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婆羅提尊者)에게 물었다. “佛性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佛性은 作用하는데 있다”고 尊者는 대답했다.
마음 떠나서 眞理 주장하면 日常은 전혀 價値가 없게 돼 우리가 보고 듣는 이 瞬間은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일 뿐
王이 다시 물었다. “어떤 作用이기에 지금 나는 보지 못합니까?” 尊者가 대답했다. “現在에 作用하지만 王께서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중략)…눈에서는 보는 것이요, 귀에서는 듣는 것이며, 혀에서는 말하는 것이고, 손에 있어서는 잡는 것이고, 발에 있어서는 걷는 것이고, 이것은 온 世上을 능히 두루 다 감싸고, 거둬들이면 티끌 속으로도 들어갑니다.” 이에 異見王이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佛性은 人間의 性稟을 말하는 것이다. 이 人間의 性稟인 佛性을 方便으로 表現하는데 經典에는 法의 性稟이기에 法性이라 하고, 스스로의 性稟이기에 自性이라 하고, 本來 存在한 性稟이기에 本性이라 하고, 神靈한 性稟이기에 靈性이란 表現을 함께 사용한다.
바라제존자와 異見王의 立場이 서로 충돌한다. 異見王은 ‘보고’ ‘듣는’ 日常의 마음作用이 그대로 불성(佛性)이라는 바라제존자의 말이 理解가 되지 않는다. 日常에서 우리 마음이란 화도 내고 기뻐하기도 하고, 온갖 갈등 속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이게 우리의 마음이 아닌가? 이런 마음을 모두 다 그대로 佛性의 作用이라고 한다면, 問題가 있지 않겠는가. 極端的으로 말하면 싸우고 煩惱 妄想에 휩쓸리는 마음까지도 모두 佛性이라고 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日常에서 作用하는 마음을 떠나서 別度의 眞理를 주장한다면 우리의 日常은 전혀 價値가 없게 된다. 이런 式이라면 眞理를 찾기 위해 日常을 벗어나야 한다. 밖에서 別度의 窮極的인 眞理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거짓된 믿음으로 理想化된 想像의 世界에 머물 뿐이다. 結局은 虛構의 絶對者를 創造하거나, 아니면 形而上學的인 實在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이 같은 우상숭배는 백일몽처럼 空虛하기가 그지없고 아무리 努力을 해도 絶望만이 뒤따를 뿐이다.
結局 우리는 日常의 ‘보고 듣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出發點은 보고 듣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뿐이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여기에 서면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놓여있다. 하나의 길은 思惟의 길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沈默의 길이다.
첫 번째 思惟의 길은 보고 듣는 瞬間에 헤아리고 分別하고 生覺한다. 이 思惟의 길 위에서 우리는 瞬間瞬間 判斷하고 選擇한다. 이 思惟의 길은 世上과 싸우기도 하고 妥協하면서 適應해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인 沈默의 길에서는 보고 듣는 瞬間에 眞理에 契合한다. 보는 것이 그대로 경이로움이고, 듣는 것에서 깨어난다. 보고 듣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分別 判斷을 멈추고 보는 그놈 듣는 그놈 그놈 그 自體를 알아차리면서, 그놈 그것에서 滿足스런 美笑를 經驗하는 길이다.
첫 번째 길은 異見王의 길이다. 두 번째의 길은 婆羅提尊者의 길이다. 兩者 모두 共通的으로 모양을 보고, 소리를 듣는다. 이것을 通해 異見王은 情報를 收集하고 判斷하고, 意思決定을 한다. 이곳에서 異見王은 佛性의 作用을 보지 못한다. 反面에 婆羅提尊者는 보고 듣는 行爲 自體가 바로 眞理이다. 아침에 세수하는 行動,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行動, 이 行動들이 모두 佛性의 作用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바히야여, 눈으로 볼 때는 보여지게만 하고, 들을 때는 들려지게만 하라. 感覺할 때는 感覺되어지게만 하며, 알게 될 때는 認識되어지게만 할 뿐이다. 바히야여, 그곳에는 그대가 없다. 그대가 그곳에 없으므로 그곳에 괴로움 또한 없다.”
내가 對相을 보는 것이 아니고, 對相이 보여지는 것이다. 소리를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들려지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챙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對相을 判斷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言語를 가지고 내가 思惟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곳에 내가 없다. 단지 보는 行爲만이 存在하고, 단지 듣는 行爲만이 存在할 뿐이다. 이것이 참다운 고요함이고, 깨어있음이며, 이것이 곧 佛性의 作用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佛性의 作用인 이 幸福한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일까?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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