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스님의 수심결

10. 돈오와 선지식 ///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의 본성을 보라

장백산-1 2015. 3. 1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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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돈오와 선지식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의 본성을 보라
2015년 03월 17일 (화) 09:43:21인경 스님 khim56@hanmail.net

“홀연히 선지식을 만나 (도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 받고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의 본성을 본다면, 이 성품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한량없는 지혜의 성품이 스스로 구족되어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것을 돈오(頓悟)라고 한다.”

돈오의 첫째 조건은 선지식  스승 없이는 깨달음 불가능
점검·인가 통해 지혜 익어  분별 떠나 하나 되는 과정

돈오에 대한 보조국사의 정의다. 이 정의에 따르면 돈오의 중요한 조건은 선지식의 제시[善知識 指示入路], 한 생각을 돌이키는 것[一念廻光],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見自本性], 세 가지다. 이것들을 조건으로 해서 그 결과로 돈오를 이루는데, 돈오의 내용은 원래 번뇌란 없음[原無煩惱]이고, 한량없는 지혜의 성품을 구족하며[無漏智性], 부처와 전혀 다름이 없다[卽與諸佛 分毫不殊]는 것, 세 가지다.

돈오의 첫 번째 조건이 선지식이다. 선지식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깨달음도 없다고 말한다. 단독으로 깨달음을 얻는다곤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있다. 절대적으로 선지식의 지도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온전한 것이 된다. 수많은 선문답은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다. 물론 열정적인 제자의 각고의 노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열정도 결국 스승의 지도 아래에서 유지되고, 더욱 타오른다. 산이 있기에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스승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부이고 가르침이다.

제자에게 선지식의 삶은 그 자체로 모델이 된다. 반드시 별도의 가르침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이란 것이 언어적인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승이란 그대로 제자의 영혼을 구성하는 본질이 된다.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조주화상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조사란 달마대사를 말한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기에 “왜 오셨나?” 하는 질문이다. 그러자 스승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조금 엉뚱한 대답이다. 그러나 달마대사께서 동쪽으로 갔든, 서쪽에서 왔든, 중요한 것은 논리적인 설명이나 학문적 접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논리적인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제자가 물었다. “무엇이 진짜 나입니까?” 그러자 스승은 침묵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답답한 제자는 다시 물었다. “무엇을 나라고 해야 합니까?” 스승은 역시 침묵하였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는 스승이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냥 다른 스승을 찾아갈까 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아서 한 번 더 묻기로 했다. “정말이지, 무엇이 나입니까? 대답해주지 않으면 저는 여길 떠날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다. “난 너에게 잘 제시하고 있지만, 네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자아란 바로 침묵이다.”

그러나 침묵, 침묵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아쉽게도 침묵은 깨져버렸다. ‘침묵’이란 언어적인 접근을 통해서는 실제적 ‘침묵’을 제시할 수 없다. 여기에 스승의 딜레마가 있다. 논리적인 개념으로는 진리의 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 고도의 언어적 정보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논리적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무엇도 이해를 못한다. 차라리 ‘뜰 앞의 잣나무!’가, 언어의 꽃병을 깨뜨리는 데 더 효과적일 수가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 말이 어렵다고 한다. 쉬운 말로 설명하면 개념적인 이해가 떨어진다. 반대로 논리를 벗어난 가르침에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이런 역설과 딜레마를 통해 스승은 제자의 공부를 점검하는 것이다. 스승은 운동선수들이 그러는 것처럼, 제자를 단련시킨다. 단련(鍛鍊)이란 쇠를 뜨거운 불속에 넣었다가 다시 차가운 물속에 넣기를 반복하면서,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과정은 참 아프다. 그래도 수련을 했으면 스승은 수련의 과정을 점검을 해주어야 한다.

얼마나 나아갔는지, 어디에 집착해 웅덩이에 빠져 있는지, 과거의 어떤 상처, 장애가 도에 들어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그 장애를 통해서 깨달음에 나아가도록 돕는 작용이 바로 스승의 존재이다. 옛날부터 깨달음을 경험했다면 반드시 스승에게 점검을 받고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만이 스승과 제자는 모든 분별을 떠나 서로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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