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질이 완고하여 알아차림과 의지가 없다. 어찌 (대상에 대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히 너의 佛性이다.”
유식불교서 마음은 세 종류 일상현상에 집착하는 마음 조건에 상호작용하는 마음 참되고 부족함 없는 마음
위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까? 여기서 첫째는 몸과 마음의 구별이다. 둘째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마음의 作用 그대로가 佛性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의 몸과 마음의 구별은 쉽게 이해가 된다. 對相을 認識해서 아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색깔을 본다면 눈이라는 感覺器管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의 意識, 곧 感覺器管을 通해서 마음이 對相을 본다. 죽은 사람은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듣지를 못한다. 그러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바로 간화선의 입장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한국 간화선의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안이다. ‘수심결’은 ‘이 공안에서 깨닫는 바가 있다면, 부처와 조사의 손을 잡고 함께 간다’고 말한다. 바로 이점 때문에 ‘수심결’은 간화선 수행의 훌륭한 지침서다.
여기에 아주 좋은 사례가 있다. 무업(760~821) 스님이 처음으로 마조(709~788)대사를 뵙던 이야기다. 무업 스님은 키가 크고 훤칠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마조대사는 무업 스님을 보고 “몸은 우람한 법당인데 그곳에 부처가 없구나” 했다. 그러자 무업 스님은 절을 한 후 “교학공부는 대략 했지만 선문에서 마음이 부처라 하는데 이것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조대사는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무업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와서 전한 심인(心印)은 무엇입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마조대사는 “정말 소란스럽군. 우선 갔다가 다음에 오게!” 했다. 무업 스님이 일어나 나가자, 마조대사는 “이보게?”하고 다시 불렀다. 무업 스님이 고개를 돌리자, 마조대사는 “이게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다. 이때 무업 스님은 깨닫고 절을 했다.
여기서 핵심된 질문은 고개를 돌리는 무업 스님에게 묻는 “이게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이뭣고?’ 화두의 원류다. 무업 스님은 “이보게!” 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것은 곧 “소리를 듣는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소리를 듣는 것이 一次的인 알아차림이라면, “이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의한 自覺은 소리를 듣는 것을 반조(返照)하는, 되돌려듣는 二次的인 自覺, 곧 깨달음이다. 이 과정을 유식불교의 3가지 마음작용으로 분석해보자.
유식불교의 이해에 따르면 마음은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대상을 판별하고, 개념화하고, 자신의 갈망에 따라서 집착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다. 이것은 언어적인 사유에 의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마조대사의 코멘트를 알지 못하고, 다시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묻는 것은 주제에서 벗어난 언어적인 분별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마조대사는 ‘정말 소란스럽군’하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 마음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조건에 따라서 상호작용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매순간순간 우리는 대상과 접촉하고 상호작용한다. 의식이 있는 순간, 살아있는 한 이것은 주어진 생명의 조건이다. 이것은 대상을 보는 순간이고, 소리를 듣는 현재의 순간이다. “여보게!” 라고 마조대사가 무업 스님을 불렀을 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 마음은 원성실성이다. 아는 것을 아는 ‘마음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고 참된 성품으로서의 마음이다. 듣는 것을 되돌려 듣는 마음이고, 아는 것을 아는 마음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라면,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촉발된 마음이 바로 마음 그 자체에 대한 자각, 깨달음이다.
‘마음이 그대로 곧 불성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을 말한다. 그러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이것은 변계소집인가? 아니면 의타기성인가? 아니면 원성실성인가?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에 집착된 마음’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조건에 의해 상호작용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온전하게 깨어있는 거룩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글을 읽는 그대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