 인과성을 찾고자 한다면, 緣起的 因果性은 초기조건의 차이에 따라 인과적 작용이 아주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고 얼른 ‘나비효과’란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비효과란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성’을 뜻하는 말인데, 흔히 “北京의 나비 날개짓이 캘리포니아 海岸에 폭풍을 만들어낸다”는 말로 요약된다. 아주 작은 條件의 差異가 巨大한 結果의 差異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現象이 反復될 때 그 反復을 規則化함으로써 ‘秩序’를 포착한다. 그것으로 다음번에 어떻게 반복될지를 豫測한다. 그런데 反復할 때마다 ‘朝件의 差異에 따라’ 結果는 달라질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아침 날씨였지만, 風速이 약간 세지거나 風向이 약간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저녁 날씨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쉽게 경험하는 일이다. 장마가 매년 반복되지만 사실 한 번도 같은 장마는 없을 것이다. 때론 작게 달라질 것이고, 때론 크게 달라질 것이다. 가령 종이를 떨어뜨리길 反復하는데, 바람이 분다면 종이는 매번 아주 다른 곳에 떨어질 것이고, 바람이 없다면 약간 다른 곳에 떨어질 것이다. 緣起的 條件 혹은 初期條件의 差異가 클수록 反復되는 現象에서 結果의 差異도 클 것이다. 이 差異가 크면 클수록 豫測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Y라는 結果를 決定하는데 獨立變數인 X보다 ‘條件’의 差異가 훨씬 더 크게 介入하는 것이다. 나비效果는 初期條件이 애초 獨立變數의 因果的 效果를 超過하는(‘무시하는’이 아니라) 差異를 만들어냄을 뜻한다. 緣起的 條件이 分析的 原因의 效果를 超過하는 極的인 사례인 셈이다.
그때그때의 條件과 相關없이 두 變數 間 關係가 보편성적으로 성립하도록 하기 위해 분석적 인과성은 條件의 差異를 最大한 除去한다. 卽, 條件의 同一性을 假定한다. 가령 갈릴레오는 나무토막과 쇠뭉치를 同時에 떨어뜨리면 둘 다 똑같은 시간에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자유낙하의 법칙). 그러나 實際로는 같이 떨어지지 않는다. ‘浮力’이라고 부르는 空氣의 抵抗이 落下의 實際 條件인데, 그 條件의 差異 때문에 가벼운 게 늦게 떨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다루면, 낙하하는 것의 반복을 하나의 법칙으로 다룰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空氣(의 抵抗)가 없다고 假定하곤 自由落下의 法則을 서술한다. 이는 낙하의 반복이 同一한 結果에 이르게 하기 위해 初期條件의 差異를 除去한 것이다. 이로써 ‘差異의 反復’은 ‘差異 없는 反復’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實際로 떨어지는 모든 物體는 그것이 對面하는 初期條件, 卽, 緣起的 條件에 따라 다르게 떨어진다. 심지어 媒質의 抵抗이 크면 아예 落下하지 않기도 한다. 가령 媒質을 空氣가 아니라 물로 바꾸면 쇠뭉치는 떨어져 바닥에 닿겠지만, 나무조각은 물의 抵抗을 通過하지 못해 바닥에 닿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緣起的 因果性에 따르면 自由落下의 法則은 이렇게 修正되어야 한다. “모든 物體는 그것이 만나는 條件에 따라 다른 速度로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79호 / 2015년 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