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스님의 수심결

8. 분별과 침묵의 딜레마

장백산-1 2015. 3. 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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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분별과 침묵의 딜레마
성스런 침묵 있는 곳에는 분별이 없다
2015년 03월 03일 (화) 10:17:10인경 스님 khim56@hanmail.net

 

異見王은 現實 政治에서 有能하다. 이것을 ‘世俗的 眞理[俗諦]’라고 부른다. 俗諦 여기에는 정치적 갈등을 조절하는 능력이 요청되고, 오랜 역사에 걸쳐서 형성된 관습적인 방식이 존재한다. 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건들이다. 反面에 바라제 尊者는 現實 政治에 대해 無能하다. 그의 沈默은 世俗的 言語를 떠난 관계로, 현실적인 정치에 유용한 어떤 정책을 개발하는데 弱點이 있다. 그러나 ‘窮極的인 價値[眞諦]’로 나아가는 데는 바라제 존자의 沈默은 有用하다.

平常心이 세속적 가치라면   道는 궁극의 침묵 의미해
 煩惱는 단박에 제거 안 돼   깨달음 향해 조금씩 나가야

 우리는 言語를 배우면서 끊임없이 對相을 分別하고 判斷하는 마음의 演習을 한다. 예를 들면 사과와 배를 區別하지 못하면 世上의 삶에서 適應할 수 없고 生存할 수가 없다. 아이들은 사과와 배라는 소리와 글씨의 差異를 認識하는 方法을 배우고, 또한 그림을 通해 사과와 배의 이미지가 어떻게 다른지를 學習한다. 이렇게 수년을 훈련해 왔기에 對相을 보고·듣는 瞬間 言語的인 分別은 自動的으로 뒤따라 일어난다. 우리는 母國語와 다른 外國語를 배우면서 이 事實을 매우 分明하게 自覺한다.

그런데 바라제 존자는 보고·듣는 瞬間에 그곳에서 本性을 본다. 감추어진 바 없는 本來 드러난  本來面目, 眞理를 본다. 이곳에서는 言語的인 分別이 없다. 外形的으로는 沈默처럼 보인다. 깊은 內面에서 기쁨, 행복감과 경이로움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견왕은 바라제 존자의 이런 沈默을 理解할 수가 없다. 이견왕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이견왕의 世俗的 價値와 바라제 존자의 窮極的 價値 사이에 딜레마가 있다. 이들은 葛藤關係이다. 世俗的인 言語的 分別에는 거룩한 窮極的인 沈默이 없다. 反對로 聖스런 沈默이 있는 곳에는 言語的인 分別이 없다. 현실적인 가치는 현실에 대한 평가와 정책수립에 집중하기에 실질적으로 궁극적인 진리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현실적인 유용성과 이윤에만 집착한다. 反對로 分別을 떠난 眞實은 現實의 問題에 끝내 沈默한다.

現實과 窮極 이 둘은 정말로 兩立 不可能인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統合이 必要하지 않은가? 現實的인 分別은 沈默을 必要로 하며, 沈默은 分別을 通해 自身을 드러낸다. 分別만 있고 沈默이 없다면 심각한 精神的 疾患狀態이고, 沈默만 있고 分別이 없다면 現實에 대한 無能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 이들 兩者는 統合이 必要로 하지 않겠는가?

이들 兩 觀點에 대한 統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實際 歷史的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고, 또한 끊임없이 논쟁해온 이슈이다. 代表的으로는 마조화상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가 있고,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그것이다. 이들은 葛藤하는 양자를 統合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平常心是道에서 平常心은 分別이 있는 世俗의 價値라면, 道는 窮極의 沈默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마조화상의 주장은 양자를 統合하는 극적인 형태로서, 煩惱가 그대로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불성의 작용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번뇌란 幻과 같아서 實體가 없는 ‘本來 存在하지 않는다’는 前提 아래 煩惱가 곧 깨달음이란 의미이다.

하지만 現實的으로 과연 煩惱가 存在하지 않는가? 苦痛이 있는 곳에는 煩惱가 있지 않는가? 이런 반론이 당장에 提起 된다. 만약에 煩惱가 없다면, 修行도 없고 迷惑도 없기에 깨달음도 마땅히 없는 것이지 않는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안이 ‘頓悟漸修’다. 煩惱가 ‘本來 存在하지 않는다’는 理致에 대한 깨달음은 단박에 얻을 수가 있지만, 깨달음의 現實的인 適用과 運營에서는 漸進的인 수행의 길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煩惱의 오랜 習氣는 단박에 提去할 수가 없기에, 또한 現實은 다양한 見解들이 葛藤하기에, 여기서 깨달음에 의지해 조금씩 窮極的인 價値를 向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現實的 考慮이다.

만약에 이글을 읽는 그대라면 日常과 超越, 世俗과 出家, 煩惱와 깨달음, 頓悟와 漸修의 葛藤을 어떻게 統合했으면 좋겠는가?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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