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이란 개념은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대승불교는 ‘무엇이 부처인가?[如何是佛]’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이 질문은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에게는 필연적이다. 이 질문이 없다면 확고한 신앙적 믿음과 강력한 실천력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논쟁을 해온 과제이고, 앞으로 계속될 질문이다. 무엇을 부처라고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있었기에 불교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보조국사 시대에도 이런 논쟁을 했던 것 같다.
부처될 자질·자격으로 인식 공, 근본바탕으로 말하기도 선종선 마음을 부처로 인식 마음 관하라 강조하는 이유
“오늘날 사람들은 미혹해온지가 오래돼 자기 마음이 진정한 부처인줄을 모르고, 자기의 성품이 참다운 진리인줄을 모른다. 진리를 구하고자 하면서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구하고자 하면서 자기 마음을 관찰하지 않는다.”
왜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는가? 왜 부처를 개념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가? 보조국사의 입장에서 보면 참 답답했던 것 같다. 다시 우리는 묻게 된다. ‘진정으로 무엇이 부처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역사상 가장 소박한 첫 번째 대답은 바로 ‘부처의 종족’이란 말이다. 불성이란 부처의 성씨로서 석가의 씨족을 말한다. 팔리어 경전에서는 개인보다는 친족을 의미하는 ‘gotta’라는 말이나, 네 가지 성[四姓]을 말하는 ‘kula’, 출신이나 혈통을 의미하는 ‘vam. sa’을 함께 사용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왜냐면 불성이란 곧 부처의 가문이나 문중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배타적인 형태의 특권의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결국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카스트제도를 “사회적인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금수만도 못한 악습”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대답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이나 자격’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집단을 의미하는 첫 번째보다는 개인적 능력, 잠재적인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의미이다. 현재는 부처가 아니지만 장차는 부처가 될 수 있는 힘을 가진 잠재력을 말한다는 점에서 가장 널리 인정된 개념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부처가 될 수 없는 집단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첫 번째 정의와 유사하다는 약점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오직 대승만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승으로 분류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만 하는 성문승(聲聞乘)이나, 혼자서 공부하는 고립된 독각승(獨覺乘)이나,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할 수 없는 부정승(不定乘)이나, 전혀 부처를 이룰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 등은 모두 불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곧 대승과 대승이 아닌 경우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세 번째 응답은 바로 법계(dha-rma-dha-tu)로서 부처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불성이란 사물이 발생되는 근본적인 바탕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이 탄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바탕[體] 그 자체를 말한다. 이 바탕은 텅 비어 있는 공(空)이지만 동시에 텅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지 담을 수가 있는 근원적인 바탕으로 이해된다.
이런 이해방식은 철학적인 관념이나 형이상학적 실체의 개념으로 오해하는 경향도 있다. 대승의 불성사상을 비판하는 이들은 바탕[體]은 변하지 않는 어떤 고정된 실체라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불교의 기본적인 교설인 연기(緣起)나 무아(無我)의 개념과 상충된다고 말한다. 이런 논의는 그 자체가 매우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관점에 놓여있는 공허한 논쟁이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전통적인 선종의 입장으로 부처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그대로 곧 부처’인 까닭에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구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 서면 경전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으며, 형상화된 불상을 과도하게 숭배하지 않는다. 또 철학적인 지식에 과도하게 목말라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 부처란 말인가?’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