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과 같은 절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대체로 서구의 종교는 이런 경향이 있다. 이런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라고 요구하면 신의 존재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절대적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이런 종교적 논의는 부처님 당시에도 아주 많았다.
부처란 바로 지금 여기의 경험 “진리 보면 곧 여래 보는 것” 이것을 떠난 진리는 따로 없어 부처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야
초기경전인 ‘一切經’에 의하면 어떤 바라문이 一切란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일체란 연인일 것이고,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가진 분에게는 신의 존재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라문은 절대적 신의 존재를 믿는 사제이다. 그래서 바라문은 이런 질문을 부처님에게 했을 것이다.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부처님은 “일체란 눈과 눈으로 보는 색깔이고, 귀와 귀로 듣는 소리”라고 말한다. “만약에 이것[十二處]을 떠나서 별도로 일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말만 있을 뿐이고 의혹만 더할 뿐”이라고 설한다. 왜냐면 그것은 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의 구체적인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손안에 보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믿으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 손안에 보석을 직접 보여주면 된다.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손안의 보석을 직접 관찰하고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일체란 눈으로 대상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 모든 것이다. 이것을 떠나서 별도의 무엇인가를 구한다면 그것은 말만 있고 의혹만 더할 뿐이다. 왜냐면 그것은 경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무엇이 부처이고, 어디서 부처를 구할 것인가? 서양의 종교들처럼 '지금 여기'를 떠나서 별도로 부처를 구한다면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처럼 부질없는 노릇이다. '지금 여기'의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부처를 구하고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수심결’에서 보조국사는 이렇게 말한다.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자신의 피로써 사경(寫經)을 하고, 하루에 한번만 식사를 하면서 경전을 읽고, 누워서 잠을 자지 않고 온갖 고행을 다해도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이다. 이 마음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계속적으로 헤맬 뿐이지 그 중심 자리에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수년을 공부해도 얻는 바가 없다면 공부하는 기본적인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의 중심에는 ‘부처를 어떻게 定義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가로놓여있다. 이것에 따라서 각자의 종교적 관점은 달라진다.
그런데 부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法을 보는 者는 나 如來를 볼 것이다.’ ‘如來를 보는 者는 바로 緣起法을 본 者이다.’ 여기서 緣起法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눈으로 색깔을 보는 것이고, 귀로 소리를 듣는 바로 이 瞬間을 의미한다. 그러니 부처란 바로 지금 여기 순간순간의 경험들이다. 이지금 여기 순간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진리와 부처를 구할 수가 없다.
동북아 선종에서는 이것을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했다. 지금 여기의 마음이 그대로 곧 부처라는 말이다. 단지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自覺한다면 항하사 모래와 같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의미를 구하지 않아도 일시에 다 터득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부처도 이 마음을 깨달았고, 현재의 부처도 바로 이 마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올 미래의 부처도 바로 이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일상에서 손쉽게 경험하는 내용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을 잘 때까지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경험하는 내용이다. 이들 모두가 다 이 한 가지 마음인가?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인경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79호 / 2015년 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