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말한 ‘성품을 보는 것[見性]’이 진정한 견성이라면, 곧 성인이다. 그러면 응당 신통변화를 현시하여 일반인과는 다를 것인데, 오늘날 마음 공부하는 이들은 왜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나타내지 못하는가?”
道란 平凡하고 單純한 日常 온갖 言語의 길 끊어졌으니 단지 물 긷고 땔감 주을 뿐 헛된 迷惑에 넘어지지 말라
이 질문을 보면, 옛날 사람들에게 도인(道人)이란 神通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는 하늘을 날아다닐 수가 있고, 저 멀리서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들 수가 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리 아는 사람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이런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옛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위의 질문에 보조국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친 말[狂言]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삿됨과 올바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迷惑으로 말미암아 넘어진 사람이 된다.” 이게 보조국사의 對答이다. 神通變化를 追求하는 일은 삿된 일이다. 그는 迷惑으로 넘어진 사람이다.
그러면 道를 이룬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다음의 방온(龐蘊, ?~808) 거사의 게송을 보자. 어느 날 석두화상은 방 거사에게 “요사이 어떻게 지내나?”고 물었다. 그러자 방 거사는 이렇게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일용사무별 유오자우해) 頭頭非取捨 處處沒張乖 (두두비취사 처처몰장괴)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주자수위호 구산절점애) 神通幷妙用 運水與搬紫 (신통병묘용 운수여반자)
‘일상에서 별 다른 일이 없어 다만 스스로 잘 지낼 뿐. 만나는 事物에 取하고 버림이 없고 가는 곳곳마다 남거나 어긋남이 없다. 붉은 색과 자주 빛 관직은 누가 이름 했는가? 이곳 산중은 언어가 끊어졌으니, 신통과 묘용은 단지 물 긷고 땔감 줍는 일이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고, 감격의 강물이 가슴을 적시며 흘러간다. 지극히 뛰어남은 지극히 단순함에 있다. 道人은 일상의 평범함에 숨어버렸다. 그는 대나무 숲에 들어가서 대나무가 되어버렸다. 그 自然의 順理에 同化되었다. 그에게는 特別함이 없다.
방 거사는 마조 화상의 제자이다. 방 거사는 마조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온갖 現象들[萬法]과 짝이 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조 화상은 “거사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셔버린 뒤에 말해주리라”고 대답했다.
방 거사는 이 말에 활짝 깨달았다. 우리는 恒常 온갖 對相들과 因緣을 맺고 그 因緣으로 認識이 發生한다. 이런 因緣과 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意味인가?
그것은 온갖 因緣에도 물들지 않는 本來의 本性, 淸淨t性이다. 本來 具足한 淸淨함은 言語的인 槪念으로 다가갈 수 없다. 설사 西江의 물을 다 마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本來의 本性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대상을 생각하는 瞬間에 드러난다.
그래서 道란 特別한 神通變化가 아닌 平常의 마음이다. 平常心이란 가장 平凡하고 지극히 單純한 日常이다. 붉은 색과 자주 색과 같은 화려한 정치적 지위의 옷을 입지 않는다. 온갖 言語의 길이 끊어졌으니, 단지 물 긷고 땔감을 주을 뿐 別다른 일이 없다.
어떤가? 물 긷고, 땔감을 주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어릴 시절에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것을 초등학교 시절에 다 해보았다. 그러나 중학교 때 도시로 이사를 온 이후 땔감을 주워본 적이 없다. 그땐 연탄을 사용했고, 나중에는 가스레인지와 전기밥통을 사용했다.
최근 우리는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不安해서다. 또한 우리는 정말 ‘하이테크의 神通變化’를 經驗하고 있다. 그러나 現代 情報化社會의 하이테크 속에서 우리는 점점 메말라가고 우리의 本來的 지극함과 純朴한 平凡함을 잃어가고 있다. 정말이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