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스님의 수심결

우리 마음은 본래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장백산-1 2015. 7. 31. 14:12

 

 

[우리의 마음은 본래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自性이란 個念은 事物의 本來的인 스스로의 性稟/性質을 意味한다. 本來的인 스스로의 性稟/性質이라는

意味로 本性이라고도 말하고, 眞正한 性稟이란 意味에서 眞性이라는 表現도 사용한다. 다른 사물과 구별

되고 구분되는 어떤 것이 어떤 것이 되게하는 本來的인 性質로서의 根本 本質이 自性이다.

 

예를 들면, 불(火)의 본래적인 성질 본질 자성은 '태움'이다. 무언가를 태울 수 없다면 불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물의 본질 성질 자성은 '젖음' 습한 성질이다. 무엇인가를 젖게할 수 없으면 물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음의 본래적인 성질 본질 본성 자성은 무엇일가? 마음을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본질적인 성질은 무엇일까? 그 본질적인 성질이 있기에 다른 사물과 구분되는 오직 마음에게만 존재하는

성품은 무엇일까?

 

모든 중생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중생마다의 마음에 차이는 있지만 그 마음들의 공통된 본질 성질

본성 자성은 무엇일까?  지구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물이 존재하고 있다. 짠 바닷물도 있고, 아침에 마시

食水도 있고 여름에 쏟아지는 소낙비의 물도 있다. 얼음도 있고 서리도 우박도 눈이라는 물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젖음' 濕性이다.

 

그러면 마음의 본래적 성질 특성 본질 자성 본성은 무엇일까? 마음의 본래적인 성품 특성 자성 본성 본질

은 '알아차림'이다. 마음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는 언제나 '알아차림'이 있다. 나무나 바위 흙은 '알아차림'

없다. 하지만 지렁이는 밟으면 알아차리고 꿈틀거린다. 사물마다의 마음이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마음, 의식의 본질 자성 성질 특성 본성은 '알아차림'이다. 마음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스스로의 성품 본성

자성 본질은 '알아차림'이다. 이 마음의 본성 '알아차림'을 확대해서 '수심결'에서는 戒 定 慧 삼학으로

설명한다.

 

三學, 戒 定 慧에서 계는 '자성의 계'이고, 정은 '자성의 정'이고, 혜는 '자성의 혜'라고 말한다. 이런 大乘的

해석은 특히 육조단경에서 강조한 이후에 마음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동북아시아 불교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쉽게 말해서 근본적인 본래적인 마음이란 '그릇됨 없이 청정함'이고, '산란한 없는 고요함'이고,

'어리석음 없는 지혜로움'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적으로 어떤 부족함도 없는 존재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적으로 스스로 청정하고,

스스로 고요하고, 스스로 지혜롭다. 이런 마음의 성품은 외부에서 주어진 성질이 아닌 본래적인 본성

자성 본질이기에 本性이라고도 하며, 모든 마음 현상의 공통된 근본 본질이기도 하기에 法性이라고도

하고, 본래적인 스스로의 성질이기에 自性이라도 한다. 이런 특성이 다른 사물의 마음과 구별되는

人間 마음의 본질이다.

 

그런데 마음의 본질에 대해서 두 가지 觀點이 對立된다. 하나는 마음의 청정함, 고요함, 지혜는 계속

啓發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마음은 그릇된 마음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산란한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을 계발시켜야 하고, 어리석은 마음에서 지혜로운 마음을 발전시

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잡초는 번뇌망상은 그대로 두면 계속 자라나기에 끊임없는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점수(漸修)의 관점이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돈오(頓悟)의 관점이다. 돈오의 관점은 마음은 본래적으로 근본 본질이 청정하고

고요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애써 수행할 필요가 없고(無修), 애써 마음의 근본 본질을 증득할 이유가

없고,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노력하고 습득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관점이다. 이미 마음

의 근본 본질은 본래적으로 스스로 이미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찾고 깨닫기 위해서 밖으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이다. 단지 이런 마음의 근본 본질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관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느 관점이 더 타당한 관점일까? 한쪽은 마음이란 그릇되어 있고, 산란

하고, 어리석기에 계속 닦아야 하고, 그 증상을 계속적으로 개선시켜야 한다. 애써 노력을 해야 하고,

관리를 해야 하고, 통제를 가해야 한다. 반면에 다른 쪽은 마음은 이미 다 완성되어 있는데 왜 다시

난리를 치는가? 사족을 달아서 더욱 번거롭게 하는가? 이미 마음이 완전해서 그릇됨이 없어 이미 청정

하고, 이미 산란함이 없어 고요하고, 이미 어리석음이 없어 지혜로운데 무엇을 다시 구하고 깨닫는 다는

인가? 단지 이렇게 깨닫기만 하면 된다. 무엇을 별도로 얻고자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한쪽은 人間性의 否定的인 측면을 보고 있다. 파괴적이고 끊임없이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전쟁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이 편히 쉴 날이 없다. 그래서 인위적으로라도 마음을 닦는 노력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인류의 생존은 행운이 아니라 지옥이 된다. 反面에 한쪽은 人間性의 肯定性을 본다. 왜 스스로 고통 속

으로 들어가는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보라.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행복

하다. 이름을 알수 없는 작은 들꽃을 보면서도 우리 마음은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지 않는가?

 

인경 스님의 수심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